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86화 (186/255)

186화. 그리폰 (11)

‘포로들을 그리 박하게 대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난 최대한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포로들의 대우를 어디까지 해 줘야 할지 사실 나도 고민이 많긴 했었다.

눈 한번 딱 감으면 지금도 수만의 인력을 공짜로 부려 먹을 수 있을 수 있으니까.

허나 그렇게 되면 당장 큰 이익은 생길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큰 손해를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이곳을 차지하고 포로를 잡은 사실을 십 년, 만 년 숨길 수 있으면 상관없겠지만 밖으로 알려지면 우린 세계 열강국의 공적이 되어 다구리를 맞을 수도 있었다.

이미 지구에선 수많은 전쟁을 통해 제네바 협상과 같은 것을 체결하며 아무리 포로라고 해도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 주고 있기에 충분한 트집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난 땀 흘리고 일한 만큼 돈을 주는 걸 병적으로 지키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지난 세월 일한 만큼 돈을 못 받은 경험이 한이 되어 그런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포로로 잡아 억지로 일을 시키는 것보다 적당한 돈과 휴식을 주며 일을 시키는 게 능률이 높았다.

{잠시 이곳을 좀 둘러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제가 안내해 드리죠.”

난 빙그레 웃으며 린하이를 안내서 성곽 공사를 하는 헬퍼들과 포로들이 머무는 막사를 둘러봤다.

‘점장님 모시고 안내하는 기분이네.’

애써 감추고 있지만 린하이를 안내하고 있다 보니 마치 직장 시절 높은 사람이 나와 현장을 둘러보는 것처럼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리폰 라이더.

린하이가 그리폰과 교감을 하는 것을 본 것은 물론이고 그의 수하 수십여 명은 직접 그리폰의 몸에 타고 하늘을 날았다.

린하이가 자신했던 것처럼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지금 이곳 상황을 청방 길드 본부에 알릴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행보가 꽤 고단하게 변할 수 있었다.

허나,

‘지윤미 마스터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가 만약 우리 편이 된다면 우린 지금까지 보다 더 편하고 수월하게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는데 그를 탐탁지 않아 하고 표현했던 사실이 이제 와서 후회되었다.

“당구 좀 친다고 했지? 같이 가서 몸 좀 풀자.”

{아닙니다. 어찌 감히 제가…….}

“감히는 뭐가 감히야. 그냥 치고 싶으면 가서 하면 되는 거지.”

{아닙니다. 저를 챙겨주시는 건 좋지만 이러다가 헬퍼님께서 곤란해질까 봐 염려됩니다.}

“글쎄. 내 걱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눈치 보지 말고 따라와.”

헬스장, 당구장, 탁구장, 노래방, 피시방…….

아직 통신 시설이 구축되지 않아 인터넷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인부들이 휴식 시간을 즐길 수 있게 꽤 많은 위락시설이 준비되어 있었다.

밖에서 생활하는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열악한 상황에서도 나름 인부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신경을 쓴 티가 역력했고 헬퍼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눈치를 보고 있는 포로들을 한두 명씩 데리고 가서 여과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이봐. 우레이, 자네 족구 좀 한다며. 거기서 멍하니 있지 말고 자네도 들어와, 같이 하게.}

{아, 아닙니다. 전 그냥 여기서 구경하는 게 좋은데…….}

{이 사람아, 춥다고 그리 가만히 있으면 더 힘들어. 내일 또 일하려면 몸이 굳지 않게 적당히 풀어놔 줘야 해. 잔말 말고 따라 들어와.}

{…….}

또 다른 곳에선 족구를 하던 헬퍼 한 명이 구경하고 있던 포로 한 명을 선수로 참가시켰다.

중국어가 제법 능숙한 걸 보니 화교 출신이거나 중국 쪽으로 가서 일한 경험이 있는 헬퍼인 듯했다.

{정말 제가 끼어서 해도 되는 겁니까?}

{왜 자네 어디 아픈가?}

{그건 아니지만, 전 이곳에 포로로 잡혀 온 건데…….}

족구장에 들어가 놓고도 우레이는 몸을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포로로 잡혀 왔는데 헬퍼들과 함께 족구를 하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포로는 족구 좀 하면 안 된다는 법 있나?}

{그래도 보통…….}

{어허, 이 사람아. 도대체 몇 번을 설명해야 하는 거야. 우리 성주님은 땀 흘려 일한 사람에겐 반드시 보답해 주시는 분이야. 자네들이 비록 자의적으로 이곳에 와서 일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같이 땀을 흘리며 우릴 돕고 있잖아. 그러니 자네들도 우리가 즐기는 것들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야.}

{……네.}

헬퍼의 설명을 들은 우레이라는 포로의 얼굴에 서려 있던 긴장감이 조금 희미해졌고 조금씩 발을 움직이며 함께 족구를 하기 시작했다.

포로들이라고 혹여나 구박하고 괴롭히면 어쩌나 했는데 헬퍼들 모두 사회 피라미드 가장 낮은 곳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먼저 손을 뻗으며 포로들에게 살갑게 대해 주었다.

{오! 진짜 잘 차는데! 자넨 이제 우리 팀이야. 다른 곳으로 가면 재미없을 줄 알아.}

“거, 형님, 저놈 선수 출신 아니에요? 너무 잘하는데요?”

“선수 출신은 무슨. 그냥 소싯적에 공놀이 좀 했데.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내 공이나 받으시게.”

“아무리 봐도 선수 출신인데! 반칙 아닙니까? 그리고 상대 팀 허락도 없이 용병을 쓰는 게 어디 있습니까?”

“용병은 무슨 용병이야. 우리 팀에 소속된 인부인데!”

우레이라는 포로의 족구 실력에 헬퍼들이 실랑이를 벌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헬퍼들은 곧잘 족구를 하곤 해서 다들 실력이 만만치 않았는데 그런 그들이 보기에도 우레이의 실력이 꽤 대단한 모양이었다.

허나,

‘저 때가 더 재미있긴 했었는데…….’

입으론 실랑이하고 있긴 했지만 다들 눈은 웃고 있었다.

선수 출신, 용병 출신이 문제가 아니라 원래 헬퍼들끼리 저렇게 족구를 하다 보면 이래저래 딴죽을 걸고 시비를 걸기 일쑤였다.

싸우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게 일상인 것이다. 그리고 나름 저렇게 트집을 잡고 심리전을 하며 상대의 멘탈을 파괴하려는 방법으로 전략적으로 사용할 때도 있었고.

기껏해야 파전에 막걸리 정도 되는 내기 경기이겠지만 그래도 다들 승부욕이 대단해 꽤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난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쳐다봤다.

나 역시 저들과 같은 곳에서 꽤 오랜 시간 삶을 유지했었고 헬퍼 일을 했었기에 저 즐거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하는 일이 너무 바빠 같이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게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다들 행복해 보였다.

{다른 곳에 있는 포로들도 여기서처럼 지내는 건가요?}

“네. 환경이 조금 다르긴 하겠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흠…….}

린하이가 고민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포로들의 구속을 풀어주고 자신의 수하들이 관리하길 요구했는데 막상 이곳에 도착하니 많이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

{린하이 님?}

족구를 하고 있던 포로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에게 달려왔다. 서로 알고 있었던 사이인 모양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우레이 자네였군.}

{어떻게 된 겁니까? 설마 린하이 님도 잡히신 겁니까?}

{아닐세. 난 이곳의 지휘관과 협상을 하기 위해 내 발로 걸어왔네.}

{협상이요?}

{그래. 항쟁하고 있는 병사들을 투항시키는데 협조를 하면 자네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약속을 받았네. 그리고 앞으로 자네들은 더 이상 이곳에서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도 받았네.}

린하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협상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꼭 돌아가야 합니까?}

{……?}

{그리고 성곽 공사 역시 계속했으면 좋겠는데…….}

우레이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꼭 돌아가야 하는 거냐니. 그게 무슨 말인가?}

{포로 신분이라 감시를 받고 있긴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보니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자네 설마 조국을 배신하고 스카이 캐슬로 전향을 하고 싶다는 건가?}

{제 조국이 어디인데요?}

{……?!}

{중국에선 대한민국 사람이라 말하며 차별하고 대한민국에선 중국 사람이라 말하며 차별하고. 전 이 나이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가 저를 보호하고 챙겨준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서러움에 돈이라도 벌고 그나마 소속감이라도 얻기 위해서 이 빌어먹을 곳까지 흘러들어왔고요.}

{이봐. 우레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헬퍼들을 겪어보니 다들 부유하게 살더라고요. 일하는 게 좀 고되긴 하지만 스카이 캐슬에서 영지에 커다란 집도 장만해 줘서 가족들과 함께 산다고 하더라고요.}

{그거야, 같은 국민이니까…….}

{오크들도 그렇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한테도 약속했습니다. 지금이야 포로로 잡혀 와서 어쩔 수 없지만, 이번 전쟁이 끝나고 함께 공사하고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기면 저희가 일한 만큼 반드시 보답해 주겠다고.}

{끙…….}

린하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둘이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포로들의 몰려와 경청하고 있었고 모두 우레이와 같은 마음인 듯 그가 얘기할 때마다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포로들의 신변을 넘겨받아 보호하기 위해 왔는데 막상 포로들이 우리에게 협조하길 원하니 많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찌릿!

‘왜 날 째려보는데?’

린하이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고 난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건 나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분이시네요. 포로들을 이용해 성곽을 지을지는 알았지만 달콤한 유혹으로 이렇게 전향까지 시키려 할 줄은 몰랐네요.}

“전 유혹한 적 없어요.”

{포로에게 일한 만큼 돈을 주는데 이게 유혹이 아니라고요?}

“전향을 시키기 위해 그런 게 아니에요. 만약 청방 길드처럼 포로로 잡힌 드워프의 목에 쇠사슬을 감고 노예처럼 일을 시켰다가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저흰 중국은 물론이고 다른 국가들에게도 공적이 될 수 있어서 나중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난 린하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어떤 의심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으나 난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마침,

{린하이 님, 성주님의 말이 사실입니다. 오크는 물론이고 엘프와 드워프들 역시 이곳에선 차별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가진바 능력을 인정받아 웬만한 헌터들 보다 더 높은 직위까지 갖고 있습니다.}

{이종족이 헌터들보다 더 높은 직위에 있다고?}

우레이가 나를 대신해 린하이에게 변호해 주었다.

{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이곳은 청방과는 다릅니다. 그러니 린하이 님께서도 이곳을 천천히 더 둘러보시고 생각을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저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만 애써 숨기고 있는 다른 동료들도 눈치 보지 않고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아…….}

린하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우레이를 쳐다봤고 그의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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