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그리폰 (3)
“성벽 쌓는 게 힘든가? 오크들이 길만 만들어 주면 마차로 벽돌 옮기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마차로 옮기면 그나마 수월해지겠지만 그것도 그리 편하지만은 않을 거야.”
“그래?”
“봐 봐. 성주님 저 위쪽 능선 바라보고 계시잖아. 또 무릎 아작나게 생겼네. 에효.”
지윤미 마스터가 앓는 표정을 지으며 내 시선을 따라왔다.
스카이 캐슬을 함께 개발하다 보니 이제 굳이 말을 하지 않고 내 눈빛만 보고도 의도를 파악했다.
난 단순히 잠시 식량을 보관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산성(山城)을 지어 스카이 캐슬과 같은 제대로 된 전진 기지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여기를 중심으로 왼쪽에 보이는 봉우리를 시작해서 능선을 따라 오른쪽 봉우리까지 쭉 둘러쌓으면 될 것 같네요.”
“마안형이네요.”
“오! 맞아요.”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윤미 마스터를 쳐다봤다.
마안형은 말의 안장 모양으로 가운데가 오목한 두 봉우리를 연결해서 돌려 쌓는 방법이었다.
스카이 캐슬에 첫 성을 질 때는 발품을 팔아 돌아다니며 일일이 성벽을 쌓을 곳을 정해 주어야 했는데 지금은 멀리서 손짓을 하는 것만으로도 알아서 머릿속으로 산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산성에 대해 공부 좀 하셨나 보네요.”
“안 할 수가 있나요. 성주님 덕분에 지형지물이 우리의 편이 됐을 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몸소 깨달았는데요.”
지윤미 마스터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와 함께 이미 수백의 병력으로 수만의 오크를 막아낸 경험이 있는 그녀는 산성의 방어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산성은 기본적으로 산세를 따라서 산의 정상부나 사면을 이용해 적으로 하여금 많은 힘을 기울여 공격하게 하고, 아군이 적을 내려다보며 방어하는 형국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라인을 정한 장소는 마안형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사방이 높고 중앙이 낮아 남한산성과 같이 고로형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내가 라인을 정한 곳에 산성만 잘 둘러쌓으면 수백의 헌터들만 상주해 놓아도 수천의 몬스터들을 막아 낼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평지가 아닌 높은 산까지 올라가 공사해야 해서 인력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지어 놓으면 고생한 만큼 모두 방어력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갈 길이 바쁘긴 하지만 일단 여기다가 기초공사라도 같이 해 주고 가죠. 산성을 만들어 놓으면 만에 하나라도 십만 이상의 몬스터나 적이 쳐들어와도 막아 낼 수 있을 거예요.”
“십만 이상이 쳐들어와도 막아 낼 수 있다고요?”
“네. 지금 우리도 숫자가 적지 않지만, 행여나 얼마 되지 않더라도 수백의 헌터만 상주해도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십만의 당나라 군대를 막아 냈던 고구려의 안시성.
수십만의 거란 군대를 막아 냈던 고려의 구주성.
.
.
.
임진왜란 때 왜군을 대파한 권율의 행주산성.
조금 허황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산성만 잘 지어 놔도 적은 병력으로도 대군을 막아 낼 수 있다는 건 이미 역사적으로 여러 번 증명이 되었다.
“베이스캠프와 여기에도 기지국을 설치해서 통신도 할 수 있게 해야 할 것 같네요. 모두 움직여 주세요.”
“네, 알겠어요.”
“네, 알겠어요.”
내 설명을 들은 수만의 헌터들이 무구를 집어넣고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 * *
“청방 길드 깃발이에요.”
“역시 먼저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네요.”
한 달에 걸쳐 8개의 산성 자리를 봐 주고 공사 지시를 한 후에 켄트성에 도착하자 내 예상대로 청방 길드가 이미 성벽까지 보수하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가 죽인 청방 길드의 정찰병이 돌아오지 않아 저쪽도 경계하는 것 같네요. 경비가 너무 삼엄해요.”
“그러게요.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네요.”
난 인상을 찡그리며 켄트성 성벽을 쳐다봤다.
성벽 위를 지키고 있는 병사만 얼핏 봐도 수백 이상은 되어 보였다.
수백만 명 이상의 국민이 있었을 정도로 거대한 국가였다고 하더니 성벽 역시 그 위용이 정말 대단했다.
“저리 크고 튼튼한 성벽을 지키지 못하고 왜 피신을 한 거죠?”
[죄송합니다. 일반 몬스터라면 수백만 마리가 와도 막아 낼 수 있었겠지만, 타란툴라와 늑대인간의 독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탓하는 게 아니니까. 답답한 마음에 혼자 한 소리예요.”
[……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단단해 보이는 성벽을 보고 답답한 마음에 푸념한 건데 퍼거슨이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같이 내게 사과를 해 왔다.
“혹시 비밀 통로 같은 건 없나요? 일단 적이 몇 명이나 되는지 그것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있긴 한데. 아직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확인해 보죠.”
[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혹시나 하고 물어봤는데 퍼거슨이 성벽 옆에 있는 숲으로 우릴 안내했고 풀과 나뭇잎으로 가려진 동굴 하나가 보였다.
벽에 거미줄과 이끼가 가득한 걸 보니 아직 청방 길드에서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왕과 직계 왕족들이 주민들의 암행을 나가고 위험 상황에 피신하기 위해 만든 길입니다. 이곳을 이용하면 성 내부는 물론이고 동, 서, 남, 북으로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이런 길을 만들어 놨었다니. 불행 중 다행이네요.”
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동굴을 쳐다봤다.
웅장한 성벽 위에 수많은 청방 길드의 헌터들을 보고 어떡해야 하나 난감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활로가 생겼다.
“저희가 가서 내성을 살펴보고 올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퍼거슨 님 안내 좀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최은빈이 마녀 부대와 함께 동굴로 들어갔다.
내성에 들어가면 분명 청방 길드 헌터들이 있을 테고 비토섬에서 염탐한 것처럼 작은 동물로 변신을 해야 할 것 같아 마녀 부대가 적격이었다.
작은 동물로 변신해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최대한 정체를 숨길 수 있을 테니까.
이곳으로 오는 내내 우린 몬스터로 변신을 해 적의 정찰병을 모두 해치웠기에 청방 길드는 아직 우리가 이곳에 당도한 지 모르고 있었다.
“우린 돌아가죠.”
“네.”
“네.”
퍼거슨 마녀 부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가 난 일행들을 이끌고 여덟 번째 산성이 지어지고 있는 병참 기지로 후퇴했다.
* * *
“성주님, 전령이 왔어요.”
“네. 들어오라고 하세요.”
산성으로 돌아와 하루가 지나자 마녀 부대 헌터 한 명이 돌아왔다.
염탐하는 게 쉽지 않았는지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가득했고 오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고생 많았어요. 적의 숫자는 얼마나 되나요?”
“경계가 너무 삼엄해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대략 이십만 명 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이십만 명이나요?”
“네. 대부분 E급 이하의 하위 헌터들이었지만 모두 주 무기로 석궁을 사용하는 원거리 클래스들이었습니다.”
“이런.”
전령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절로 코끝이 찡그려졌다.
비록 E급이라 하나 궁수들이 많다면 공성을 하는 게 더더욱 어려워 질 듯싶었다.
“공성 병기는요?”
“공성 병기 역시 상당히 많았습니다. 몬스터를 막기 위한 바리스타는 물론이고 화약 병기를 들고 있는 군인들도 수만 이상은 되어 보였습니다. 게다가 장원재도 있었습니다.”
“장원재요? 혹시 청방 길드의 부마스터를 말하는 건가요? S급 헌터로 알려진?”
“네. 그렇습니다. 장원재 헌터는 물론이고 그의 친위대 역시 모두 상주해 있었습니다.”
“흠…….”
난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일전에 김용규 부장에게 들었던 청방 길드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부마스터 장원재 S급 정령사?
활과 마법을 주로 사용하며 때론 어떤 이능인지 확인이 안 되는 신묘한 힘을 사용함.
뛰어난 두뇌와 지략으로 많은 길드원들이 충성하고 있음.
권혁과 함께 실질적으로 청방 길드를 운영하는 브레인 중의 한 명. 」
“혹시 친위대도 모두 원거리 클래스인가요?”
“네. 모두 활을 들고 있었습니다. 친위대의 숫자만 해도 족히 일만 이상은 되어 보였습니다.”
“하아…… 이 새끼들. 아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네요.”
나도 모르게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청방 길드의 힘은 내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경계가 삼엄해 정확히 확인은 못 했지만 신전뿐만이 아니라 광산도 하나 있는 듯했습니다.”
“광산이요?”
“네. 왕성 뒤편 산에 동굴이 있는데 그곳에서 수레에 핑크색 사파이어를 실은 인원이 나오는 게 여러 번 목격됐습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핑크 사파이어면 우리가 이미 다 채취를 했는데…….]
전령의 설명을 들은 린드 공주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얼굴을 보아하니 아는 물건인 듯싶었다.
“핑크 사파이어를 아나요?”
[네. 마법 방어 무구를 만들 때 들어가는 재료로 알고 있어요. 근데 그때 장인들 말로는 더 이상 없다고 했는데…….]
“없는 게 아니고 광산 기술이 부족해 더 들어가지 못했던 거겠죠.”
이곳은 이능이 발전된 대신 과학 기술이 떨어졌다.
아무리 이능이 대단해도 현대 과학으로 땅을 파고 광산을 만드는 것보다 그 기술력이 떨어졌고 청방에서 더 깊게 땅을 파 핑크 사파이어를 채취하고 있는 듯싶었다.
옐로우 사파이어, 핑크 사파이어. 거기다 성수까지.
우리가 오크의 숲에 정착해 미스릴을 기반으로 발전을 하는 동안, 청방에선 이곳에 터를 잡고 발전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저 좋은 소식은 없나요?”
“있습니다.”
“있다고요?”
“네. 성 내부는 물론이고 동쪽과 서쪽, 북쪽 인근을 살폈는데 그 어디에도 게이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흠…… 저들도 우리처럼 게이트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북쪽 성문으로 물자가 들어오는 걸 보고 최은빈 부대장이 게이트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길드원을 모두 데리고 미행하러 갔습니다. 조만간 보고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전부 다요?”
“네. 내성에 상위 헌터들이 꽤 많아 더 이상의 염탐은 불가능할 것 같아 최은빈 부대장이 일단 저만 돌아가서 상황을 알리고 자신은 게이트 위치를 확인하고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현명한 선택이네요.”
난 기대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적이 이십만 단위 이상으로 있다면 정면 돌파는 피해야 했다.
정면 전을 치르면 이기든, 지든 치명상을 입을게 분명했으니까.
“고생했을 텐데 돌아가서 쉬세요.”
“네. 알겠습니다.”
난 전령을 돌려보내고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차를 들이켰다.
* * *
“……이틀, 거리에 게이트 없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전령 한 명이 도착했다.
“최은빈 부대장은?”
“계속 미행하고 있습니다. 연락이 없으면 걱정하실까 봐 일단 저만 먼저 복귀를 했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쉬세요.”
“네.”
최은빈 부대장은 매일 한 명씩 헌터들을 돌려보내며 미행을 이어 나갔다.
“……삼일, 거리에 게이트 없습니다.”
“병참 기지는?”
“있긴 한데, 저희처럼 산성을 구축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목책으로 만든 임시 건물들이 전부였습니다.”
“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점점 희망이 보였다.
켄트성으로 진군하는 내내 난 병참 기지에 대한 중요성을 교육했다.
그런데 내 교육과 달리 적의 보급로가 너무 허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