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그리폰 (10)
{지금 총책임관의 자리를 내주시겠다고 했습니까?}
“네. 그랬어요. 배신자 낙인까지 찍히며 우릴 도와준다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할 듯싶은 데 아닌가요?”
난 미소를 머금은 채 린하이의 물음에 다시 한번 대답해 주었다.
비록 포로라고 하나 이십 만에 이르는 인원을 관리하는 자리면 군단장급 이상의 자리였다.
만약 청방 길드에 있었다면 죽을 때까지 오르지 못할 만큼 높은 자리를 제시하며 난 유혹의 손길을 내뻗쳤다.
{하하! 정말 귀가 솔깃한 제안이네요. 마음 같아선 당장 무릎을 꿇고 충성 맹세를 하고 싶을 정도예요.}
“…….”
린하이가 크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그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어째 처음 제안했을 때 보다 더 불쾌해하는 것 같았다.
만약 포로로 끌려 온 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갈 기세였다.
“전 당신을 화나게 하거나 웃게 하는 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군의 지휘관에게 칼을 휘두르고 남은 병사들에게마저 투항을 권고한 것도 모자라 포로로 잡힌 동료들을 혹사하는 데 앞장서서 배신자의 낙인뿐만이 아니라 천고의 역적까지 되라는데 그럼 전 어떡해야 할까요?}
“왜 우리가 포로들을 혹사할 거로 생각하죠?”
{그럼 아닙니까? 스카이 캐슬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도망치다가 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당신들은 꽤 오래전부터 이곳 산맥들을 살피고. 완벽에 가깝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
{만약 제가 협조를 해서 항쟁한 동료들이 투항하고 포로로 잡히면 그들은 아마 이곳에 최하 열 개 이상의 산성을 짓게 될 겁니다. 당분간은 정보를 차단할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청방 길드 본부에서 알게 될 테고 그들을 막아야 할 테니까. 제 말이 틀립니까?}
“…….”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그는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내 계획을 완벽에 가깝게 유추해 내었다.
“맞아요. 이곳 켄트성 북부를 완벽하게 차지하기 위해서 전 산성을 쌓을 생각이에요. 그리고 당신의 말처럼 그 작업은 꽤 고단한 일이 될 테고요. 허나 총지휘관이 되고 수하들을 중간 관리자로 임명하면 당신과 수하들은 지금껏 살아온 것보다 제법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약속드리죠.”
{거절하겠습니다. 전 동료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투항을 하고 협조를 한 것이지. 제 일신의 안락함을 위해 그렇게 행동을 한 게 아닙니다. 그건 제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린하이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들부들.
그의 몸이 잘게 떠는 게 느껴졌다.
짐작건대 네 제안이 치욕스럽고 모욕적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흠…… 그냥 차라리 박쥐였으면 서로 편했을 텐데…….’
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반드시 또 배신할 가능성이 컸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경험이 쌓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난 그를 거둬들이는 게 썩 내키지 않았는데 그와 얘기를 하다 보니 적으로 만나지 말고 조금 더 부드러운 관계로 만나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총책임자의 자리가 싫다면 제게 원하는 것이 뭐죠?”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그는 분명 투항 권고를 해 주는 보상을 원한다고 말했는데 총책임자의 자리를 거절하니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유추되지 않았다.
{투항한 사람들의 구속을 풀어주고 제 수하들이 보호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항쟁하는 헌터들과 성내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투항하면 본국으로 송환을 시켜주세요. 그게 제 요구 조건입니다.}
“……?!”
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그의 요구 조건이 너무 황당해 난 웃지도, 화를 내지 못하고 잠시 말문을 잃었다.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궁지에 몰려 협조를 하고 있다고 하나 린하이가 갖고 있는 지형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과 사람들에게 받는 신망은 기껏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만큼 꽤 위협적인 잠재 요소였다.
그런데 그런 자와 그를 따르고 있는 수하들에게 포로를 맡기라고?
나름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난 호구는 아니었다.
“저도 거절하겠습니다. 그냥 다 차라리 죽이고 말지. 당신의 요구 조건은 제가 들어 드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네요.”
{들어 주셔야 할 겁니다. 제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청방 길드의 본대가 이곳으로 출정을 할 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 역시 크나큰 인명 피해가 있긴 하겠지만 당신들은 결국 산맥에 숨어 있는 수만의 헌터들과 또 성내 사람들과 싸우면서 본대까지 상대해야 할 테니까. 제 요구 조건을 거절하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니겠죠?}
“혹시 우리 지휘부에서 당신을 고문했나요?”
{…….}
“방금까지는 괜찮아 보였는데 지금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이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요? 하늘을 날지 않는 이상 우리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니 항복을 하라고. 근데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알고 청방 길드 부대가 쳐들어온다는 거죠? 게다가 설사 그들이 온다 해도 하늘 절벽을 넘어올 수 있을 것 같나요?”
{그리폰.}
“……?”
{맞습니다. 당신들의 천라지망은 개미 새끼조차 허락이 없으면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촘촘하게 펼쳐져 있죠. 하지만 하늘을 날 수 있으면 모두 무의미해지고 제 수하 중엔 그리폰을 길들여 타고 다니는 이들이 몇 명 있죠.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린하이가 마치 함정 가득한 유혹에 복수라도 하는 것같이 빙그레 웃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삐이이이이이이익!
끼아아아아아아악!
끼아아아아아아악!
그는 두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고 천막 바깥 위 상공에서 그리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이이이이익!
끼아아아아아아악!
끼아아아아아아악!
그리폰들은 마치 린하이의 휘파람 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박자를 맞추며 울음소리를 내뱉었고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부랴부랴 바깥으로 나갔다.
“정말 그리폰은 길들였구나.”
밖으로 나온 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거리가 있어 신원까지 확인이 되진 않았지만 하나는 확실히 보였다.
그리폰의 등 위에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게.
{제 친구를 부를 테니 공격하지 말라고 해 주세요.}
끄덕끄덕.
그리폰의 등장으로 인해 지휘부와 헌터들이 부랴부랴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난 그들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시,
삐이이이이이이익!
끼아아아아아아악!
“…….”
“…….”
린하이가 두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고 그리폰 한 마리가 얌전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아까는 별안간 휘파람 소리를 내어 스쳐 들었는데 뭔가 미묘하게 소리가 달랐다.
짐작건대 휘파람 소리로 그리폰과 의사소통을 하는 듯했다.
비비적비비적.
“그리폰을 길들였으면서 왜 우리에게 투항한 거죠?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그리폰을 길들였다는 사실이 놀랍긴 했지만, 그가 아군의 지휘관마저 공격하며 우리에게 투항한 게 더 궁금했다.
{그리폰을 타고 도망가면 저와 제 수하들 몇 명은 살 수 있었겠죠. 헌데 하늘에서 보니까 당신들의 포위망이 너무 촘촘해 그대로 떠나버리면 모두 죽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서.}
“…….”
{부마스터 장원재와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뇌물과 학연, 지연, 혈연으로 지휘관의 자리에 오른 버러지들은 분명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른 채 돌격만을 외치다가 동료들을 다 사지로 몰아놓을 것 같았고 역시나 제 예상은 틀리지 않더라고요.}
린하이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포로로 잡힌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동료를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남아 있었던 것도 대단했지만 정말 대단한 건 그의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이었다.
{일정 시간 이상 제가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저 위에 있는 제 수하들은 바로 화룡의 둥지로 날아가 이 상황을 알리게 될 겁니다.}
난 앓는 소리를 내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정신이 나가 헛소리를 하는지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비장의 한 수를 갖고 있었다.
{아직 게이트 안 세상에서 벌어진 일을 지구에서 연결 짓지 말자는 조약이 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이미 수백 명 이상의 사람을 해쳤고 또 수만 명의 사람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 사실이 중국 정부에 알려지면 진짜 전쟁입니다. 그걸 원하십니까?}
“…….”
{켄트성과 신전. 그리고 이곳 북부 숲을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당신들은 정말 막대한 이익을 갖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 포로들의 송환만 약속해 주세요. 그럼 저도 최대한 협조를 하겠습니다. 만약 항복하지 않고 반항을 하는 자가 있으면 직접 제 손으로 처리를 하겠습니다.}
“조건을 수락하죠. 헌데 만약 우리가 이곳을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 청방 길드에서 이곳 사실을 알게 된다면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당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혹독한 시간을 맞이하게 될 거예요.”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성주님께서 약속만 지키신다면 제 수하들은 언제까지 함구할 겁니다.}
“좋아요. 믿어보죠.”
{감사합니다.}
난 린하이와 손을 붙잡고 악수를 하였다.
포로들을 풀어줘야 한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나 역시 이곳을 차지하는 데 있어 불필요한 희생을 원하지 않았고 그 역시 동료들의 생명을 가장 우선시한 덕분에 우리는 동맹 아닌 동맹을 맺게 되었다.
“지윤미 마스터님, 수갑을 풀어주세요. 그리고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 부탁드릴게요.”
“네.”
“혹시 모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포로들을 여러 곳에 분산시켜 놓았어요. 지휘부에 전달하면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그래도 제가 직접 움직이면 더 빠르게 될 테니 한 군데만 같이 가 보도록 하죠.”
“네.”
난 린하이의 구속을 풀어주고 그와 함께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 *
린하이와 함께 켄트성 남쪽 산성 공사 현장에 도착하자 넓찍한 광장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고 있는 포로들이 보였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오늘 하루 쉬라고 했습니다. 고구마는 이세훈이 팀장이…….”
나와 눈을 마주친 발키리 길드 소속 헬퍼가 마치 죄를 짓고 변명을 하는 것같이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잘하셨어요. 날씨가 추워서 땅도 얼고 다칠 수 있으니 공사 일정은 알아서 조절해 주세요. 성곽이 빨리 완성되면 좋겠지만 언제나 안전이 항상 우선이 돼야 해요. 그리고 식사와 간식 역시 풍부하게 공급해 주시고요.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포로로 잡아들여 일을 시키고 있지만, 광산에 있는 자들처럼 죄를 짓고 온 사람들이 아니니 근무 시간을 정확히 체크해 주세요. 그래야 나중에 정산해 줄 수 있으니까.”
“혹시 몸을 구속한 포로들이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대부분 공사에 협조적이라 작업 시간이 아니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잘하셨네요.”
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헬퍼의 등을 토닥이며 격려하는 말을 해 주었다.
하필 내가 방문한 날에 포로들에게 휴식을 줘 괜히 눈치를 본 모양이었다.
“오늘 날씨가 추워 휴식을 줬다고 하네요. 구속한 포로도 없고요. 어떻게 지금 바로 이쪽으로 모이라고 할까요?”
{포로들에게 간식을 주고 휴식을 준다고요? 그리고 정산이라 하면 돈까지 주겠다는 건가요?}
“네. 일을 시켰으니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수를 주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
공사 현장에 도착한 린하이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으며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