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카시오페아 신전 (4)
비엔나소시지, 양념 참치, 게맛살, 계란프라이, 김치찌개…….
집에 도착하니 새어머니와 수정이가 한 상 푸짐하게 차려 날 기다리고 있었다.
“더 맛있는 거 해 드리고 싶었는데, 아버님이 오빠 애들 입맛이라고 이런 거 더 좋아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응. 맞아.”
난 빙그레 웃으며 수정이를 쳐다봤다.
사실 난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
콩나물국에 김만 있어도 맛있게 밥 한 공기 뚝딱할 만큼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맛있게 먹었다.
“아싸. 소시지다. 오빠 이제 어디 안 가고 매일매일 이렇게 먹었으면 좋겠다. 히히.”
“맛있어?”
“응. 나도 소시지 좋아하는데 건강에 안 좋다고 엄마가 잘 안 해 줘.”
찌릿.
은솔이가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토마토케첩을 찍어 소시지 하나를 입에 넣고 새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애들이라 그런지 달고 짠 인스턴트 식품이 입맛에 맞는데 새어머니가 잘해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 이제 술 안 드시기로 했잖아요.”
“한 잔만…….”
“안 돼요. 오랜만에 오빠도 집에 왔는데 저 화나게 하지 마세요.”
“끙…….”
아버지가 눈치를 살피며 컵에 소주를 따랐는데 수정이가 그걸 빼앗아 바닥에 버렸다.
‘……?!’
난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평생을 누구 눈치를 보면서 사신 적이 없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드셔야 하는 분이었고 하기 싫은 일은 목에 칼에 들이대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성격상 마시려던 걸 저리 빼앗아 버리면 상을 엎어도 열 번은 엎을 만한 일인데 순한 양이 된 것처럼 가만히 계셨다.
“딸들이 생겨 좋긴 한데 이럴 땐 좀 그러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죠. 처음에만 힘들지. 안 드시다 보면 적응될 거예요. 김치찌개 드셔보세요. 맛있게 됐어요. 아.”
“……그래.”
냠냠.
아버지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니 수정이가 김치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넣어주니 마치 아이처럼 그걸 받아 드셨다.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어? 애비 밥 먹는 거 처음 보냐?”
“좋아서요.”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내가 없는데도 수정이는 어색해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와 더 가까워진 듯했다.
“해용아,”
“네.”
“너 내 딸 언제까지 저렇게 둘 거냐?”
“내 딸이요?”
“내 딸이랑 결혼할 거 아니었어?”
“아…….”
난 머리를 긁적이며 수정이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가 깜빡이도 키지 않고 갑자기 훅하고 들어와 뭐라 말을 해야 될 지 난감했다.
“아버지도 참. 오빠 방금 복귀했잖아요. 오늘은 편안하게 쉬게 해 주세요.”
“쩝, 잘해 인마. 그렇게 뭉그적거리면 내 딸 다른 사람한테 줄 거니까.”
“……네.”
어째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다.
마치 수정이가 딸이고 내가 손님처럼 느껴졌다.
“고마워. 수정아.”
“…….”
난 빙그레 웃으며 수정이의 손을 꼭 잡았다.
생일인지도 모른 체 그냥 지나가 내심 토라져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사실 이래서 내가 수정이한테 좀 소홀했는지도 모르겠다.
“이거.”
“이게 뭐예요?”
“이태리에서 가져온 명품 신발이야. 생일 선물.”
“오빠…….”
글썽글썽.
수정이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않는지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알고 계셨어요?”
“아니 미안. 몰랐어. 부성이가 사다 놓은 거야. 부성인 내가 산 것처럼 얘기하라고 했는데 너한테 거짓말하기 싫네. 내년엔 내가 직접 내 손으로 근사할 걸 사 줄게.”
“치!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도 고마워요. 솔직하게 얘기해 줘서.”
수정이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변변찮은 놈. 어째 내 딸은 저런 못난 놈을 좋아하게 돼서 쯧쯧. 은솔아, 넌 저런 놈 좋아하면 안 된다. 알았지?”
“네. 아빠. 제 생일도 기억 못 하는 남자랑 어떻게 만나요. 저 같으면 바로 팽이에요. 팽! 아야! 왜 꼬집어!”
“오빠한테 왜 그러세요. 은솔이 너도 그만해. 바빠서 그런 거잖아.”
“…….”
“…….”
수정이가 아직 눈물이 맺힌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와 은솔이를 쳐다봤다.
보아하니 아무도 모르게 은솔이의 허리도 살짝 꼬집은 모양이었다.
“다 드셨으면 저랑 얘기 좀 해요.”
“응.”
식사를 마친 난 수정이와 함께 집 앞에 있는 정원으로 나갔다.
* * *
“밖의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요.”
“나도 들었어. 계속해서 웨이브가…….”
“그것도 그거지만 중국 헌터 협회 쪽에서 던전 안에서 생겼던 일을 외부와 연결 짓지 말자고 세계 헌터 협회에 압력을 넣고 있는 것 같아요.”
“엥?”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수정이를 쳐다봤다.
게이트 안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건 어지간한 국가와 헌터 협회에서는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서로 모르는 척했는데 중국 쪽에서 그걸 표면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외부와 연결 짓지 말자고 하는 건…….”
“저희가 비토섬에서 청방 길드와 부딪힌 것처럼 알게 모르게 다른 곳에서도 계속 마찰이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수정이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바깥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평범한 가정의 딸처럼 굴었는데 그녀는 어느새 발키리 길드의 부 마스터로 돌아와 있었다.
“흠…….”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던전 안에서의 일을 밖으로 연결 짓지 말자니…… 우리가 타깃인건가?’
짐작건대 청방 길드 역시 우리만큼이나 던전 안에 대해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도 아는 것이다.
중국과 우리가 차지한 영토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세계 헌터 협회에서는 어떻게 할 것 같아?”
“조만간 중국의 요구를 들어줄 것 같아요. 지금처럼 계속 던전 안에서 트러블이 생기고 그게 바깥에서까지 연결이 되면 3차 세계 대전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3차 세계 대전? 그 정도로 심각한 거였어?”
“중국도 중국이지만 다른 나라들도 말도 아닌가 봐요. 몬스터 웨이브는 계속 발발하지, 그걸 최대한 피해 없이 막으려면 이곳의 이능이 깃들 물건과 헌터들이 필요하니 계속 마찰이 생기고 있는 것 같아요.”
“……몬스터 막기도 힘든데 이제 전쟁 준비까지 해야겠네.”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중국의 요구가 통과되면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우리한테 도발이 들어올 것 같아요. 어쩌면 지난 일을 핑계로 미국과 일본 쪽에서도 이곳을 차지하려 들지도 모르고요. 지금보다 더 방어력을…….”
“아니. 난 공격할 거야.”
“네?”
“여기서 적들을 맞이하면 그동안 힘들게 올린 건물과 농작물이 다 상하게 되잖아. 싸울 거면 남의 땅에서 해야지.”
“다른 나라 땅을 쳐들어가시겠다고요?”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우리가 먼저 쳐야지. 난 가만히 앉아서 먼저 때리길 기다릴 생각이 없어.”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저 멀리 게이트가 있는 뒤편 하늘을 쳐다봤다.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우리나라는 침략만을 당한 역사를 갖고 있었다.
난 그런 치욕적인 역사를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지난날 중국에 대항해 저 드넓은 요동반도를 차지했던 고구려와 발해처럼.
“지휘부에 전달해 줘. 내 예상이 맞는다면 늑대인간의 숲 위쪽에 신전이 있고 청방 길드에서 확보한 성수는 거기서 나오는 걸 거야. 거길 빼앗으러 갈 거니까 준비해 줘.”
“네. 알겠어요. 어차피 싸우게 될 거라면 저도 이곳에서 싸우는 건 싫어요.”
수정이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전쟁 의지를 드러낸 다음 날, 김용규와 임풍훈이 재난 관리 본부 소속 헤드 급 헌터들을 데리고 네게 허겁지겁 달려왔다.
“성주님, 제가 들은 게 사실입니까?”
“청방 길드를 치겠다고 들었다면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다.”
“몰래 기습을 해서 드워프만 빼오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랑은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아닙니까?”
찌릿.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김용규 본부장을 노려봤다.
그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청방 길드와 다른 국가의 헌터 협회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근데 그는 내게 말 해 주지 않았다.
“이제 한편이 된 줄 알았는데 자꾸 정보를 차단하시는 저의가 뭡니까?”
“이러실까 봐 그랬습니다.”
“……?”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크리스와 시미켄 일은 제가 외교적으로 잘 해결해 볼 테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그리고 약속한 대로 나름 잘 무마를 시키고 있고요.”
“그게 문제입니다. 저들은 이 땅을 도모하려 했고 그게 들통나 죽임을 당한 겁니다. 무마는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 해야죠.”
“네. 맞습니다. 그래서 저들도 유감의 뜻을 저희한테 밝혀 왔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시고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쇼. 던전 안에서의 일과 바깥일을 연결 짓지 말자는 건 전쟁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의견이 오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얻어맞아 놓고선 김용규 본부장님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요.”
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내 뜻에 따라주지는 않을 거라는 걸.
헌데도 막상 김용규 본부장이 반대의 뜻을 밝히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가 지금 청방의 본거지를 치겠다는 게 아니죠. 일단 신전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곳을 청방 길드가 차지하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처단하겠다는 거지.”
“어쩔 수 없는 거 맞습니까? 제가 볼 땐 그곳에 있길 기대하는 것 같은데?”
“제가 무슨 사이코패스입니까? 그곳에 있길 기대하게. 저도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청방 길드가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게 맞고 우리한테 뺏기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것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청방 길드를…….”
“걱정하지 마세요. 비토섬에서처럼 청방 길드는 누구한테 공격 당한지도 모를 테니까요.”
“네?”
“다 죽일 겁니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혹여나 도망가는 인원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저들은 몬스터한테 공격을 받은 거로 알게 될 겁니다.”
“……?”
“아직 저에 대해 자세히 듣지 못한 모양인데 삼백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수만의 오크들을 막아 내는 것은 물론이고 무찌르고 성까지 빼앗았던 사람이에요. 본부장님이 염려하시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저를 믿고 따르시면 됩니다.”
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하몽이 착용하고 있는 변신 반지와 저 멀리 가지런히 자리 잡은 오크성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