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마법 방어 아이템 (7)
[다들 정신 차리지 못해?]
[단장님…….]
[에릭의 세 치 혀에 흔들리지 마라. 우린 자랑스러운 켄트 왕국의 왕실 마법사다. 귀족들이 안에 숨어있든, 도망갔든 우리는 이곳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면 그뿐이다. 모두 죽음이 두려운 것인가?]
[아닙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반 이상 넘어온 것 같더니 마법사들이 다시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곧추세웠다.
[왕실의 배신자가 되어 이 부질없는 목숨을 연명하느니 끝까지 싸우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 나와 함께 죽을 자들은 모두 지팡이를 들어라!]
[싸우자!]
[싸우자! 싸우다 죽자!]
전의를 상실해 있던 마법사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참 미친놈들이었다.
이미 이 전쟁은 우리가 이겼고 저들도 알고 있다.
근데 같이 죽자는 말에 마치 다시 승기라도 잡은 것처럼 모두 신이 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쯧쯧, 어딜 가나 꼭 미련한 사람들이 있다니까.”
[성주님…….]
[성주님…….]
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에릭이 알아서 잘하고 있어 나서지 않으려 했는데 할 말은 해야 할 듯싶었다.
[미련한? 지금 그 말 우리한테 한 것인가?]
“너희한테 한 게 아니라 짐 당신한테 한 거야. 아까 표정들을 보아하니 모두 에릭 님이 말한 것처럼 싸우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는데 왜 똥고집을 부리고 지랄이야. 지랄은! 당신 때문에 다른 마법사들은 항복하고 싶어 하는데 그러질 못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곳에 서 있는 그 누구도 흔들린 적 없다. 더 이상 우릴 모욕하지 말고 돌아가지 않을 거면 그냥 들어와라! 너희에게 켄트 왕국 왕실 마법사단의 힘을 보여 줄 테니.]
짐이 큰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작게 말해도 다 들리는데 다른 마법사들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
찌릿찌릿.
살갗이 따갑다.
참 아둔하고 멍청한 사람들이었다.
살길이 있는데도 그들은 명예롭게 죽자는 말에 한순간에 홀려 버린 듯했다. 아니 아마 꽤 오래전부터 교육을 받아왔을 것이다.
왕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라고.
저들은 지금 자신들의 죽음보다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게 더 두려운 듯했다.
“너희는 왕실과 귀족들을 위해 이 나라와 국민을 배신할 참인가?”
[뭐라?!]
“왕실과 귀족은 나라의 근간이 아니다. 나라의 근간은 국민이다. 국민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 거고 군인은 그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었을 때 명예로운 것이다. 군인이 아니 너희가 목숨을 바쳐 충성을 맹세할 상대는 왕실과 귀족들이 아니라 국민이다.”
[……?!]
“눈이 달렸다면 제대로 뜨고 앞을 봐라. 이 섬에서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고 공사를 하는 이들은 다 평민들과 노예들이다. 저들이 나라의 근간이고 뿌리다. 왕족과 귀족들이 없어도 나라는 유지되고 다시 뽑으면 그만이지만 저들이 없으면 나라는 망한다. 내 말이 틀렸는가?”
[……?!]
“지금 여기서 명예롭게 싸우다 죽겠다고? 개소리하지 마라.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너흰 후세들에게 나라를 망하게 한 역적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기사단과 힘을 합쳐 우리를 견제해도 모자를 판에 서로 싸워서 자멸해 주면 우린 아주 쉽게 이곳을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뿌드득.
뿌드득.
짐과 마법사들이 이를 갈며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부들부들.
부들부들.
다들 분함을 이기지 못해 몸이 떠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이대로 우리와 싸우다 죽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되니 분노와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짐, 이놈아, 어서 지팡이 내려놓지 못해. 살려 주신다잖아.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은겨.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버리면 엄마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 못된 놈아.]
“엄마…….”
[한스. 너도 어서 지팡이 내려놔. 너 죽으면 엄마도 따라 죽을 거야.]
“……?!”
전투 소식을 들은 마을 주민 사람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와 마법사들을 부둥켜안았다.
“여러분, 잠시만요. 여긴 지금 전투 중입니다. 위험해요. 모두 뒤로 물러…….”
“길을 열어 주세요.”
“성주님…….”
“괜찮아요. 저들이 미치지 않는 이상 자신들의 부모와 형제들이 있는 곳에 마법을 난사하지는 않을 테니까.”
“……네.”
“……네.”
그레이 기사단과 마녀 부대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주민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혹여나 저들이 공격할까 염려가 되는 모양인데 난 그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싸움은 끝났다. 우리의 승리였다.
에릭과 대화를 시작하며 전투가 중단됐을 때부터 마법사들은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들도 에릭처럼 오랜 시간 동료로, 그리고 또 때로는 친구처럼 지낸 사람들과 싸우고 싶지 않아 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에릭 님. 안으로 들어가서 귀족들을 체포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에릭 이새끼. 너 거기 서지 못…….]
[가만히 있어. 이놈아.]
[엄마. 놔 봐. 저놈이…….]
[가만히 있으라고 이놈아.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
[……?!]
에릭과 기사단이 건물 내부로 달려갔지만, 그 어떤 마법사도 그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아빠!]
[……?!]
와락.
[엘리스 네가 여길 어떻게?]
[여보…….]
[하아…….]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마. 내가 아빠 보고 싶어서 오자고 조른 거니까. 히히.]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자식들의 얼굴을 보고 또 품에 안은 마법사들은 마치 발에 봉인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짐. 지금 앞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들이 충성하고 지켜야 할 나라입니다.”
[……?!]
주르륵.
주르륵.
죽음을 결심했다가 가족을 만나서일까.
글썽글썽.
글썽글썽.
마법사들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또 흐르고 있었다.
“가죠. 우린.”
“네?”
“네?”
“저희가 없어도 알아서 잘할 것 같네요. 우린 숙소로 돌아가자고요.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괜히 아버지가 보고 싶네요.”
“아…… 네.”
난 저택을 뒤로하고 병력과 함께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스카이 캐슬 만세. 안해용 성주님 만세!]
[스카이 캐슬 만세. 안해용 성주님 만세!]
우리가 걸어가는 길목과 뒤편에서 켄트 왕국 국민의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개멋있어.”
“네?”
잘못 들었나?
“앗, 죄송해요.”
아니 제대로 들은 모양이다.
최은빈이 얼굴이 잔뜩 붉어져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너무 멋있어서 저도 모르게 교양 없게 얘기를 했네요.”
수천여 명, 아니 수만여 명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복귀를 하다 보니 많이 흥분한 모양이었다.
“해용이 형, 우리 조금만 천천히 걸어가면 안 돼요?”
“힘들어?”
“이 정도로 힘들겠어요. 그냥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어서요. 저 초등학교 운동회 나가서 100m 달리기 나갈 때 빼놓고 사람들에게 이리 환호받은 적 처음이거든요.”
“그래.”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늦췄다.
하몽과 최은빈, 조성태, 이부성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걷고 있는 지휘부들은 물론이고 뒤따라오는 헌터들마저 모두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날 그윽하게 쳐다봤다.
* * *
“해용이 형, 켄트 왕국 사람들이 오셨어요.”
“들어오시라고 해.”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퍼거슨과 에릭, 짐이 내 숙소에 찾아왔다.
“뒷정리는 잘하셨습니까?”
[네. 청방과 손을 잡고 반역을 일으킨 귀족들은 물론이고 그동안 국민을 수탈했던 자들 모두 잡아들여 처형했습니다.]
“처형이라 하면?”
[모두 죽였습니다.]
“재판도 없이요?”
[제가 했습니다.]
“아…….”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려두면 후환이 될 것 같아 처형한 건데 다른 생각이 있으셨던 건가요?]
“그게 아니라 저희 세계에서는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그렇게 바로 사형을 시키지는 않거든요.”
[그럼?]
“헌법을 만들어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는 기관이 따로 있어요.”
[아, 그런 제도라면 저희도 있긴 했지만, 그것들 역시 귀족들이 주관해서…….]
“네. 이해합니다. 마음 쓰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
털썩.
퍼거슨과 일행들이 별안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국민과 가족이 나라다. 계급 제도가 없는 것도 그렇고 지난 밤 짐에게 했던 성주님의 말씀을 다 전해 들었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패악질을 부려 귀족들을 모두 죽이긴 했지만 그로 인해 왕국 운영이 어렵게 됐습니다.]
“흠…….”
난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퍼거슨을 쳐다봤다.
가르침을 달라는 그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몽 님에게 들었습니다. 엘프는 물론이고 오크들까지 스카이 캐슬 연합에 편입되어 있다고. 저희도 그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일원이 되고 싶다고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건가요?”
[네. 알고 있습니다. 저희를 이끌어 주십쇼.]
“먼저 그렇게 나오신다면 저희야 마다할 이유가 없긴 한데…….”
[감사합니다. 행여나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군요. 그럼 혼례 준비는 저희 쪽에서 준비하겠습니다.]
“혼례요?”
[만행을 부렸던 왕족과 귀족들의 숙청으로 대부분 후련해하고는 있지만 불안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왕실이 안정되어야 국민도 안심할 겁니다. 린드 공주님께서도 허락하셨으니…….]
“잠시만요. 잠시만.”
난 손사래를 치며 퍼거슨의 말을 끊었다.
일원이 되겠다고 해서 허락을 하려고 하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요상했다.
“지금 저한테 린드 공주랑 결혼을 하라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지금 남은 왕족은 린드 공주님만 남아계시니 그분하고 혼례를 올리면 성주님께서 왕국의 왕이 되실 수 있습니다.]
퍼거슨이 고민도 망설임도 없이 날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결혼할 사람 있는데요?”
[괜찮습니다. 린드 공주님도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신다고 했고 후궁이 아니 2왕비로 인정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니, 아니. 제가 안 괜찮다고요? 왜 제 의견은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제 혼례를…….”
[저희를 이끌어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죠. 근데 결혼을 하겠다고는…….”
[결혼해야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스카이 캐슬 연합에 가입을 시켜준다고 했지. 왕이 되겠다고는 한 적이…….”
[저희를 이끄시려면 왕이 되셔야 합니다. 물론 귀족과 평민, 노예 계급은 차차 없애나가면 되겠지만 왕실은 다릅니다. 성주님 말씀처럼 국민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 것도 맞지만 왕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켄트 가의 핏줄이 이어지지 않으면…….]
“잠시만요. 잠시만.”
난 다시 한번 손사래를 치며 퍼거슨의 말을 끊었다.
분명 통역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