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마법 방어 아이템 (6)
앉아서 천리를 본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노예 출신 사람들의 마음을 얻자 비토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내게 전부 다 보고가 올라왔다.
귀족들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나 있는지. 심지어 귀족들이 자신의 부인과 한 달에 몇 번 관계를 맺는지 그 횟수까지 알게 될 정도였다.
“성주님, 귀족파를 이끄는 게링 공작이 위장하고 감옥에 직접 찾아와서 청방 길드의 권혁을 만나고 갔다고 합니다.”
“권혁을 만났다고요?”
“네. 권혁한테 퍼거슨 공작을 제거하고 우리를 몰아내 줄 테니 자신들과 함께하자고 제안을 한 것 같습니다.”
“아주 죽여 달라고 용을 쓰고 있군요.”
뿌드득.
난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만해선 싸우지 않고 좋게, 좋게 가려고 했는데 저들이 선을 넘어 버렸다.
“성주님, 결정하셔야 합니다. 지난번에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그레이 기사단이 강하고 마녀 부대가 성장했다고 해도 게링과 그의 휘하 마법사들 역시 수십 년 동안 마족과 싸웠던 백전노장들입니다. 저들에게 선제공격을 받으면 우리도 청방처럼 한순간에 제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네.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마음의 결정을 했으니. 영지에 연락해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출동시키라 하고 하몽 님과 그레이 기사단, 마녀 부대는 저를 따라오세요.”
“지금 바로 게링 공작을 치시려는 겁니까?”
“네.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저하나 어찌 되는 건 무섭지 않지만 만에 하나라도 여기서 있었던 일이 청방 본부나 중국에 알려지면 우리는 물론이고 스카이 캐슬과 대한민국까지 곤란한 일을 겪을 수 있으니.”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병력을 이끌고 어둠을 틈타 게링 공작이 머무는 저택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저들이 더 세력을 모으기 전에 지금 처단을 하는 게 현명할 듯했다.
-멈춰. 위험해!
‘응?’
-저택 내부에서 오백 명 이상의 마나가 느껴져.
‘오백 명이나?’
-모두 C급 이상이야. 그리고 넓게 퍼져있긴 하지만 인근 주택에서도 그와 비슷한 숫자의 마나가 느껴지고 있어.
게링 공작 저택 근처에 도착하자 운디네가 형상화되어 나타나 내 앞을 막아섰다.
‘한발 늦은 건가?’
내가 마음의 결정을 못 하는 사이 저들은 이미 언제든 전쟁을 치를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해 놓은 모양이었다.
-함정일 수도 있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만 제압하고 배를 탈취해 청방 본부에 전달하면 스카이 캐슬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젠장!”
난 낭패 어린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때,
우르릉 쾅쾅.
우르릉 쾅쾅.
청방 길드 헌터들을 가둬 놓은 서쪽 섬에서 불길이 치솟고 커다란 폭음 소리가 들려왔다.
[성주님, 우리가 한발 늦은 것 같습니다. 저쪽에서 이미 청방 길드 헌터들을 탈출시킨 것 같습니다. 퇴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방 길드가 탈출해도 아만티움 배가 없으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으니 일단은 몸부터 피하시고 후일을 도모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몽과 지휘부들 역시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불길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때,
“멈춰라!”
[에릭입니다.]
“……?!”
후방에서 몸에 피 칠갑을 한 수백여 명의 기사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미 한바탕 전투라도 치른 듯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기습이라도 받은 건가요?”
[아닙니다. 저희가 기습을 했습니다.]
“에릭 님이 먼저 기습을 하셨다고요?”
[죄송합니다. 연락을 먼저 취했어야 했는데 상황이 다급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에릭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버지가 성공하셨나 보네요.]
“그게 무슨 말이죠? 뭘 성공했다는 건가요?”
[게링 공작이 청방 길드를 탈출시키려 한다는 첩보가 있어 아버지가 왕실 근위 기사단을 이끌고 가셨습니다.]
“……?!”
[불길이 치솟은 걸 보니 다 죽인 것 같군요.]
“다 죽었을 거라고요?”
[살려 놓으면 두고두고 해가 될 것 같다고 다 죽이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하면 불을 지를 테니 저한테 바로 게링 공작 저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아…….”
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에릭을 쳐다봤다.
몬스터와는 제법 많이 싸워 봤지만, 인간과 제대로 전쟁을 해 보지 않은 나와 달리 수없이 많은 전쟁을 겪은 퍼거슨과 에릭은 이미 결단을 내린 것은 물론이고 몸을 움직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행이네요.”
난 고마움과 씁쓸함이 교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내가 너무 안일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장 한복판에 서 있었으면서 너무 낭만적으로 처신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저 안에 천 명이 넘는 마법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상황을 더 살펴보고…….”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침 저기 오는군요.]
에릭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들의 일행을 쳐다봤다. 아니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일행들 뒤에 다시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엉금엉금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서 오세요. 아저씨. 고맙습니다.]
[고맙긴. 이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또 할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말만 해.]
투구와 갑옷, 장갑, 각반, 부츠, 방패…….
뒤이어 온 사람들의 손과 수레엔 사자 문양이 새겨진 무구들이 들려있었다.
무구들을 가지고 온 사람들을 살펴보니 모두 마을에서 장사하거나 왕실에서 일하는 평민들과 노예들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랑 가족들입니다. 공작이 되어 남들이 볼 땐 서로 데면데면하게 대했지만, 우리끼리 있을 땐 예전처럼 정을 나누고 친구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아…….”
[같이 들어가실 거면 이것들을 입으시면 됩니다. 마족들과 몬스터에 대항하며 수백 년 동안 켄트 왕국에서 개발하고 발전시킨 마법 방어 무구들입니다.]
“헐…….”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가가 무구들을 살폈다.
효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카프리가 만든 무구와 비교해서도 뒤지지 않는 기운이 느껴졌다.
[성주님께서 마법사들을 상대하는 아이템을 요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진즉에 드렸어야 했는데 이래저래 할 일도 많고 반강제적으로 동맹을 맺다 보니 저희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해해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이것들 전부 우리가 입어도 되는 건가요?”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에릭이 나눠준 무구를 쳐다봤다.
설명을 듣자 하니 영토를 잃고 이곳에 쫓겨 오면서도 지키고 챙겼던 켄트 왕국의 보물들인 듯했다.
마법 방어 아이템이 생겨 좋은 것도 있지만 이런 귀한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보니 퍼거슨과 에릭이 우리에 대한 신뢰가 많이 올라간 듯했다.
[저희는 보시다시피 이미 입고 있습니다.]
“네, 알겠어요. 성태 씨!”
“네. 성주님.”
“인원을 선별해서 무구를 착용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난 뒤로 물러나며 그레이 기사단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오백 벌 정도 되려나.
기사단 모두에게 무구를 입히지 못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에릭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 정도만 돼도 충분히 게링과 왕궁 마법사단을 제압할 수 있을 듯했다.
[저희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이대로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마법사들이라면 몰라도 저들의 공격 패턴은 저희가 다 간파하고 있으니까요.]
“……네.”
에릭과 기사들이 마치 제식훈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와 열을 맞춰 게링 공작 저택 정문으로 걸어갔다.
“#$#$#$#$#$#$파이어볼!”
“#@$##$##$#$파이어 스톰!”
.
.
.
저택 위에 있던 마법사들이 마법 주문을 영창하며 기사단에게 화 속성 마법을 난사했다.
“하몽 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슈우웅.
슈우웅.
“헐…….”
저택 안에서 날아오는 마법은 하몽과 마녀 부대 헌터들이 사용하는 마법 못지않게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는데 기사단 근처에 다다르자 마치 바닷물에 빠진 성냥개비 불 마냥 힘없이 모두 꺼져버렸다.
[이곳에 오기 전 제가 얘기 드렸지만 켄트 왕국은 기사의 나라였습니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제국과 왕국의 기사단과 마법사들은 같은 국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서로를 라이벌로 여기고 견제하고 싸우면서 발전했지만 켄트 왕국 주변에는 유독 마법을 부리는 몬스터들이 많아 기사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우세했습니다.]
하몽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미티어 스트라이크!”
“저건 좀 위험하지 않나요?”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진다.
일전에 비토섬에 지어진 청방 길드의 본부 건물과 식량 창고를 부숴 버린 대 광역 마법이었다.
하지만,
“사자단!”
“충!”
슈우웅.
슈우웅.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미티어 스트라이커는 기사단에서 뿜어지고 있는 붉은색과 파란색 빛과 닿자 작은 폭발만 일으키고 소멸하였다.
[마법사단은 들어라. 투항해라. 우리는 수십 년간 이곳에서 함께 먹고 자고 했던 형제들이다.][형제들이다!]
[형제들이다!]
[전세는 이미 기울었다. 우리는 더 이상의 헛된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 너희가 원해서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게 아니란 걸 안다. 투항해라. 투항하는 자는 오늘 일로 절대 불이익이 없을 거다.]
[투항해라!]
[투항해라!]
저택 안으로 들어온 에릭은 바로 마법사들을 공격하지 않게 크게 소리를 지르며 항복을 권유했다.
일전에 청방 길드와 전쟁을 할 때도 그렇고 확실히 선동꾼 기질이 있었다.
[개소리하지 마라! 에릭! 너희는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들이다. 죽었으면 죽었지. 너희한테…….]
[우린 나라를 팔아먹은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 일한 만큼 돈을 받고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세상. 짐, 청방과 스카이 캐슬 사람들을 보았지 않았는가. 우린 이곳도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마법 영창을 지휘하던 마법사 한 명이 에릭과 대화를 시작했다.
얼굴은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잔뜩 인상을 찡그렸지만, 눈동자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짐, 비록 소속된 곳이 다르다 하나 너와 난 어렸을 때부터 형제처럼 지내왔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청방에 맞서 같이 힘을 합쳐 싸운 전우였고. 난 너희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웃기는 소리! 나한테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우린 절대…….]
[난 기사다. 기사는 목숨보다 명예를 더 중시한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난 지난 수십 년 동안 내 이익과 곤란함을 면하기 위해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너도 잘 알지 않는가.]
[…….]
[…….]
[게링 공작과 청방과 손을 잡은 귀족들은 죽일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절대 불이익을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앞으로 만들 새로운 세상에 함께 살며 함께 영화를 이루게 해 주겠다.]
[…….]
[…….]
[더 이상 귀족의 꼭두각시로 살지 말자.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전쟁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고 게링과 귀족들은 다 어디 있는가?]
[…….]
[…….]
웅성웅성.
웅성웅성.
에릭과 짐의 대화 내용에 마법사들이 모두 마법 영창을 멈추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에릭의 말처럼 정작 이 싸움을 만든 귀족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