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그리폰 (6)
“성주님, 죄송한데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길을 만들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흠…….”
지윤미 마스터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도심 속에 있는 4차선 도로도 길이고 동네 곳곳에 있는 골목길도 길이다.
내가 막연하게 길을 만들어 달라고 하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만요. 이걸 보시면 더 이해하기 편하실 거예요.”
난 품 안에 넣어뒀던 지도를 꺼내 산봉우리가 있는 곳에 조그마한 원을 그려 넣었다.
“산맥을 크게 밑에서부터 크게 십 등분 하면 이 원이 정상이자 10부 능선쯤 될 거에요.”
“흠…….”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조금 더 큰 원을 그려 넣으면 9부 능선이고 거기에 하나 더 그려 넣으면 8부 능선. 우리가 지금 있는 위치죠.”
“……그건 저도 대충 알고 있어요. 그럼 성주님 말씀은 이 8부 능선을 따라 길을 개척하라는 건가요?”
“네. 정상에 가까워서 높이가 높은 계곡도 많고 길이 끊긴 곳도 많을 거예요. 그리고 대부분 경사도 심할 테고요. 제가 원하는 건 우리가 8부 능선을 따라 산맥과 산맥을 이동할 때 돌아가거나 막히는 부분이 없게 해 달라는 거예요.”
“흠…….”
내 설명을 들은 지윤미 마스터의 표정이 더 복잡하게 변했다.
“평지도 아닌 산에서 길을 만드는 게 힘들긴 하겠지만 고생 좀 해 주세요.”
“힘든 건 상관이 없는데 꼭 이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 생각엔 최은빈 부대장이 말한 장소에 가서 다리를 폭파하고 그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성벽을 쌓으면 유리한 전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지윤미 마스터가 지도를 보며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성벽을 낀 전투를 하며 오크들에게 큰 재미를 본 그녀는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청방 길드를 공략하길 원하는 듯했다.
다리를 끊어버리면 보급이 끊긴 적은 필사적으로 그곳을 되찾으려 할 테니까.
“오크들의 숫자만 해도 이십만 명이 넘으니 마스터님의 전략대로 싸워도 우리는 청방한테 승리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시려는 건지…….”
“우리도 적지 않은 피해를 받을 게 분명하니까요.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성벽이 제대로 지어지기 전에 적들을 맞이해야 할 테고 사지에 몰린 적이 미친 척하고 한 번에 다 쳐들어오면 같이 공멸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적들이 하늘 다리에 오기 전에 최대한 인원을 줄여 놓으려는 거예요.”
지도에 세 개의 원을 그린 난 다시 일곱 개의 원을 그려 열 개를 채워 넣었다.
“적의 보급로는 대부분 장애물이 없고 길이 완만한 2~4부 능선에 집중되어 있어요. 일견 보기에는 적들의 길이 안전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만약 우리가 7~8 능선에 기다랗게 길을 뚫고 다니며 위에서 공격하면 어떻게 될까요?”
“흠…….”
“제가 시키는 대로 하면 적들의 보급로 곳곳은 마치 협곡에 갇혀 함정에 빠진 형세가 될 거에요.”
난 이곳에서 오며 보았던 적의 보급로 중에 경사가 높아 우리가 위쪽 능선을 잡고 공격을 하면 적이 바로 위로 올라 올수 없는 지역 몇 군데를 지도에 추가로 체크했다.
“성주님의 계획대로 되면 아군의 피해 없이 공격할 순 있겠지만 적들에게 크게 타격을 줄 만큼 넓고 긴 길은 없지 않나요? 만약에 적들이 우회해서 위쪽으로 올라오면 되레 갇히는 형국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지윤미 마스터가 내가 체크해 놓은 지점을 시작으로 선을 그리며 내 의견에 반박했다.
아주 정확한 지적이었다.
지난날 발키리 길드가 오크들의 매복에 빠진 지형은 길이 넓고 또 길었다.
게다가 절벽 역시 상당히 높고 가팔라서 속수무책으로 공격에 당해야 했는데 이곳은 그렇게까지 위험한 협곡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설사 있다 해도 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정찰대를 보낼 게 분명했다.
“네. 맞아요. 지윤미 마스터의 말처럼 이능을 각성한 헌터들이라면 매복에 잠시 당황할 순 있겠지만 금세 정열을 정비해 우릴 추격하려고 할 거예요. 헌데 만약 동시에 스무 곳 이상의 장소에서 기습한다면?”
“스무 곳 이상에서요?”
“적들의 규모는 이십만이에요. 그중에 절반만 해도 헌터만 무려 십만이고요. 성을 지킬 병력을 놔둔다고 해도 보급로가 끊기면 적들은 최하 십만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을 지나가려 할 거예요. 그럼 그 행렬이 엄청나게 길어지지 않을까요?”
“흠…….”
군 시절. 우리 대대는 백여 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었는데, 8시간짜리 코스 행군을 해도 선발대로 출발한 우리 1중대가 도착지에 도착하고 삼십여 분 후에 4중대가 도착했다.
같이 출발해도 장거리 행군엔 선두와 끝에 그만큼 간격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십만 이상의 대군이 그것도 사흘이나 되는 거리를 이동한다면 그 간격은 더 멀게 차이날 게 분명했다.
난 적들을 한곳에 몰아 놓고 공격하려 하는 게 아니라 아주 길고 먼 길을 이용해 공격하며 적의 대부대를 잘게 쪼개서 싸우려는 것이었다.
“8부 능선을 따라 길을 만들고 지난 오크들과의 전쟁 때처럼 적의 예상 침입로에 진지를 구축해 놓으면 설사 적들이 우회해서 돌아와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예요. 조금 이해하기 힘드셔도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절 믿고 따라 주세요. 길을 만들다 보면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지윤미 마스터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름 지도를 보고 체크를 하며 설명을 하고 있지만, 말로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전투 경험이 많고 똑똑한 사람이니 나머지는 직접 몸을 움직여 길을 만들다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듯했다.
“전 언제나 성주님을 믿어요. 지금도 의문을 제기하는 게 아니라 성주님의 계획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자세히 알아 두려는 거예요.”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요.”
“그럼 이왕 묻는 김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성주님이 옛 역사에 관심이 많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전투를 하는 데 있어 뛰어난 안목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 이 방법은 어떻게 떠올린 건지 궁금해요. 설명을 듣자 하니 단시간 만에 만들어 낸 것 같지 않아서요.”
“제가 만들어 낸 거 아니에요.”
“네? 성주님이 만드신 게 아니라고요? 그럼 누가?”
내 대답에 지윤미 마스터가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너무 막힘없이 설명하니 그녀는 당연히 내가 만든 전략인 줄 알고 착각을 한 듯했다.
“독립군과 의병들이요.”
“네?”
“일본과 몽골…… 중국의 오랑캐들이 우리 땅을 쳐들어왔을 때 우리나라 군인들이 이런 식으로 싸웠어요. 적들보다 무기도 초라하고 인원도 적지만 지금처럼 산악 지형을 이용해 게릴라 전투를 하며 적들을 괴롭히고 때론 커다란 승리를 얻기도 했지요.”
“아…….”
“제 계획대로만 된다면 우린 큰 손실 없이 큰 승리를 할 수 있게 될 거에요.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이 된 방법이니까요.”
난 다시 한번 지도를 쳐다보며 마지막 설명해 주었다.
“여기 이 원들을 보시면 떠오르는 게 없나요?”
“흠…… 쇼트트랙 경기장?”
“그게 떠오르나요?”
“그럼? 다른 게 더 있나요?”
“아니요. 쇼트트랙 경기장도 맞아요. 그럼 쇼트트랙 경기를 할 때 바깥쪽에 있는 선수는 조금 더 앞에 서서 시작하는 거 아시죠?”
“네. 안쪽에 있으면 원의 크기가 작아서 거리가 짧으니 바깥쪽에 있는 선수한테 핸디캡을 주는 거로 알고 있어요.”
“네. 맞아요. 원이 작으면 그만큼 거리가 짧죠. 그리고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산 정상 부분이 지형이 험난해도 다닐 수 있는 길만 만들어 놓으면 아래쪽에 있는 적들보다 짧은 움직임만으로도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될 거에요. 하지만 우린 적에게 핸디캡을 줄 필요는 없죠.”
“아, 이제야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지윤미 마스터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은 길이 없어 이동하는 게 수월치 않겠지만 길만 뚫어 놓으면 적들에겐 우린 마치 동해 번쩍, 서해 번쩍했다던 홍길동처럼 아니 귀신처럼 신출귀몰하게 느껴질 것이다.
* * *
한 달, 두 달…… 육 개월.
“완전 타잔이 따로 없네요.”
“그러게.”
켄트성 북쪽 숲에 들어와 반년이 지나자 발키리 길드 헌터들은 마치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넝쿨을 타고 숲속을 오갔다.
“해용 오빠, 하늘 다리 인근에도 십만여 개의 덫을 설치해 놓았어요. 무턱대고 올라왔다간 다들 발이 성치 않을 거예요.”
“응. 수고했어. 이제 이 숲은 완전히 우리 것이 된 건가?”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제인 아니 윤다영을 쳐다봤다.
지난 6개월 동안 우린 숲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며 진지를 구축하고 수백 군데에 함정을 설치하고 또 그 위에 진지를 구축했다.
일견 보기에는 그저 나무와 풀이 있는 일반 숲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닌 곳에선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바로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네. 명령만 하시면 바로 다리를 폭파하고 성벽을 쌓을 재료도 인근에 다 준비해 놓았어요.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아요. 그동안 계속 보급품을 탈취해서 적들도 분명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취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하몽 님과 오키도키 님한테 연락해서 이곳으로 모두 이동을 하라고 해. 아니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이쪽으로 다 이동하라고 해. 다리 폭파하자.”
“네. 알겠어요.”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청방 길드와 싸울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제 다리를 폭파해도 될 듯했다.
* * *
켄트성.
{부마스터님, 큰일 났습니다. 일만여 마리의 오크 부대가 하늘 다리를 폭파하고 그곳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제길. 어젯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그놈들이 별안간 어디서 나타난 거야.}
쾅!
청방 길드의 부마스터. 장원재
부하 헌터의 보고를 받고선 주먹을 불끈 쥐고 앞에 있는 책상을 내리쳤다.
{이곳으로 진군하면서 부락 단위로 활동하는 몬스터는 다 토벌을 했는데, 오크들이 워낙 번식력이 빨라서 그새 다시 세를 확장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 내가 오크들은 정기적으로 토벌을 하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한다고 했는데 성 내에 너무 할 일이 많아서…….}
{쯧쯧. 성을 지킬 최소 인원만 남겨 두고 모두 출정 준비를 하라고 해.}
{모두 말입니까?}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하잖아. 일만여 마리면 적은 숫자가 아니야. 어설픈 병력으론 갔다간 되레 당하는 수가 있어. 모두 준비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보며 장원재는 전군에 출정 명령서를 내렸다.
쌀.
고기.
생선.
야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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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치밖에 없다니 도대체 보급품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부하 헌터에게는 만전을 다하기 위해 전군 출정 명령을 내린 것처럼 했지만 현재 켄트성엔 식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