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다종족 연합국 (1)
“동료분들은 린하이 님과 생각이 조금 다른 모양이네요. 자리를 피해 드릴 테니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
“…….”
난 린하이와 우레이를 뒤로 하고 지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형 그냥 가시는 거예요?”
“그럼?”
“분위기를 보아하니 우레이라는 사람 말을 좀 거들어주면 린하이도 한발 양보할 것 같지 않아요?”
이부성이 아쉬움과 의문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내게 말을 건네 왔다.
켄트성의 북쪽도 북쪽이지만 남쪽에 성곽 공사를 하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혹시 모를 청방 길드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성곽이 지어지면 몬스터로부터 헌터들과 헬퍼들을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린하이의 요구대로 공사에 참여한 포로들을 철수시키면 성곽의 완성 시기는 더 늦어질 테고 우린 청방과 몬스터의 위협 속에 더디게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이부성은 그 부분이 염려되어 포로들의 마음에 힘입어 린하이를 설득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말로 거드는 것보다는 몸으로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네?”
“포로로 잡혀 왔는데도 이곳이 좋다고 하잖아. 그래서 이곳을 더 좋아하게 만들어 주려고. 그럼 굳이 린하이를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난 빙그레 웃으며 저 멀리 달려오고 있는 이세훈을 쳐다봤다.
근처에 있다가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 온 모양이었다.
15년 동안 아웃소싱 회사에 다녔던 이세훈.
그 누구보다 일용직 노동자들과 파견 근무를 나가는 직원의 마음을 잘 아는 친구였다.
짐작건대 그가 포로들의 마음을 우리 쪽에 기울게 한 일등 공신인 듯했다.
“천천히 와. 그러다 다치겠다.”
“지금 내가 천천히 오게 생겼어? 기껏 포로들 꼬시고 있는데 공사 현장에서 철수시키기로 했다며?”
내 예상이 맞는지 이세훈이 날 보자마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궁시렁거렸다.
“일단 그렇게 약속하긴 했는데 어쩌면 계속 참여를 시킬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편안하게 쉬게 해 준다고 하는데도 자발적으로 공사를 하고 싶다고 하네.”
“그래? 돈을 쏟아부은 보람이 있네. 흐흐.”
“…….”
내 대답을 들은 이세훈이 날 보며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돈을 쏟아부었다고? 도대체 포로들한테 얼마나 주기로 한 거냐?”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사실 아까부터 궁금하기는 했었다.
아무리 복지를 잘해준다고 해도 저들은 포로로 잡혀 온 것이었는데 저리 자발적으로 공사에 참여하겠다고 하니 나도 살짝 당황스럽기는 했었다.
“지금처럼 일하면 월 천만 원씩은 받아 갈걸?”
“엥? 포로한테 한 달에 천만 원이나 준다고?”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기껏해야 한 달에 이삼백만 원 정도 준다고 약속했을 줄 알았는데 그의 입에선 내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금액이 흘러나왔다.
“뭔 돈을 그렇게 많이 주냐? 난 한 이삼백 주는지 알고 오백만 원 정도로 올려주려고 했는데…….”
“많긴 뭐가 많아. 2019년 최저시급 8,350원 하루 9시간, 주 5일 근무 기준으로 했을 때 최저 월급이 1,926,553원이야. 근데 헬퍼들은 물론이고 포로들은 지금 아침 7시에 작업 투입돼서 자정까지 일하고 있어. 밖에서도 그렇게 일하면 월 5~6백은 가져간다. 근데 여긴 언제 몬스터한테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이 세계잖아. 당연히 그만큼은 챙겨 줘야지.”
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이세훈이 되레 언성을 높이며 열변을 토했다.
“그건 그렇지만 저들은 포로야.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려보낼…….”
“아니 저들은 이곳에 남을 거야. 공사에 참여시키기 전에 면담해 보니 다들 밖에서의 삶이 넉넉지 못한 것 같더라고. 네가 처음 월 삼천만 원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헬퍼 일을 시작했던 그때처럼.”
“…….”
이세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옛날얘기를 꺼냈고 난 아무런 말 없이 그를 쳐다봤다.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거야?’
단순히 후일을 생각해 포로들의 대우를 잘해 줬던 게 아니라 무언가 노림수가 있는 듯했다.
“저들도 공사를 하다 보면 느끼게 될 거야. 성곽 공사가 그리 짧은 시간 안에 끝나지 않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성곽이 완성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도로 공사는 물론이고 꼭 필요한 전기, 수도 공사. 그리고 기본적인 건물을 올리는데도 최하 십 년 이상 걸릴 거야. 그럼 저들은 그 시간 동안 매달 천만 원 이상씩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인데 과연 이곳을 떠나려고 할까?”
“그건 그런데 그렇게 돈을 퍼 주다 보면 우리가 먼저 파산하지 않을까?”
“자금은 넉넉해.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미스릴과 마나석 값이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오르고 있고 비토섬에 채취되고 있는 석유와 지하수 때문에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켄트성마저 점령하면 이제 성수마저 생기잖아.”
“흠…….”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그동안 확보한 자원으로 인해 자금은 넉넉했고 애써 밖에서 인력을 구하는 것보다는 포로들에게 돈을 조금 더 줄지언정 그들을 이용해 공사하는 게 용이할 듯했는데 난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눈빛이 음흉해.’
이세훈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평소와 달리 부연설명도 너무 길었고.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뭔가 감추고 있을 때 저런 눈빛을 하고선 말이 많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뭘 고민해.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공사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며. 그럼 우린 저들이 만족할 만큼 돈을 주면 그뿐이잖아. 그리고 이곳에서의 일이 소문나면 산에 숨어 있는 이들과 켄트성 사람을 회유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 그럼 우린 포로가 아니라 단숨에 20만이 넘는 국민이 새로 생기는 거잖아.”
“국민?”
“그래 국민.”
이세훈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갑자기 등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거였구나.”
이세훈의 표정을 보아하니 국민이라는 뜻이 대한민국 국민이라 일컫는 게 아닌 듯했다.
“이거긴 뭐가 이거야?”
“너 아직도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한 거야?”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Sealand 공국.
자체 여권을 갖추고, 화폐와 심지어 국가 대표 축구팀까지 있는……. 」
처음 스카이 캐슬에 방문하고 이세훈은 나에게 건국에 대해서 말을 했다.
그로 인해 재난 관리 본부와 헌터 협회와 사이가 좋지 않던 우린 두 곳과 더 날을 세우게 됐고.
결국 내가 욕심을 버리고 김용규와 이아영 마스터의 지속적인 사과로 인해 화해했는데 이세훈은 여전히 야망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때는 좀 허황되기는 했었지. 근데 지금은 아니야. 켄트성의 항복을 받고 이 지역을 차지하면 우리의 영토는 대한민국과 거의 비슷해. 게다가 몬스터만 몰아내면 이곳의 땅은 지구보다 더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 대부분이고.”
“그쯤 해 둬. 끝난 얘기잖아.”
“너 혼자 끝냈겠지.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지휘부 대부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걸. 김용규 본부장도 걱정돼서 더 확답을 받길 원했던 거고. 하지만 이제는 김용규 본부장도 어쩔 수 없을 거야. 대한민국이 품기엔 우린 너무 거대해졌으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독하게 마음먹고 상위 헌터들 투입해서 지배층 사람들만 납치해도 전쟁도 할 것 없이 차지할 수 있잖아.”
내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자르는데도 이세훈은 끝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그만하자.”
“뭘 자꾸 그만하자는 거야. 지윤미 마스터랑 다른 마스터들한테도 물어봐. 다들 네가…….”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그쯤 해두라고. 안 그래도 신경 쓸 거 많은데 머리 복잡하게 하지 말고.”
“쯧쯧. 알았다. 그래도 이번 일은 원래 계획했던 대로 진행한다. 포로들한테 월급을 어떻게 받고 싶은지 물어보니까 첫 월급 받으면 그 돈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오고 싶다고 하더라.”
“가족들을 데리고 오고 싶어 한다고?”
난 씁쓸해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도 잠시 놀란 얼굴을 하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포로들이 가족들마저 이곳에 데려오길 원할 줄은 진짜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얼마 안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늘어날 거야. 우리 스카이 캐슬의 이미지가 생각보다 아주 좋더라고.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소문도 많이 나 있고. 어차피 어중간한 곳에서 몬스터 웨이브의 위협 속에 사느니 귀환 주문서도 주고 바로 옆에 헌터들이 머무르고 있는 이곳이 나을 것 같다는 사람들이 제법 되더라고.”
“아…….”
“나도 일단 네 의향을 알았으니 더 이상 고집은 부리지 않을게. 근데 이번 일은 네 뜻대로 하게 해 줘. 이곳을 개척하고 개발하려면 인력이 절실하잖아.”
“그래. 알았다.”
난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변신 조종 반지랑 마녀 부대 지원도 필요해.”
“왜?”
“가족들한테 돈이 전달됐다는 것을 포로들한테 알려야 하는데 경계가 제법 삼엄하더라고.”
“그렇겠지. 그래. 알았어. 내가 허락했다고 하고 최은빈 대장한테 협조해 달라고 해.”
“고맙다. 그리고 인건비 나가는 건 너무 신경 쓰지 마. 어느 정도는 다시 회수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으니까.”
이세훈이 빙그레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내 결심은 바꾸지 못했지만 그래도 딴에는 원하는 바를 대충 다 얻어내서 만족스러워하는 듯했다.
* * *
“성주님, 계곡 쪽으로 가다 포위된 헌터 오천여 명이 투항해서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이번에도 린하이 님이 가서 설득해 온 건가요?”
“네. 린하이 님이 같이 가줘서 큰 피해 없이 투항을 받은 것도 있지만 다들 산속에 숨어 지내느라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이래저래 많이 지친 것 같더라고요.”
포로 오만 명.
삼 일, 사 일, 오 일이 지나자 산속으로 숨어든 헌터들이 빠르게 투항하기 시작했고 우리와 전쟁을 하기 위해 나섰던 십만 명의 헌터들 중에 절반이 항복하고 우리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우리의 천라지망으로 인해 도망가지도 못하고 계곡 쪽마저 우리가 완전히 점령하고 있어 배고픔과 갈증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이능을 각성한 헌터라 할지라도 배고픔과 갈증엔 장사가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불필요한 희생이 생기지 않고 있네요.”
{아닙니다. 저 또한 제 동료들이 헛된 죽임을 당하지 않길 원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건 좀 안 하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 일행들과 함께 가서 동료들을 회유해 온 린하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광장 구석을 쳐다봤다.
그곳엔 헬퍼 팀이 술과 요리를 준비해 포로들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작업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러시아산 대게 집게발 1인분에 3만 5천원에 팔고 있습니다. 다들 피곤하실 텐데 한잔들 하고 가세요.}
{대게 집게발이요?}
꿀꺽.
{네. 집게발만 모아서 팔고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대게는 집게발 말고 다른 부위는 먹기도 불편하고 딱히 먹을 것도 없거든요. 그래서 제가 특별히 집게발만 모아서 가져왔습니다. 손질도 다 해서 가져왔으니 이렇게 해서 쏙 빨아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꿀꺽.
{정말 맛있겠네요. 소주 한 병이랑 1인분만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오늘 첫 손님이니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대게, 삼겹살, 곱창…….
자고로 힘든 노동을 하면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이 땡기기 마련이었고 헬퍼들은 중국말을 하는 사람들까지 선별해 포로들에게 장사를 시작했다.
{뭐야? 하이에나 쪽 사람들이잖아. 포로로 잡혀 와 놓고선 술을 마시고 있네?}
{어떻게 된 거지? 돈이 어디 있어서…….}
방금 막 투항하고 잡혀 온 청방 길드 헌터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 모습을 쳐다봤다.
포로로 잡혀 온 이들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으며 술을 마시고 있으니 많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꿀꺽.
게다가 대부분 오 일 이상 숲에 갇혀 있느라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모두 군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때,
{자자! 어서들 오세요. 다들 오 일 동안 숲에 숨어 있느라 고생들 하셨을 테니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이곳은 저희 스카이 캐슬의 성곽을 짓는 공사 현장이고 공사에 참여하면 일당을 드립니다. 공사 시간은 기본적으로 아침 9시부터 7시까지이고 시간당 만 원씩 드립니다. 그리고 연장 근무를 하면 연장 수당도 드리고요. 공사에 참여하실 분들은 이쪽으로 서시면 되시고. 하기 싫으신 분은 이쪽으로 서시면 됩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겁니까?}
{네. 물론입니다. 저흰 린하이 님과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들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니 원하시는 분만 공사에 참여하시면 됩니다.}
이세훈이 빙그레 웃으며 포로들에게 공사참여 의향을 물어봤다.
{공사에 참여 안 해도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까?}
{공사에 참여 안 해도 기본적으로 하루 세끼가 공급되긴 합니다. 기본 식단에 소고기 불고기나 제육볶음과 같은 메뉴가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술이나 삼겹살, 회 같은 것은 저희도 자금 상황이 좋지 않아 돈을 받고 판매하고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아…….}
포로들의 질문에 이세훈은 미안함과 난처함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돈이 있어야 사 먹을 수 있다고 설명을 했고 포로들은 한숨을 내쉬며 식당가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