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그리폰 (7)
하늘 다리를 폭파하고 반나절이 지나자 지윤미 마스터가 창백해진 얼굴로 내게 부랴부랴 달려왔다.
“성주님, 장원재의 친위대와 산하 길드 헌터들이 모두 성 밖으로 나왔어요.”
“얼마나 되죠?”
“만 명씩 열두 부대, 십이만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중에 이만 병은 헬퍼들이고요.”
“그 많은 인원이 이렇게 빨리 한 번에 다 나왔다고요?”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지윤미 마스터를 쳐다봤다.
청방 길드에서 출정할 걸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단시간 만에 대군을 이끌고 나올지는 몰랐다.
“적의 사정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안 좋은 것 같더라고요. 식량도 식량이지만 땔감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요? 우리가 계속 산적 질을 하는데도 별다른 대응이 없어서 비축량이 많은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네. 비축량이 많아서 대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우리와 달리 청방 길드에서는 보급품 관리를 전적으로 상인 길드에게 위임한 모양이더라고요. 그동안 우리에게 물자를 탈취당한 상인 길드 군상들이 지속해서 계속 오크들을 토벌해 달라고 했지만, 지휘부에서 무시했었던 것 같아요.”
“지휘부에서 무시했다고요?”
“그게 중간 지휘관들 대부분이 해가원 길드에게 뇌물을 받고 의도적으로 상부에 보고가 올라가지 않게 중간에서 차단한 것 같아요. 현재 켄트성 내부에 있는 물자 대부분이 해가원에서 공수를 해 온 것들이고 우리로 인해 다른 상단의 보급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니 기존보다 세 배에서 네 배 이상 물가가 올랐고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나 보더라고요.”
“쯧쯧.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스스로 죽을 길로 찾아 왔네요.”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난 6개월 동안 오크로 변신해 산맥에 머물었던 우린 수백여 차례에 걸쳐 보급품을 탈취했다.
비밀 통로를 통해 물자를 나르는 건 여의치 않은 반면 적의 보급로를 터는 건 아주 편하고 손쉬웠으니까.
게다가 미약하게나마 적의 전력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도 있었고.
근데 내 예상과 달리 가랑비에 옷이 젖는 거처럼 일부 지휘관들과 상인들의 부정부패가 합쳐져 우리의 행동이 묻히는 건 물론이고 타격마저 크게 준 모양이었다.
“네. 맞아요. 무려 이십만의 대군이 있으니 우리가 뒤에서 이렇게 암계를 펼치고 있는지는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보급로에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고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저렇게 대군을 이끌고 웬만한 몬스터 부대는 바로 밀어낼 수 있을 거라 믿었을 테니까요.”
“쯧쯧. 백만 명의 대군보다 아군의 무능한 지휘관 한 명이 더 무섭다고 하더니 저들을 두고 한 말 같네요. 전군에 전령을 보내세요. 맡은 바 자리에서 내일 새벽 5시 총공격을 하라고요.”
“상황에 상관없이 조건 없는 공격인 거죠?”
“네. 혹시 무슨 변수가 생겨도 무조건 같은 시간에 총공격해야 해요. 그래야 적에게 더 큰 혼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난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내 무릎에 걸터앉아 있는 네로의 등을 쓰다듬었다.
카프리에게 석궁을 받은 이십만의 오크들과 엘프들.
그레이, 발키리, 울프, 레인보우. 플라워, 화랑 연합 헌터들까지 모두 다 지금 캔트 성 북쪽 숲에 올라와 우리가 만든 진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반 평야 전투에서 맞닥뜨려도 십만의 적을 압도할 수 있는 대병력이었다.
“네로, 내일 잘할 수 있지?”
“냐아앙.”
“아고 귀여워. 너만 믿는다. 내일 잘 도와주면 엉아가 이번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같이 오래 놀아줄게.”
“냐아아앙.”
내 체취와 체온이 좋은지 네로가 내 품에 안기면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 * *
{린하이. 원래 이 시간에 이렇게 안개가 자욱한가?}
{네.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새벽 시간엔 안개가 자주 끼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해가 뜨면 곧 걷힐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불침번들에게 알려서 병사들의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신경을 쓰라고 해.}
{네. 부마스터!}
대군을 이끌고 켄트성을 나와 하늘 다리로 가기 위해 하룻밤 야영을 하고 일어난 장원재는 산에 걸려 있는 짙은 안개를 보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산속에서는 원래 상승 기류에 의해 공기가 차가워지고 대기 중의 수증기가 물이나 얼음으로 변하며 안개가 서리는 경우가 많았으나 가벼이 넘기지 못했다.
부관의 말처럼 해가 뜨고 안개가 걷히면 좋겠지만 혹여나 유지가 된다면 환상 방황 현상을 일으켜 시계가 차단되어 정확한 지형 판단을 하기 어렵고 방향을 잃고 길을 이탈할 수도 있었다.
1월.
게다가 산안개는 미세한 물방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하는 지금 병사들이 체온을 빼앗기는 결과마저 초래할 수 있어 지휘관으로서 항상 주위해야 했다.
{오크들은 아직도 하늘 다리 앞에서 진을 치고 있나?}
{네. 그렇습니다. 진을 치다 못해 지금은 숲에 있는 바위와 나무를 가져와 성벽까지 쌓고 있다고 합니다.}
{쯧쯧. 한심한 일이야. 아무리 방심을 했다고 하나 오크들에게 가장 중요한 길목을 빼앗기다니.}
장원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 다리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빨리 가서 다 죽여 버리고 싶군.}
{네. 곧 그렇게 될 겁니다. 이번엔 단 한 마리도 살아나가는 놈이 없게 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그리고 상인 길드 놈들한테도 확실하게 경고해. 만약 이번 일이 외부에 새어 나가는 일이 생기면 곱게 죽지는 못할 거라고.}
{네. 부마스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잠시 장원재는 눈을 스산하게 빛내며 동맹 길드 헌터들과 상인 길드 헌터들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백전백승.
각성하고 헌터가 된 이후로 그는 켈베로스와 불골렘, 드래곤 플라이, 샐러맨더, 이프리트. 피닉스같은 상위 몬스터와의 전쟁에서조차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백전노장이었다.
그리고 그 전공을 인정받아 청방 길드의 부마스터라는 자리까지 올라왔고 마스터 김연창을 도와 실질적으로 청방 길드를 운영하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근데 같은 몬스터에게는 물론이고 들짐승조차 먹잇감 취급을 받는 오크들에게 중요한 보급로 탈취당한 이 현실이 너무 수치스러웠고 오크들은 물론이고 일행들 역시 여차하면 다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살심이 솟아올랐다.
그런데 그때,
꾸륵꾸륵.
꾸륵꾸륵.
스르륵.
스르륵.
산속에서 오크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수백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윙윙윙윙윙윙윙윙.
윙윙윙윙윙윙윙윙.
{모두 어서 일어나. 오크들이다.}
{빨리 정신들 차려!}
꾸륵꾸륵.
꾸륵꾸륵.
스르륵.
스르륵.
{컥.}
{컥.}
커다란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근무를 서고 있던 근무자들이 헌터들을 깨웠지만 모두 멍한 채로 나왔다가 순식간에 죽임을 당했다.
{머저리 같은 것들. 한낱 저런 미물 따위들조차 처리하지 못하다니. 친위대는 모두 따라와.}
{네!}
{네!}
헌터들이 상하는 것을 본 장원재는 잠에서 깬 수백여 명의 친위대를 이끌고 손수 몸을 움직였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오크들은 지휘관급 이상의 헌터들을 향해 화망을 구성했고 이대로 있으면 혼란이 더 커질 것이 염려된 행동이었다.
허나,
{뭐야? 그새 어디 간 거야?}
{위쪽으로 올라간 것 같습니다.}
{고작 오크들 따위가 이렇게 빨리 움직인다고?}
{늑대들을 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늑대를 타고 다녀도 그렇지.}
기껏 우회해서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찾아왔지만, 오크들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앞쪽에서도 불이 나고 있잖아? 오크들은 모두 하늘 다리 쪽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맞습니다. 분명 일만 마리 모두 자리를 잡고 공사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럼 저 많은 오크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데. 어서 빨리 알아봐!}
{네!}
그는 야차 같은 표정을 지으며 친위대를 야단쳤다.
부관에게 보고 받기론 산적 질을 하던 오크들은 모두 하늘 다리에 있다고 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눈에 보이는 일행들 전부가 오크들의 화살에 공격을 받고 있었다.
‘빌어먹을 안개.’
한시라도 빨리 이 혼란을 잠재워야 하는데 자욱한 안개와 기껏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쫓아가도 오크들이 보이지 않아 적의 규모조차 파악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부마스터님 퇴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 뒤쪽에 있는 부대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쪽도 모두 공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앞, 뒤 모두 공격을 받는데 어디로 퇴각을 하겠다는 거야!}
{일단 길이 없어도 밑으로 내려가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크들을 보고 쫓아갔던 헌터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고작 오크들 때문에 길도 없는 곳으로 퇴각을 하라고. 닥치고 모두 흩어져서 오크들을 추적하라고 해!}
{네!}
장원재는 헌터들의 죽음을 외면하며 추격을 명령했다. 아무리 오크들이 늑대를 타고 있다 하나 일단 잡히기만 하면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화룡의 둥지에서 상위 몬스터들과 싸우면 성장을 하고 드워프 노예들의 무구를 입고 있는 청방 길드의 헌터들이라면 충분히 오크들을 쫓아가 척살할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끼아아아아아악!
끼아아아아아악!
{그리폰이다. 살려 줘!}
{젠장! 다친 사람과 떨어져!}
설상가상 이번엔 그리폰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헌터들을 발톱으로 잡아 하늘로 끌고 갔다.
십 만병의 헌터들을 이끌고 온 장원재의 본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 그 자체로 변하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시야는 차단되고 사방에서 화살은 날아오고 기껏 따라가도 오크는 보이지 않고 그 와중에 그리폰 떼거리마저 몰려와 공격하니 헌터들이 한두 명씩 지휘를 따르지 않고 무작정 울창한 숲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망가면 죽는다!}
{컥!}
{친위대는 뭐 하고 있는가. 어서 병사들을 지휘하지 않고.}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장원재는 명령을 무시하고 숲속으로 뛰어가는 헌터에게 검을 휘두르며 친위대를 채근했다.
‘빌어먹을 오크놈들!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야!’
* * *
{죽어! 죽어 이 새끼들아!}
챙! 챙! 챙챙!
챙! 챙! 챙챙!
“언니, 쟤네 지네들끼리 싸우는데?”
“그러게. 성주님이 같은 편이라서 정말 다행인 것 같아. 만약 적한테 성주님 같은 분이 있었다면 저 자리에 우리가 서 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맞아. 오크들과의 전쟁 때도 느낀 거지만 진짜 성주님의 전략, 전술은 대단한 것 같아.”
무작정 숲속으로 들어왔다가 안개 때문에 아군인지 모른 채 서로 칼을 휘두르고 화살을 날리는 청방 길드 헌터들을 보며 지윤미 마스터와 박민정 부마스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해용의 지시대로 자리를 잡고 있다가 산 정상을 향해 뒤로 후퇴하면 화살 몇 번씩 날린 게 전부인데 십만 명의 대군이었던 적이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 단위로 잘게 쪼개져 산맥 전체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산맥에는 지난 6개월 동안 지리를 익히고 함정을 설치한 발키리 길드 헌터들이 오크들을 이끌고 진을 치고 있었는데 청방 길드 헌터들이 그물이 있는지도 모른 채 헤엄쳐 오는 물고기같이 알아서 함정에 빠져 주었다.
{다영아.}
{응. 알았어}
아군들끼리 싸우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윤다영이 앞으로 걸어가 중국말로 커다랗게 소리쳤다.
{당신들은 모두 포위됐어요. 그러니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세요. 그럼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까.}
{……중국인이십니까?}
{한국 사람이에요. 그리고 지금 당신들이 서로 칼을 맞대고 있는 이들은 같은 편이고요.}
{같은 편이라고요?}
윤다영의 말을 듣고 나서야 청방 길드헌터들은 손을 멈췄고,
“냐아아아앙.”
“냐아아아앙.”
조금씩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털썩.
털썩.
{어떻게 이런 일이…….}
{아군과 싸우고 있었다니. 게다가 이 많은 오크는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안개가 걷히고 주위를 확인한 수천여 명의 청방 길드 헌터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무기를 떨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군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도 기가 막힌 데 어느새 그들의 주위를 마치 자신들이 이곳에 올지 알았던 것처럼 진을 형성해 만여 마리가 넘는 오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오키도키 님, 포박해 주세요.”
{네.}
청방 길드 헌터들이 항복을 하자 오크들이 내려가 그들을 포박했다.
“하나, 둘. 셋…….”
그 수가 무려 삼천 명이었다.
“이거 이런 식으로 하다간 우리 쪽 인간보다 포로들의 숫자가 더 많아지겠는데?”
정작 화살 공격을 해서 적에게 상해를 입힌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은데 이런 식으로 함정과 진에 빠져 포위가 돼서 포로로 잡힌 인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