188화. 다종족 연합국 (2)
‘세상에 먹는 거 갖고 약 올리는 만큼 치사한 것도 없다고 했는데…….’
이세훈이 능청을 떠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사정이 여의치 않다며 핑계를 대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을 듯했다.
오 일이나 숲에 갇혀 굶다시피 한 사람들한테 제대로 된 술과 고기를 먹고 싶으면 일을 하라는 건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린하이 님…….}
{린하이 님…….}
포로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꿀꺽.
모두 이미 음식 냄새에 취한 모양인데 일을 해도 되는 건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는 모양이었다.
{스카이 캐슬은 우리 청방 길드를 공격한 적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성곽 공사를 참여한다는 건 적의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걸 도와주는 것이고요. 지금 당장이야 별일 없겠지만 나중에라도 이 사실이 청방 길드에 알려지면 크게 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린하이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포로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포로들이 공사에 참여하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그의 말처럼 성곽은 단순 건물이 아니라 전쟁을 하기 위한 전쟁 도구였기에 공사에 참여하는 순간 청방 길드 입장에서 이들은 역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직접적으로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린하이도 돌려서 협박하는 것이었다.
{제기랄. 고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젠장. 빨리 숙소로 안내해 주십쇼. 여기 계속 있다간 저곳으로 달려가 손으로 음식을 마구 집어 먹을 것 같으니.}
꿀꺽.
린하이의 협박이 통했는지 포로들이 군침을 삼키면서도 음식들을 외면했다.
“안내해 주세요.”
“네.”
난 헌터들과 눈을 마주치며 포로들을 숙소로 이동시키게 했다.
누군가 한 명쯤 공사에 참여한다고 나서면 적지 않은 이들이 은근슬쩍 뒤를 따를 것 같았지만 난 더 이상 유혹하지 않았다.
이미 앞서서 포로로 잡힌 이들 대부분 공사에 참여하고 돈을 받아 음식을 사 먹는 걸 보면서도 참아 낸 그들의 의지를 존중했다.
“해용아, 저 새끼 계속 저렇게 놔둘 거야?”
반쯤 넘어왔던 포로들이 등을 돌리고 숙소로 돌아가자 이세훈이 살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노려봤다.
하루라도 더 빨리 그리고 많이 포로들을 회유해야 하는데 린하이가 계속 딴죽을 거니 많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스카이 캐슬의 지도자로서 린하이랑 약속했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들의 신변을 그와 그의 수하들에게 맡기고 그 어떤 고문이나 강제 노동을 시키지 않겠다고.”
“지금 우리가 강제로 노동을 시키는 게 아니잖아. 돈을 주고…….”
“그래서 나도 가만히 있는 거야. 헌데 그 이상은 원하지 마. 그나마 돈을 주고 저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있으니 린하이도 가만히 있는 걸 테니까. 여기서 더 선을 넘어 버리면 린하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난 굳은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그의 마음이 어떤지 알고 그를 도와야 하루라도 빨리 성곽이 완성된다는 건 알지만 린하이의 심기를 더 이상 건드리면 안 되었다.
동료들 스스로 선택해 참고 있지만, 우리가 여기서 더 강제하면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가 삐딱선을 타고 청방 길드에 이곳 상황을 알리면 지금의 평화는 한순간에 끝나 버리는 수가 있었다.
“네 마음은 알지만, 조급히 움직이면 사고가 생기기 마련이야. 약속했고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린하이도 딴마음을 안 품지 않을까?”
“에휴, 알았다.”
이세훈이 날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이라는 말에 그는 더 이상 가타부타 따지고 들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때론 약속을 어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그래서 속으론 내심 대충 얼버무리며 이세훈을 거들어 주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으나 난 애써 억눌렀다.
개인적으로 한 약속이면 모를까. 난 스카이 캐슬의 대표로서 린하이와 계약을 했고 내가 그걸 어기는 순간 우리 연합의 모든 이들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내 동료들을 신뢰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게 비록 포로로 잡힌 사람한테 일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난,
‘지윤미 마스터 말 듣고 잘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처음 그를 잡아들였을 때 눈에 색안경을 끼고 대한 게 아쉬워 눈에 아른거릴 만큼 린하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비록 우리에게 이곳을 빼앗겼지만, 그가 있으므로 인해 청방 길드는 이십만에 이르는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됐으니까.
지휘관으로 참 탐이 나는 인재였다.
만약 우리 지휘부에 저런 사람이 있으면 내가 없어도 동료들의 목숨을 지켜줄 인재가 생기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리폰 라이더라 지휘관이 아닌 개인의 능력만 봐도 뛰어나고 특출 난 헌터임에 분명했고.
포로들도 포로들이지만 난 가능하다면 린하이를 우리 쪽으로 전향시키고 싶었다.
“저놈도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어딜 봐서 흔들려 보이냐?”
“눈빛이 그래. 처음 봤을 땐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표정이 없었는데 지금은 화를 내고 있잖아.”
“흠…….”
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처음 봤을 땐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표정이 없었는데…….’
이세훈이 한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아군의 지휘관을 죽이고 항쟁하려는 헌터들을 회유해서 투항시킨 자가 복귀하면 과연 청방 길드 수뇌부는 어떻게 할까?
짐작건대 그는 포로들을 온전히 다 데리고 가도 큰 벌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어찌됐든 청방 길드는 전쟁에 패배해 우리에게 이곳을 빼앗겼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그런데도 그는 동료들을 이끌고 돌아가려 하는 것이었다.
설사 그 벌이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세훈이 제대로 본 게 맞는다면 린하이는 우리에게 투항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세훈이 그런 느낌을 받았을 테고.
“먹을 것 때문에 흔들릴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동료들 때문인가?”
“만약 흔들리고 있는 게 맞으면 그렇지 않을까? 말 안 듣게 생긴 게 저놈도 한 고집 한 게 생겼거든. 죽었으면 죽었지. 전향할 놈은 아니야. 근데 자신이 설득해서 투항한 동료들이 계속해서 우리 쪽으로 전향을 하니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나 본데? 동료들을 무사히 탈출시켜 가서 혼자 책임지고 죽으려고 했는데 점점 의미가 없어지고 있잖아?”
“그러게…….”
난 이세훈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난 며칠간 지켜본 린하이의 성정을 봤을 때 이세훈이 제법 합리적인 의심에 이어 추론을 하고 있었다.
린하이는 책임감 있는 사내였고 동료들이 이곳에 남아 있기로 결심하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닐 듯했다.
“포로들을 계속 전향시키면 알아서 딸려 오려나?”
“내 느낌엔 그래. 일단 조금 더 들이대 볼까?”
“그래. 알았어. 적당히 모른 체할 테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곳에서 꾸준히 직장생활을 오래 한 이세훈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그가 그렇게 느꼈다면 맞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나 역시 이세훈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마침 저기 오네.”
나와 한참 얘기를 하던 이세훈이 성곽 입구를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엥? 저 사람들이 왜 여기까지?”
성곽 입구엔 늑대를 타고 등에 짐을 가득 실은 대한 헌터 협회 헌터들 수백여 명이 들어서고 있었다.
우리와 동맹을 맺은 길드들은 가슴에 소속된 길드 문양과 함께 스카이 캐슬의 문양을 함께 달고 있었는데 다들 하나의 문양만 달고 있었다.
“내가 불렀어.”
“왜? 저 사람들도 전쟁에 참여하겠대?”
“아니. 전쟁에 참여하라고 부른 게 아니라 와서 장사 좀 하라고 했어. 아직 길이 제대로 뚫리지 않아서 우리 헬퍼 인원으론 물건 조달하는 게 만만치 않더라고.”
이세훈이 내게 설명하며 헌터들에게 걸어갔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어떻게 얘기한 물품들은 잘들 갖고 오셨나요?”
“네. 늑대들 때문에 생각보다 편하게 가져왔습니다. 여기 얘기하신 잡지입니다. 포로들이 뭘 좋아할지 몰라 종류별로 가져왔습니다.”
“전 카세트랑 CD 가져왔습니다.”
“…….”
“…….”
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과 헌터들을 쳐다봤다.
헌터들은 마치 보따리장수라도 된 것같이 가방 속에서 갖가지 물품들을 쏟아 냈다.
남성용 잡지. 화장품, 추리닝, 속옷, 초콜릿, 과자, 음료수, 샴푸, 세안제…….
마치 전방에 있는 PX 차 아니 황금 마차처럼 헌터들의 가방 속엔 포로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저희가 임시로나마 천막을 만들어 놨으니 직접 파셔도 되고 번거로우신 분은 저희 헬퍼들한테 넘기셔도 됩니다.”
“헬퍼 분들한테 넘기면 가격은 어떻게 되나요?”
“일반 판매가에서 50% 더 쳐 드리겠습니다.”
“오 그렇게나 많이 준다고요?”
“제대로 된 길도 없고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곳을 뚫고 왔는데 그 정도는 드려야죠. 포로들도 이곳에서 생활해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조금 더 받는다고 해도 군말 없이 구매할 겁니다.”
“하하. 힘들게 가져온 보람이 있네요. 그럼 전 헬퍼들한테 넘기겠습니다.”
늑대 등에 짐을 한가득 가져온 헌터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품들을 헬퍼들에게 넘겼다.
“직접 장사를 해도 되는 거죠?”
“네. 물론입니다. 근데 너무 폭리를 취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도 원래 정상가의 100% 정도만 더 받을 계획이니 여러분도 같은 금액에 판매하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그럼 전 직접 판매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부 헌터들은 직접 천막에 물품들을 깔아 놓고 장사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세훈은 판매가 만 원짜리 잡지를 만 오천 원에 매입하고 다시 이만 원에 판매하려고 했다.
‘너무 비싸게 매입하는 것 같은데? 저러다 안 팔리면 어떡하려고 그러지?’
짐작건대 저런 식으로 매입을 하면 헌터들은 한 번의 상행에 최소 수백만 원의 이익을 취할 듯했다.
‘완전 날강도들이 따로 없네.’
그리고 잘 팔린다는 가정하에 그 손해는 모두 포로들에게 돌아갈 테고.
난 슬며시 이세훈에게 다가가 바지 단을 잡아당겼다.
“세훈아, 너무 비싸게 사는 거 아니야?”
“일부러 비싸게 사는 거야. 그래야 소문이 나서 헌터들이 적극적으로 찾아오지.”
이세훈이 날 보며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스카이 캐슬 개발을 하다 보니까 억지로 사람들 불러 모으려고 이것저것 해 봤자 의미 없더라. 돈이 최고야. 물품들 가져와서 팔면 돈 된다고 소문나면 알아서 사람들이 몰려오겠지. 그럼 그 사람들이 다시 이곳의 물품을 소비하고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될 거야. 그리고 급할 땐 병력으로 돌릴 수도 있잖아. 이런 게 일석이조 아니겠어?”
“그렇긴 한데 만 원짜리 잡지를 이만 원에 팔면 팔릴까?”
“글쎄. 그건 팔아보면 알겠지?”
이세훈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포로들이 머무는 막사를 쳐다봤다.
사람들이 몰려와 사제 물품들을 풀어 헤치니 호기심이 생겼는지 포로들이 관심을 갖고 설렁설렁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거 파는 겁니까?}
{네. 파는 겁니다. 원래는 삼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 이만 원만 받겠습니다.}
{이만 원이요? 여기 만원이라고 적혀 있는데?}
{에이. 아실 만한 분이 왜 그러세요? 게이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늑대 타고 와도 오 일은 걸려요. 위험수당이랑 인건비 좀 더 챙겨 주셔야죠. 하하.}
{아…… 그렇죠. 그럼 저 이거 하나만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
처음으로 다가온 포로 한 명이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예쁘장한 모델 사진이 있는 잡지 하나를 손에 들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보부상들이 첫 상행이라 물품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있을 때 얼른들 골라 가세요.}
{저도 한 권 주세요.}
{저도.}
{전 샴푸랑 세안제 하나씩 주세요.}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잠시 구경만 하고 있던 포로들이 황금 마차를 본 군인처럼 경쟁하듯 물품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