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그리폰 (2)
[성주님, 무엇으로 변신을 하면 될까요?]
“해골로 변신해 주세요. 그래야 헌터들도 금세 바뀐 몸에 적응할 테고 무기를 사용하기 편할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반짝반짝.
해골 검사, 해골 도끼병, 해골 궁수, 해골 마법사…….
변신 반지를 건네받은 화랑 연합과 플로라 길드 헌터들이 하나둘씩 언데드 몬스터로 변신을 시작했다.
“와! 감쪽같네요. 생긴 것도 그렇고 기운도 그렇고 변신을 하는 걸 제 눈으로 안 봤으면 진짜 해골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변신 반지의 효능을 처음으로 직접 체험을 한 이아영 마스터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연합에서 소속된 헌터들을 쳐다봤다.
내가 봐도 정말 사기적인 아이템이었다.
그동안 카프리가 만들어 준 아이템들도 대단했지만, 변신 반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강력한 데미지와 방어력도 중요하지만, 변신해 정체를 숨기면 애초에 불필요한 싸움도 피할 수 있고 기습을 하는 데도 유리했다.
“자! 이것들 하나 받으셔서 네 번째 손가락에 착용하세요.”
“이게 뭐죠?”
“피아 식별 아이템이에요. 지금이야 함께 모여 있으니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흩어져서 이동하다가 몬스터인 줄 알고 아군끼리 싸우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아…….”
연합 헌터들이 오와 열을 맞춰 변신을 시작하자 이부성과 헬퍼들이 그들에게 다가가 노란색 테두리에 파란색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를 건네줬다.
‘비싸 보이는데 저 많은 게 어디서 난 거지?’
난 헬퍼들에게 다가가 반지 하나를 건네받았다.
“미스릴이랑 마나석으로 만든 건가?”
“네. 맞아요. 마법 방어 반지에요. 켄트 왕국 기사들이 착용하고 있는 무구처럼 방어력이 높지는 않지만 데미지를 5 퍼센트 정도는 줄여 줄 거라고 하더라고요.”
“5 퍼센트나? 카프리가 만든 거야?”
“네. 공방이랑 마탑에서 합작해서 만든 거예요.”
이부성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간단하게 반지의 효능에 대해 적혀 있는 설명서를 건네주었다.
「항마의 반지.
물리 방어력: 0
마법 방어력: 5%」
오크들의 무구들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오만상을 찡그리며 궁시렁거리더니 그동안 이걸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크와 언데드 몬스터, 늑대인간. 타란툴라.
그동안은 물리력과 중독 위주의 공격으로 하는 몬스터하고만 조우해 신경 쓰지 않더니 이제 슬슬 카프리도 마법 방어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거까지 챙겨 주실지 몰랐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성주님.”
“고맙습니다. 성주님.”
항마의 반지를 건네받은 이아영 마스터와 이슬비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건네 왔다.
효능도 효능이지만 장인인 카프리가 만든 것이라 그런지 비주얼도 훌륭해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게 돈이 다 얼마람?’
금으로 만든 얇은 실반지에 병아리 눈물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도 돈 백만 원이 훨씬 넘는다.
그런데 무려 항마의 반지는 대륙 최고의 장인인 카프리가 가공하고 미스릴과 마나석이 들어간 제품이었다.
돈 주고 팔면 최하 천만 원은 할 텐데 그걸 공짜로 나눠 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짝 속이 쓰렸다.
“제가 그냥 나눠 주라고 한 거예요.”
“응?”
“지금 속으로 아까워하고 있잖아요. 속마음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게 오빠의 매력이긴 한데 지금은 좀 숨겨야 할 것 같아요.”
플로라, 화랑 연합, 레인보우, 울프…….
‘백만 원씩만 받아도 백억은 될 텐데…….’
우리와 동맹을 맺은 연합 소속 인원만 해도 만여 명이 훌쩍 넘었고 속으로 반지값을 계산하고 있는데 수정이가 미소 지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네 왔다.
“일전에 저희가 플로라 길드와 연합 헌터들에게 못되게 굴었잖아요. 서로 사과를 하고 화해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나마 그때 미안했다고 한 번 더 저희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아…….”
“그리고 본격적으로 전투를 하기 전에 확실히 해 놓아야 할 필요도 있을 것 같기도 했고요.”
“……뭘?”
“이곳의 주인이 우리는 것을요. 그래서 식량은 물론이고 전투에 필요한 아이템과 소비되는 모든 것들을 우리 쪽에서 준비하기로 했어요.”
수정이가 스산한 눈빛을 하고선 연합 사람들을 쳐다봤다.
스카이 캐슬과 비토섬.
김용규 본부장에게 어영부영 대한민국에 편입하겠다고 말하고 도움을 받아 운영하고는 있지만, 지도부는 모두 우리 연합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도 그렇게 통치를 하길 원해 미리 선을 그으려는 모양이었다.
“……그 부분은 지윤미 마스터랑 상의해서 발키리에서 알아서 해 줘.”
“네.”
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 이상 김용규 본부장, 이아영 마스터와 이 부분 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두루두루 지내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속마음이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네. 바로 알아듣고 마나 운영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부분 한두 번씩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게. 변신 반지가 좀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변신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헌터 연합 사람들을 쳐다봤다.
만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반지 하나로 변신을 하려다 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옐로우 사파이어가 있으면 흉내를 낼 수 있긴 합니다.]
“옐로우 사파이어요?”
[네. 변신 반지를 만들어내진 못하겠지만 옐로우 사파이어가 마력을 추출해 주문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문서라 하면 귀환 주문서처럼 일회성이라는 건가요?”
[네. 옐로우 사파이어가 얼마나 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변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오!”
난 기대하는 표정을 지으며 하몽을 쳐다봤다.
일회성에 지속시간이 짧은 게 흠이긴 하지만 그거라도 있으면 큰 도움이 될 듯했다.
“옐로우 사파이어는 어디 있는데요? 설마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제게 말을 꺼낸 건 아니죠?”
[물론이죠. 옐로우 사파이어가 있는 곳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곳에 가려면 옛 켄트 왕국의 왕성을 지나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요? 그럼 조만간 확보할 수 있겠네요. 어차피 우리가 가려 하는 방향에 있으니까.”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옐로우 사파이어가 있는 광산은 하늘 다리 지역만큼이나 지형이 험난하고 높은데 그리폰이라는 몬스터까지 서식하는 지형이라 켄트 왕국에서도 접근을 포기했었거든요.]
하몽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저 멀리 북쪽에 하늘 높이 솟아 올라있는 산맥을 쳐다봤다.
봉우리가 있는 곳들에 구름이 섞여 있는 걸 보니 하늘 다리보다 훨씬 더 높을 듯했다.
“일단 가 보죠. 가보면 무슨 방법이 생기겠죠.”
[네. 알겠습니다.]
“변신 다 하셨으면 모두 출발하죠.”
“네!”
“네!”
짧지 않은 기다림 끝에 헌터들이 변신을 끝낸 걸 확인한 난 바로 일행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성주님, 서쪽에 있는 오우거와 늑대 인간 무리는 모두 정리했습니다.”
“벌써요?”
“서쪽은 쭉 왼쪽 끝이 바다와 연결이 돼서 땅이 넓지 않아 몬스터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한 우린 천천히 이동하고 몬스터를 토벌하며 지도를 그려나갔다.
남쪽과 서쪽은 바다.
짐작건대 이곳이 대륙의 왼쪽 아래 끝인 듯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열 시간.
“성주님, 오늘 저녁은 여기서 숙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알았어요. 준비하라고 하세요.”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온 것 같은데도 숲은 계속 이어졌고 우린 작은 강줄기가 흐르는 곳 옆에 자리를 잡고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성주님, 이 속도로 가면 일주일 정도 더 가야 켄트성이 보일 것 같습니다.]
“흠…… 생각보다 훨씬 머네요.”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퍼거슨이 건네준 옛 켄트 왕국의 영토가 그려진 지도를 쳐다봤다.
비록 우리가 몬스터를 토벌하며 이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제법 빠르게 이동을 하고 있었다.
짐작건대 시간당 4km는 이동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스피드로 가는데도 일주일 이상 걸린다면 늑대인간의 숲에서 켄트성까지 영토만 차지해도 대한민국의 영토와 길이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듯했다.
물론 지금은 왼쪽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만 이동하고 있어 동쪽으로 좀 더 나아갔을 때 어떤 몬스터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부성아, 여기다가 병참 기지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
“여기다가요?”
“응. 예상했던 것보다 거리도 멀고 길도 험난해. 그리고 아직 대규모 몬스터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오크의 숲에서처럼 언제 별안간 몰려올지 모르잖아.”
“……그렇긴 하죠. 그럼 이곳 말고도 앞으로 최하 일곱 군데는 더 병참 기지를 만들어야겠네요?”
“그치.”
“하아…… 또 죽어나겠네요.”
이부성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도를 쳐다봤다.
병참 기지를 여덟 곳이나 만들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모양이었다.
“지윤미 마스터님, 전령을 보내서 늑대인간의 숲에서 여기까지 마차가 다닐 수 있게 길을 만들라고 해 주세요.”
“마차가 다닐 길이요?”
“네. 오크들 인원이 많으니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크의 숲에서 겪어 보셨잖아요. 지금이야 별일 없지만, 북쪽 깊숙이 들어갔다가 또 고립이라도 당하면 지난번처럼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어요. 그리고 혹여나 별일 없이 켄트성까지 진격해도 청방 놈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공성전까지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보급로가 완성되어 있지 않으면 기껏 가서 바로 철수를 해야 할지도 몰라요.”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지윤미 마스터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가 오크의 숲에 고립되어 버티는 동안, 청방은 이미 성수를 확보해 판매하고 있었다.
내 짐작처럼 청방이 확보한 성수가 켄트 왕국의 카시오페아 신전에서 채취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오크들과 언데드 몬스터를 막기 위해 성을 구축해 놓은 것처럼 저들도 성을 보수하고 방어 시설을 갖춰 놓았을 게 분명했다.
최악의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청방 길드가 성을 방패로 농성이라도 벌이면 아무리 오크들이 많아도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칼과 총과 같은 강력한 무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먹고 자고 싸는 것이었다.
강력한 이능을 가진 무구와 헌터들이 있으면 뭐 하겠는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을 못 자면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는 데 말이다.
오물오물.
냠냠.
“형, 벌써 다 드신 거예요?”
“응.”
주먹밥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한 난 스카이 캐슬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 하나를 챙겨 들었다.
“왠지 저 모습을 어디서 본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기분 탓 아니야. 나도 어디서 본 것 같거든.”
“윤미야, 수정아, 왜 그래? 성주님 지금 뭐 하시는 건데?”
“성벽.”
“웅?”
“성벽 쌓으려고 저러시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우리가 영지에 남아있겠다고 할걸…….”
깃발을 들고 내가 주변 지형을 살피자 발키리 길드 헌터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