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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영주님-184화 (184/255)

184화. 그리폰 (9)

{린하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는 알고…….}

컥!

{죄송합니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습니다. 전 제 동생들을 이런 자리에서 헛되이 죽게 할 수 없습니다.}

장원재를 공격해 처단한 것도 모자라 린하이라는 자가 또 다른 지휘관을 찾아다니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대부분 장원재의 죽음에도 동요하지 않고 항쟁을 하려는 자들이었다.

‘고맙긴 한데…….’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아무리 적이라 하나 수하의 검에 죽어가는 지휘관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노선 변경이 빠르다 못해 아예 빛의 수준이네요.”

“그러게요. 저렇게 하면 우리가 자리라도 하나 줄지 아는 건가?”

지윤미 마스터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라는 자를 쳐다봤다.

{린하이 님, 괜찮겠습니까? 당장 목숨을 연명할지는 모르나 길드 본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릴 가만히 놔두질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설사 항쟁한다 해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게 내가 지도부터 만들자고 했을 때 말을 들었으면 이렇게 허망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을.}

린하이라고 불리는 자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그와 눈을 마주친 헌터들이 칼끝을 우리가 아닌 아군을 향해 내 뻗었다.

‘천인장쯤 되려나?’

내가 보기엔 박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처럼 보였는데 제법 헌터들의 신망을 받는 모양이다.

이미 우리에게 돌아선 이들 말고도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듯 무기를 곧추세웠던 헌터들마저 대부분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을 뿐이지 쉼 없이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주위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 듯했다.

{전 병사들은 들어라. 이곳은 저들의 허락이 없이는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천라지망이 깔려 있다. 그러니 귀한 목숨 헛되이 버리지 말고 무기를 내려놔라.}

{린하이님,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항복을 하면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저들의 허락 없인 아무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다. 항복한다 해도 본부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십만의 대군입니다. 그중에 한 명만 돌아가도…….}

{나를 믿어라. 장담컨대 하늘을 날아가지 않는 이상 저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순 없을 테니까.}

불안해하는 헌터들을 쳐다보며 린하이가 확신하는 표정을 지으며 동료들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천라지망(天羅地網)이라…….’

한자 뜻 그대로 풀면 하늘과 땅의 그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경계망이라는 뜻이었다.

우리의 기습을 받고 산맥에 들어와 이리저리 도망가기 바빴을 텐데 린하이는 우리의 경계망과 자신들의 상황을 제법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짐작건대 눈에 보이는 것 몇 개만을 보고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유추해 낸 듯했다.

박쥐 짓만 하지 않았다면 탐이 날 만큼 시국을 읽는 눈이 빠른 자였다.

그리고 결국,

털썩.

{항복하겠습니다.}

털썩.

{항복하겠습니다.}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던 청방의 헌터들이 하나둘씩 무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사방이 포위된 것도 모자라 그리폰의 공격을 받고 아군까지 등을 돌리니 그나마 갖고 있던 싸울 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모양이었다.

“포박하세요.”

“네.”

“네.”

내 지시를 받은 발키리 길드 헌터들과 오크들이 내려가 적들의 무기를 회수하고 밧줄로 신체를 구속했다.

‘무기만 해도 엄청나겠네.’

검과 도끼, 활, 방패, 갑옷…….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적들이 바닥에 내려놓은 무구들을 쳐다봤다.

중국 No.1 길드답게 청방 길드의 헌터들은 우리 못지않게 훌륭한 무구들을 착용하고 있었고 그것들만 처리해도 수백억, 아니 수천억은 가뿐히 넘을 듯했다.

‘이런! 이래서 전쟁 미치광이들이 생긴 건가?’

미소를 머금었던 것도 잠시 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표정 관리를 했다.

다행히 아무도 내 표정을 본 사람은 없는 듯했다.

눈앞에서 수백여 명의 사람이 죽었는데 포로로 잡은 인원과 무구들을 보며 미소를 지은 자신이 섬뜩했다.

“그자는 제 막사로 바로 데리고 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포로들을 포박한 발키리 길드 헌터들이 그들을 지정한 장소로 이동하려 했고 난 린하이라는 자와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아직 이 산맥엔 7만 명 이상에 적들이 숨어 있었고 린하이의 도움을 받으면 불필요한 희생 없이 그들을 항복시킬 수 있을 듯했다.

‘성정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덕분에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으니까.’

적당한 자리를 약속하고 그를 완전히 우리 쪽으로 전향을 시키면 아주 큰 힘이 될 듯했다.

곁에 두기엔 찝찝한 자이나 적당한 직책을 주고 당분간 좀 이용을 할 가치가 있는 자였다.

* * *

“성주님, 급히 보고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네. 들어오세요.”

린하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윤미 마스터가 먼저 내 막사를 찾아왔다.

“우리가 제법 거물을 잡아들인 것 같아요.”

“거물이요? 혹시 린하이를 말하는 건가요?”

“네. 맞아요. 기존에 잡아들였던 상인 길드 포로들에게 물어보니 일반 헌터들은 물론이고 성내에 있는 헬퍼들이 대부분 그를 따르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쉽게 켄트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제가 보기엔 그리 높은 직책을 갖고 있지 않은 거로 보였는데?”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지윤미 마스터를 쳐다봤다.

그가 헌터들에게 제법 신망을 받는 자인 건 알겠는데 지윤미 마스터는 거기에 더해 린하이만 설득하면 바로 켄트성을 무혈 입성할 수 있을 것처럼 기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출신 성분으로 인해 천인장 정도 되는 직책을 맡고 있지만, 실제론 만인장이나 그 이상의 자리까지 올라가 있어야 할 만큼 헌터 경력도 길고 등급도 높다고 하더라고요.”

“등급도 높고 경력도 긴데 천인장에 머물러 있던 거라고요? 도대체 출신 성분이 어쨌기에?”

“조선족이라고 하더라고요. 상인 길드 포로들 말로는 고위직에 오르려면 청방 길드 수뇌부에 아부도 좀 하고 뇌물을 주는 게 당연시되고 있는데 그런 성격이 되지 않았나 보더라고요.”

“그래요? 정확한 정보가 맞나요? 어찌 그런 자가 박쥐 짓을…….”

“이번에 포로로 잡은 헌터들을 심문해 두세 번 확인했어요. 일신의 안위를 위해 저희에게 돌아선 게 아니라 동료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욕먹을 각오를 나선 모양이더라고요. 게다가 상인 길드 포로들의 말로는 린하이 혼자서 길드 차원에서 보급로를 더 확장, 개발하고 산맥을 탐사해서 지도를 만들자고 계속 건의할 만큼 지형지물에 대한 이해도도 꽤 높은 자인 것 같아요.”

지윤미 마스터가 마치 신이 난 어린아이마냥 린하이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설명했다,

목숨을 걸고 몬스터들과 싸워야 하는 이곳에서 청방 길드는 능력이 우선이 아닌 혈연과 지연, 학연과 같은 것이 우선되어 사람을 쓴 모양이었다.

“적이 알아서 삽질해 줘서 다행이지. 린하이가 중책을 맡고 있었으면 골치 아플 뻔했네요.”

“네. 맞아요. 만약 린하이가 중책을 맡고 있었으면 꽤 어려운 전쟁이 됐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그는 우리 손에 잡혀 있고 설득만 할 수 있다면 그의 지략과 그를 따르는 헌터들과 헬퍼들 모두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굳이 설득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까 태도를 보아하니 굳이 설득하지 않아도 알아서 협조할 것 같던데요?”

“아까 헌터 경력이 길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듣자 하니 성주님처럼 하위 헌터들, 헬퍼들과 어울리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아까는 당장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니 자발적으로 협조를 했을지 모르나 계속 그런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아요.”

“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죠. 린하이를 불러 주세요.”

“네!”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호출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평판이 좋아 지윤미 마스터는 그를 진정으로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으면 하는 모양인데 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녀의 말처럼 정말 동료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박쥐가 된 것인지 아니면 일신의 영광을 위해 박쥐가 된 것인지.

출신 성분으로 인해 제대로 된 진급을 하지 못했다면 수뇌부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까.

* * *

“보이차, 드시겠어요?”

{주시면 마시겠습니다.}

린하이가 막사에 들어오고 나서 난 최대한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얘기하기 위해 손수 따듯한 차를 준비했다.

“어때요? 마실만 한가요? 보이차 원산지가 중국이라고 해서 준비해 봤는데.”

{네, 맛있습니다.}

“다행이네요.”

홀짝.

나도 보이차 한 모금을 들이키며 가만히 린하이를 쳐다봤다.

쌍꺼풀이 없는 큰 눈.

오뚝한 콧날.

다부진 입술과 턱.

지윤미 마스터의 말처럼 가까이서 본 린하이는 박쥐가 아니라 정말 곧은 장수와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난 일단 말을 삼가고 차를 음미하며 린하이를 살펴봤다.

그리고 1분, 2분. 10분이 지나도 그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적의 총지휘관인 내가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하면 무슨 일인지 궁금할 법도 한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 데 집중했다.

“한잔 더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또르르.

어느새 그의 찻잔에 차가 비워져 난 다시 새로 채워 주었다.

“전 당신을 산맥에 흩어져 있는 헌터들과 성을 지키고 있는 이들에게 보내 투항 권고를 시킬 생각이에요. 그래 줄 수 있나요?”

“…….”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근데 만약 당신이 거절하면 청방 길드 대부분의 헌터들과 헬퍼들은 죽게 될 거예요.”

{협박입니까?}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흠…….}

린하이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난 그가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차를 마시며 기다려 주었다.

{동료들을 살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전 배신자로 평생 낙인이 찍히게 될 겁니다. 제가 손해를 본 만큼 성주님께서 보답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원하는 것을 말씀하세요. 제 힘이 닿는 선에 의해서 최대한 맞춰 드리죠. 당신이 우릴 도우면 청방 길드 소속이었던 사람들 모두 우리의 포로가 될 거에요. 원한다면 그들의 관리할 총책임자로 임명해 줄 수도 있어요.”

빈 잔에 다시 한번 차를 채운 난 최대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린하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기대됐다.

그가 과연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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