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카시오페아 신전 (1)
“더 이상 입을 열지 마세요. 한마디만 더 하면 저도 제가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성주님…….]
“죽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빼서 퍼거슨을 패고 싶을 정도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훈련소에서 탈출하다가 고블린에게 잡혀 끌려가는 소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그 소녀 이름이 린드였을 겁니다.”
[…….]
“열두, 세 살쯤 되어 보이더군요. 결혼은커녕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뭔지, 바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를 아주 어린 나이죠.”
[아닙니다. 열두 살이면 스스로…….]
“닥치고 들으세요. 제가 아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열두 살은 어린아이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아이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벌이면 학대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그건 아주 중대한 죄고 중형을 내립니다. 그 어린아이와 결혼하라는 말은 제게 전쟁을 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게 들립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
“사람에게 계급을 부여해 노예를 부리는 것도 나쁘지만 어린아이에게 그런 짓을 하는 건 훨씬 더 나쁜 일입니다.”
[성주님이 사시는 세상의 제도는 너무 어렵네요. 저흰 꿈에서조차 지금 저희가 하는 행동이 죄라고 여겨본 적이 없었거든요.]
“네. 어렵습니다. 우리도 그런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천, 수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싸워서 이루어 낸 결과죠.”
[그렇군요.]
할 말이 있는데 참고 있다는 듯이 입을 오물거리던 퍼거슨과 에릭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눈빛이 흔들린다.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너무 당연한 말이고 생각이지만 퍼거슨과 에릭 입장에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도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행동이 어떠했는지 인지하는 듯했다.
[전쟁이 나고 시대가 어려워지면 힘없는 노인과 여자, 아이들이 시련과 고난을 겪고 수탈을 당하는 세상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슬퍼하면서도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
[저흰 그 전쟁을 피하고 싶어서 그랬던 겁니다. 성주님께서 린드 공주와 결혼을 해 왕국의 왕이 되면 우리 국민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스카이 캐슬 연합의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건 왕이 되지 않아도…….”
[네. 알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신은 굳이 왕이 되지 않아도 우리가 바라는 삶을 살 수 있게 이끌어 줄 분이라는 걸.]
“……?”
퍼거슨과 에릭.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온 기사들이 날 그윽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알렉산드로 퍼거슨.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렉산드로 에릭.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사자단이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퍼거슨을 시작으로 켄트 왕국의 기사단이 무릎을 꿇으며 내게 기사의 예로 인사를 해 왔다.
“퍼거슨 님. 제게 무릎을 꿇었다는 건 앞으로 충성을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네. 그렇습니다. 앞으로 스카이 캐슬 연합의 검이 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첫 번째 명령을 내리죠. 귀족들이 받은 작위 문서와 노예 문서를 모두 수거해 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퍼거슨과 기사단이 일어나 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도심 속으로 뛰어갔다.
켄트 왕국을 수호했던 군부가 스카이 캐슬 연합에 완전히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 * *
[성주님, 작위 문서와 노예 문서를 가져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바로 태워 버릴까요?]
“아니요. 일단 여기 있는 이부성 헬퍼한테 넘겨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퍼거슨이 수천여 장에 이르는 문서들을 이부성에게 넘겨주었다.
인구를 다 합쳐봐야 이만에서 삼만 정도 되어 보였는데 생산 능력도 없는 귀족들의 숫자가 꽤 많았다.
“부성아, 일단 왕실부터 다녀올 테니 넌 사람들 좀 전부 모아 줘. 전부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리자.”
“네, 알겠어요.”
노예 문서를 건네받은 이부성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계급 제도를 없앤다고 백번 얘기를 하는 것보다 눈앞에서 한번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물론 그렇다 해도 단숨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눈앞에서 태워버리면 사람들이 적응하는데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듯했다.
“퍼거슨 님, 안내 좀 부탁드릴게요.”
[린드 공주를 만나 보시려는 겁니까?]
“네.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노예 문서까지 불태워 버리면 그 어린아이가 겁을 먹을 테니. 가서 달래줘야죠. 그리고 왕실 역시 같이 없애야 하기도 하고요.”
[왕실을 없애신다고요?]
“네. 그래야 진짜 계급 제도가 없어지는 거니까요.”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퍼거슨은 계급 제도를 없애는 데 찬성했지만, 왕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허나 그의 뜻은 말이 되지 않았다.
계급 제도를 없애려면 왕이라는 계급부터 없애야 하는 것이었다.
노예들이 미치지 않는 이상 짐승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계급 제도를 스스로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계급 제도를 완전히 없애려면 애초에 만들었던 왕과 귀족이라는 계급 자체가 남아 있으면 안 되었다.
허나 지금처럼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노예 문서까지 불태워 버리면 그 어린아이에겐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게 분명해 난 그게 마음이 쓰였다.
“……린드 공주를 만나 직접 공주라는 계급을 떼어주고 스스로 살고 싶은 삶을 살게 해 주려고요. 그편이 퍼거슨 님도 마음이 편하지 않나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괜찮다고요? 두 번의 전투로 왕족과 귀족들을 처형해 공주 입장에선 퍼거슨 님이 원수나 다름없을 텐데요?”
[아닙니다. 린드 공주는 전 국왕과 권력을 잡고 있던 왕족들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방계여서 애초에 교류도 없었고 일반 귀족에도 못 미치는, 아니 평민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두 번의 혈사에도 무사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고요.]
“그래요? 그럼 더 잘됐네요. 왕실에서 나가 예전처럼 다시 평범하게 살라고 하면 될 테니까.”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퍼거슨을 쳐다봤다.
두 번의 전투로 청방을 따르고 린드 공주를 여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왕족과 귀족들 대부분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그 선두엔 퍼거슨과 에릭이 있었다.
린드 공주 입장에선 두 부자가 자신의 친척들을 죽인 원수나 다름없기에 그것이 염려됐는데 이제 보니 말만 왕족이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닌 듯했다.
짐작건대 켄트 가의 명맥을 유지하고 국민을 통치하기 위한 상징적인 존재가 필요해 명분 때문에 앉혀 놓은 듯했다.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왕성에 도착하자 마치 내가 이곳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경비병들이 군례를 올리고,
[린드 공주를 뵈러 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기사들이 달려 나와 길을 안내해 주었다.
연달아 두 번이나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도 왕실 안은 그새 건물들이 새로 올라오고 있었고 깔끔히 청소되어 있었다.
‘참 내! 이 돈과 인력으로 영지 공사에 투자했으면 훨씬 기간이 단축되겠구먼.’
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왕실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기사와 경비병들은 물론이고 시녀와 같은 궁인들이 꽤 많이 보였다.
[공주님을 뵈러 왔다. 안에 알려라.]
[네. 알겠어요. 공주님, 퍼거슨 공작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한 방에 도착하자 화려한 옷과 액세서리를 한 앳된 소녀 한 명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날 빤히 쳐다봤다.
[여왕으로 추대하겠다고 하더니 절 보고도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는군요.]
[죄송…….]
“이 땅에 이제 계급은 없다. 앞으로 그 누구도 내게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는 인사를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결국 그렇게 됐군요.]
평민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하더니 그새 공주 놀이에 적응을 했는지 린드 공주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그런데 그때,
-뒤로 물러나.
‘응?’
-저 아이가 들고 있는 지팡이랑 착용하고 있는 귀걸이, 반지, 팔찌, 목걸이에서 꽤 강력한 힘이 느껴져.
‘아티팩트인가?’
-마나는 아닌데…… 잘 모르겠어.
운디네가 형상화되어 나타나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내 앞을 막아섰다.
[정령이군요. 역시 당신이었군요.]
“……?!”
[당신이 올 줄 알았어요. 그분이 말하길 정령들과 함께 찾아온 사람이 올 테니 그자가 오면 마왕과 마족들을 물리칠 수 있게 도우라고 하시더군요.]
불쾌해했던 것도 잠시 운디네를 본 린드 공주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날 그윽하게 쳐다봤다.
-신성력이야!
‘신성력?’
-응. 저 지팡이와 액세서리에 신의 축복이 깃들여져 있어.
‘신의 축복? 나처럼 세계수 같은 존재한테 받은 건가?’
-그건 모르겠어. 너처럼 직접 신을 만나 축복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무구에 각인된 신성력으로 교감을 한 건지는.
운디네가 의문을 넘어 경악하는 표정을 지으며 린드 공주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부들부들.
[어떻게…….]
퍼거슨이 마치 오한이라도 걸린 사람같이 몸을 부르르 떨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반짝반짝.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린드 공주가 들고 있는 지팡이와 악세서리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카시오페아 님의 음성을 들으신 겁니까?]
[네. 애석하게도 왕실이 무너진 이제야 그분이 응답해 주셨네요.]
[……!]
[퍼거슨 경,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켄트 가는 무능했고 또 타락했으며 국민의 고난을 외면했습니다. 켄트 가에 등을 돌렸다 해서 당신에게 벌을 내릴 생각은 없어요.]
린드 공주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나 부탁이 한 가지 있어요. 계급 제도를 없애고 왕실의 모든 권한을 가져가도 좋으니 이름만 지키게 해 주세요.]
[이름이라 하시면…….]
[아무런 권한이 없어도 좋으니 켄트 왕국의 왕족으로서 살게 해 주세요.]
[하아…….]
퍼거슨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저 무구들과 켄트 왕국의 역사에 뭔가 사연이 있는 듯했다.
“불가하다. 나를 도와줄 필요도 없고.”
[전 신의 선택을 받았어요. 신의 선택을 받은 제가 직접 도와준다고 하는데도 그런 작은 부탁도 못 들어준다는 건가요?]
“나 안 도와줘도 되니까 그 자리에서 내려와서 조용히 살아. 아니 애들이면 애들답게 고무줄놀이도 하고 공기놀이도 하면서 밖에 나가서 뛰어놀아. 그리고 그 말투 좀 고치고.”
[전 당신을 도우라는 메시지를 들었다고 했어요. 그런데도…….]
“나 무교야. 그분이라는 존재가 어떤 말을 했던 관심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애들은 애들답게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거야. 이제 열두 살 먹은 어린애가 무슨 마왕이랑 마족이랑 싸우겠다는 거야.”
[……!]
[……!]
“안 그래도 모진 풍파 다 겪으면서 겨우 목숨을 연명한 아이인데 좀 편안하게 살게 좀 놔둡시다. 다른 사람들 많잖아요.”
[……?!]
[……?!]
내가 지붕을 보며 혼잣말을 하자 퍼거슨과 린드 공주가 세상 어이없는, 아니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성주님, 그러다 신의 노여움을…….]
“무교라니까요. 아니 이 세계에 신이 있다 치고 그렇게 마왕과 마족들이 꼴 보기 싫으면 직접 와서 처단하면 되지. 왜 이런 어린애한테 싸우라고 시킵니까? 전 그것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창가를 바라봤다.
“신은 얼어 죽을! 진짜 신이 있으면 번개라도 한번 내려쳐 보던가.”
우르릉 쾅쾅!
우르릉 쾅쾅!
“……?!”
“……?!”
ㅅ…발 깜작이야.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창가로 걸어가 고개를 내밀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하늘 어디를 봐도 먹구름 하나 없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내려쳤다.
“한 번 더 하면 믿을게요!”
난 하늘을 보며 원모얼타임을 외쳤다.
한 번 정도는 우연히 타이밍이 맞을 수도 있으니까.
“괜히 긴장했네.”
그리고 역시나 번개는 더 이상 치지 않았다.
[당신 지금 신을 부정하시는 건가요?]
“부정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야. 한참 뛰어놀아도 모자를 나이에 무슨 마족들과 싸우겠다는 거야. 스무 살 넘어서 하자.”
[스무 살이요?]
“스무 살 넘어서도 그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싸우게는 해 줄게.”
[그치만 전…….]
“우리 세계에도 종교의 자유는 있어. 네가 신을 믿고 의지하는 건 하고 싶은 대로 해. 근데 나를 돕는 건 안 돼. 물론 왕실을 유지하는 것도.”
난 린드 공주를 보고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운디네의 말에 의하면 세계수도 반신이라고 했다.
허나 그 존재도 자신이 머무는 일정 영토만 지킬 뿐 마왕과 마족들을 어쩌지는 못했다.
짐작건대 켄트 왕국 국민이 믿고 있는 신도 그리 전지전능하지는 않은 듯했다.
물론 고사리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마족과 몬스터와의 싸움이 그리 녹록지는 않았지만 열두 살 먹은 여자아이와 전장을 함께 누비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성주님, 린드 공주님이 들고 있는 지팡이와 착용하고 있는 액세서리 모두 켄트 왕국의 초대 여왕님이었던 케라시스 님의 성물입니다.]
“성물이요?”
[지난 수백 년 동안 빛을 잃어 결국 마족에게 패해 영토를 버리고 이곳까지 도망쳐왔지만, 만약 그때 빛을 되찾았다면 저흰 영토를 지켰을 겁니다.]
“성물 몇 개 빛을 되찾았다고 마족과 그 많은 몬스터들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요?”
[녹습니다.]
“네?”
[기록에 의하면 저 빛에 닿으면 데스 나이트고 뭐고 언데드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녹아 버린다고 합니다. 어지간한 상위 마족들과 마물들 역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요. 그리고 카시오페아 님과 교감을 했다면 왕국에 있던 신전도 활성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전이요? 거기에도 뭐가 더 있나요?”
[네. 신전 안의 성물들을 활성화하면 성수를 무한대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퍼거슨이 조심스레 내 소매를 잡고 다시 생각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