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카시오페아 신전 (2)
“성수라 하면…….”
[성수를 마시면 다친 사람을 단시간에 빨리 치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데드와 늑대인간과 같은 몬스터에게 중독돼도 후유증 없이 다시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흠…….”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퍼거슨을 쳐다봤다.
‘켄트 왕국의 옛 땅에도 청방 놈들이 자리 잡은 건가?’
지금 현재 지구에서 언데드 몬스터에게 중독된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세력은 엔트 키트가 있는 우리 스카이 캐슬과 성수를 보유하고 있는 청방 길드뿐이었다.
그리고 청방 길드는 성수를 이용해 막대한 부와 권력을 모으고 있었다.
짐작건대 왠지 퍼거슨이 말하는 신전을 청방 길드가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옛 켄트 왕국의 영토 동쪽에 사막이 있나요?”
[네. 맞습니다.]
“남쪽에는 늑대인간의 숲과 거기서 서쪽으로 더 가면 타란툴라 해변이 있고요?”
[네. 맞습니다. 성주님께서 그걸 어떻게?]
“늑대인간의 숲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신전이 있죠?”
[……네.]
퍼거슨이 놀람과 의문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그의 반응을 보니 내 짐작이 맞는 듯했다.
중급 정령사로 각성하며 보았던 일부 땅들이 옛 켄트 왕국의 영토였던 모양이었다.
“저희 스카이 캐슬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그레이 기사단이 지금 그곳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헉! 정말입니까? 일, 이만의 병력으로 개척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 텐데요? 이곳으로 오기 전 켄트 왕국의 국민은 수백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영토를 지키지 못할 만큼 몬스터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는데…….]
“네. 안 그래도 고전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몬스터의 숫자도 숫자지만 지리도 파악이 되지 않아 확장하지 못하고 몬스터들이 우리 세계로 넘어오지 못하게 게이트 인근만 사수하는 상태입니다.”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저흰 수십만 명의 병력이 있었는데도 끝내 몬스터에게 밀려 왕국 국민을 버리고 이곳으로 도망을 쳤는데…….]
퍼거슨이 씁쓸한 표정을 고개를 숙였다.
얘기를 하다 보니 옜 기억이 떠오른 듯했다.
유거성호를 만들고 첫 항해를 하고 도착한 해변에서 보았던 그 수많은 유골이 모두 켄트 왕국의 병사들과 국민이었던 모양이었다.
[퍼거슨 경.]
[네. 공주님.]
[제가 켄트 가의 이름을 지키고 왕족으로서 남고 싶은 이유는 단지 가문의 유지와 명예 때문만은 아니에요.]
[……?]
[제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아니 지금도 할머니와 어머니께서는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미안해하고 그리워하세요. 마족과 몬스터에게 쫓겨 이곳으로 도망을 올 때 데리고 오지 못한 켄트 왕국의 국민을.]
[……!]
[많은 사람이 죽었겠지만 분명 아직도 살아남아 몬스터들과 싸우고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전 그들을 찾아 데리고 오려는 거예요. 본토에 다시 켄트 가의 깃발이 펄럭이면 우리가 그들을 찾지 않아도 그들이 우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요.]
[공주님…….]
린드 공주와 퍼거슨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가만히 서로를 쳐다봤다.
‘왕실을 유지해 줘야 하나?’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신성력이 깃든 지팡이와 액세서리.
신전과 성수.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를 켄트 왕국의 유랑민들까지.
비토섬에 정착한 켄트 왕국 국민에게 우리의 제도를 가르치고 적응시키기 위해선 왕실을 없애야 할 것 같은데, 켄트 가의 이름과 린드 공주의 능력을 포기하자니 손해가 막심했다.
‘이름만 남겨 주자. 딱 이름만!’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사우디아라비아…….
현재의 지구에도 여전히 왕이 있는 국가들은 존재한다.
왕은 실권이 없고 내각제 제도로 운영하는 국가들이 꽤 많았다.
자유주의 국가이지만 민주주의 국가는 아닌 곳들이.
조금 귀찮고 번거롭고 장애물이 될 수 있지만 아무래도 린드 공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현명할 듯했다.
“몬스터와 직접 싸우는 건 안 돼.”
[네?]
“뒤에서 지원만 해.”
[……왕실을 유지해 준다는 뜻인가요?]
“그래. 하지만 병력과 국가 운영은 우리가 맡을 거야. 네가 얘기한 것처럼 딱 이름만 남겨 주는 거야.”
[네. 그거면 돼요. 그거면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린드 공주가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우면 귀족 문서와 노예 문서는 네가 직접 태워.”
[제가요?]
“노예를 만든 것은 물론이고 귀족 작위 역시 켄트 가에서 모두 임명한 거잖아. 우리 일행들이 사람들을 모아 놨을 테니 네가 직접 켄트 가의 이름으로 모두 불태웠으면 좋겠어.”
[네, 알겠어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
“그래.”
린드 공주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왕성 밖으로 나갔다.
왕실을 유지해 주는 대신 그녀가 직접 계급 문서를 불태우면 그나마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울분을 풀어주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했다.
[켄트 가의 이름으로 공표합니다. 앞으로 이 땅엔 귀족도 노예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린드 공주님 만세! 스카이 캐슬 만세!]
[린드 공주님 만세! 스카이 캐슬 만세!]
[흑흑.]
[흑흑.]
린드 공주가 직접 나서 계급 문서를 불태우자 평민과 노예로 지냈던 수많은 사람이 환호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수백 년간 켄트 왕국을 지배했던 켄트 가의 후손이 자신의 손으로 계급 제도를 없애고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부성아, 영지에 연락해서 술과 음식을 최대한 많이 갖다 달라고 해.”
“잔치라도 여시게요?”
“응. 오늘같이 좋은 날 그냥 넘어갈 수 없잖아. 진행하고 있는 작업도 다 중단하고 오늘 하루는 마음껏 즐기면서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자.”
“네. 알겠어요. 헤헤.”
“아, 맞다. 그리고 음식 들어오는 배로 김용규 본부장도 타고 오라고 해 줘.”
“네. 형.”
2019.6.24일
난 오늘 이날을 공휴일로 선포하고 켄트 왕국 국민이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파티를 열어 주었다.
* * *
“성주님, 축하드립니다. 백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이 섬을 연합으로 들어오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비토섬에 도착한 김용규가 찾아와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워낙에 구시대적인 제도로 운영이 되고 있어서 알아서들 들어온 거죠. 뭐.”
“그것도 그렇지만 성주님의 자비로움이 저들을 감동하게 해서 그렇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고맙고요. 아무튼, 이곳 좀 잘 부탁드려요.”
“네?”
“영지를 너무 오래 비운 것 같아서요. 이제 돌아가 보려고요. 뒷마무리 좀 해 주세요.”
“잘못 들었습니다?”
“여기도 좀 맡아달라고요.”
“네?”
“귀 다치셨어요?”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김용규를 쳐다봤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데도 오늘따라 그가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멀쩡합니다. 근데 성주님의 말뜻이 뭔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지금 말한 그대로예요.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수백 년 동안 계급 제도 아래 살아왔던 이들이고, 몬스터들에게 쫓겨 몸만 피해 와서 고립된 곳에서 지내다 보니 시설들이 대부분 거의 조선 시대 수준들이에요. 알아서 조치 좀 취해 주세요.”
“제가요? 왜?”
“그럼 누가 합니까? 제가 할까요? 힘드세요?”
“네. 힘듭니다. 스카이 캐슬 한 군데 개척하고 개발하는 것만 해도 머리가 부서질 지경인데 이곳까지 관리하려면 전 아마…….”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연합에 들어온 이상 이제 이곳의 영토와 사람들 역시 모두 대한민국에 소속된 거나 다름없는데요. 본부장님께서 관리해 주셔야죠. 설마 이제 와 우리가 대한민국 소속이라는 걸 부인하겠다는 건 아니죠?”
“아,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얘기를 한 건 절대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빨리 계속 늘어만 가서…….”
김용규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렸다.
“힘든 건 알지만 저희 연합 쪽엔 마땅한 인재가 없잖아요. 힘드신 거 알지만 본부장님께서 더 고생 좀 해 주세요.”
난 김용규 본부장의 등을 토닥거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잖아요.’
처음 스카이 캐슬에 왔을 때는 나와 얼굴을 붉히고 공무원들까지 대거 투입하면서까지 대한민국 소속에 두려고 난리를 치더니 점점 영토가 넓어지니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그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때 나를 괴롭혔던 기억이 떠올라 고소한 기분이 훨씬 더 컸다.
“부성아, 하몽 님이랑 은빈 씨한테 집에 가자고 해.”
“네, 알겠어요.”
“성주님, 진짜 이렇게 저만 덩그러니 두고…….”
“수고하세요.”
“끙…….”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는 김용규를 뒤로하고 난 복귀를 하기 위해 사람들을 소집했다.
이곳을 발전시키고 제대로 연합에 편입시키려면 해야 할 일들이 무수히 많겠지만 그중에 내가 할 일은 딱히 없었다.
스카이 캐슬에 공무원들과 기술자들을 투입해 발전시킨 것처럼 나머진 김용규의 몫이었다.
“해용이 형, 저기 린드 공주랑 퍼거슨 공주 같은데요?”
안 그래도 인사를 하고 가려고 찾아가려고 했는데 린드 공주와 퍼거슨이 왕실 기사단과 마법 사단을 이끌고 내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스카이 캐슬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명색이 성주인데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것 같아서요. 앞으로는 저분이 여러분들을 도와줄 거예요.”
난 여전히 불쌍한 표정을 짓고 날 쳐다보고 있는 김용규 본부장을 가리키며 손짓을 했다.
[아, 그렇군요. 근데 듣기론 마법에 대항할 수 있는 스킬과 무구들이 필요한 거로 아는 데 아니었나요?]
“그걸 어떻게?”
[하몽 님한테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석유도 찾고 가능하다면 기사 스킬을 배울 수 있을까 해서 이곳을 찾아 왔었어요.”
[근데 왜 이렇게 허겁지겁 가시려고 하는 건지?]
“도움을 드리고자 한 거지만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게 염치가 없어서요. 일단 영지로 돌아갔다가 정리 좀 됐다 싶으면 얘기 드리려고 했죠. 하하.”
난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화룡의 둥지에 갇혀 있는 드워프 종족을 구하고, 옛 켄트 왕국의 영토에 있는 신전을 찾으려면 린드 공주와 퍼거슨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재촉하기엔 지금 이곳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일단은 켄트 왕국 국민이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고 배우는 게 선결되어야 할 듯했다.
[저희를 그렇게 도와주셔 놓고도 원하는 바가 있으면서도 뒤로 미루고 끝까지 배려를 해 주시네요. 성주님께선 정말 존경하고 싶지 않아도 존경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시네요. ]
퍼거슨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마치 사랑에라도 빠진 사람같이 날 그윽하게 쳐다봤다.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선 마나 심공과 마나 스텝을 오랜 시간 연마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법 방어 무구를 만드는 것 역시 필요한 재료가 많아서 단시간에 구하기 힘드실 겁니다.]
“그렇군요. 저도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물어보려고 한 거고요.”
[린드 공주님과 함께 저희가 직접 스카이 캐슬에 가서 헌터들을 가르치고 레이드도 돕겠습니다.]
“저를 따라간다고요? 이곳은 어떡하시고?”
[크라켄으로 인해 청방 길드는 물론이고 다른 세력들이 이곳에 당분간 찾아오는 일도 없을 테고 민주주의 제도는 저희도 생소해서 이곳에 있어도 딱히 도움이 되지 않지 않겠습니까?]
“흠…….”
난 고민스런 표정을 지으며 퍼거슨을 쳐다봤다.
사실 내가 원하던 바이긴 했다.
그의 말처럼 바닷길이 봉쇄된 이상 치안을 위한 최소한의 경비병만 있으면 될 뿐 군인들이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린드 공주와 귀족이었던 기사단과 마법사단을 데리고 가면 김용규 본부장이 이곳 사람들에게 우리의 제도를 가르치고 적응시키는 게 더 편해질 테니까.
“저를 믿을 수 있겠어요? 이렇게 병력이 다 빠지면 제가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는데요?”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이곳을 이끄는 것보다 성주님이 하시는 게 국민이 더 편안하고 행복할 테니까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린드 공주와 퍼거슨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