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61화 (161/255)

161화. 해상전 (9)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부들부들.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진정을 시키려 하는데도 마치 오한이라도 든 거와 같이 몸이 진정되질 않았다.

기껏 판을 짜서 청방을 몰아낼 기회를 주었더니 되레 켄트 왕국 사람들이 판을 깨려 하고 있었다.

“유거성호를 가져와야겠네요. 폭죽을 터트리세요.”

[그렇게 되면 저희의 정체가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노출이 되도 어쩔 수 없어요. 이대로 청방의 배가 섬에 들어오면 말짱 도루묵이에요.”

난 애써 분노를 누르며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배에 올라타는 원주민들과 또 그들을 지켜보는 자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항구에는 켄트 왕국의 주민들 수천여 명이 나와 있었지만 단 한 명도 막아서는 이가 없었다.

얼굴에는 모두 슬픔과 분노, 원망 같은 것들이 서려 있었는데 그보다 모두 청방 길드에 대한 두려움과 믿음이 큰 것 같았다.

열 살배기 어린아이들조차 그 모진 훈련을 받으면서도 청방 길드를 몰아낼 방법을 연구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정작 어른들은 이미 청방 길드의 힘에 굴복한 듯했다.

미련한 인간들이었다.

내 이웃들이 산채로 괴물의 제물로 가는 걸 보면서도 자신들도 언제, 어떻게 같은 자리에 설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당장 내 목숨이 안전히 그것으로 안도하는 듯했다.

“유거성호를 불러서 원주민들의 배를 침몰시키고 크라켄을 유인해 청방의 배에 데려가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슈우웅 펑!

슈우웅 펑!

하몽과 엘프들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폭죽을 터트렸다.

{저것들은 뭐야!}

{스카이 캐슬 문양입니다. 저놈들 한국 놈들입니다.}

폭죽을 터트림과 동시에 변신을 풀자 자신들의 배를 항구에 인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청방 길드 헌터들이 우릴 보며 소리를 질렀다.

‘노움!’

-오키. 알았어.

두두두두두두두둥.

두두두두두두두둥.

나의 분노를 느낀 것일까.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노움이 형상화되어 나타나 청방 길드가 자리 잡은 절벽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운디네 너도!’

-응. 알았어.

잔잔했던 바다가 거친 파도를 만들며 그곳을 덮쳤다.

{모두 도망쳐!}

{뭣들 하고 있어. 이 버러지 같은 놈들아. 빨리 공격하지 않고.}

노움과 운디네의 연이은 정령 마법에 청방 길드 헌터들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몽, 마녀 부대!”

[네, 알겠습니다.]

[네!]

“#$###$#$#$미티어 스트라이크.”

“@#@@$#$#$#파이어 스톰.”

우리의 위치를 확인한 청방 길드는 동료들이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도 정열을 정비해 우리가 있는 곳에 공격을 가하려 했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화력을 퍼부었다.

{젠장! 모두 흩어져!}

{군인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저들은 사람이야. 빨리 대포라도 쏘란 말이야.}

SS급 정령사.

현자급 마법사와 엘프들.

A급으로 이루어진 마법사 부대.

갑작스레 강력한 광역 마법을 난사 당해서인지 청방 길드는 쉽사리 우리와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성주님, 얼른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곧 저들한테 포위당하고 말 겁니다.]

하몽이 땀에 흠뻑 젖은 손으로 내 팔목을 붙잡았다.

사십여 명.

일행들 모두 상위 헌터들이긴 했지만,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잠깐 사이에 몰려 있던 청방 길드 헌터 수백여 명의 목숨을 빼앗았는데도 어느새 그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몰려들고 있었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구제 불능이네요.”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켄트 왕국 주민들을 쳐다봤다.

이렇게 한바탕 휘저어 놓으면 한두 명이나마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액션을 취할 법한데 모두 발만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런 샹놈의 새끼들.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이런! 성주님 마나가 차단됐습니다.]

“…….”

“…….”

{이곳에 온 지 벌써 삼 년이다. 우리가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나? 흐흐}

흑마법사 권혁.

착잡한 마음에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중국의 S급 마법사로 알려진 헌터가 수십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순식간에 우리를 감쌌다.

-젠장! 이곳에 커다란 흑마법진이 그려져 있었어.

끈적끈적하고 불쾌함을 유발하는 기운이 땅에서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도시와 항구가 잘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고 도망가기 수월할 것 같아 자리를 잡았는데 저들도 이미 이곳을 파악하고 함정을 파 둔 모양이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언젠가 타국의 헌터들이 이곳에 올 거라곤 예상했다. 그래서 나름 준비해 놨는데 마음에 드나?}

권혁이 우릴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구석에 쥐를 몰아넣고 쳐다보는 고양이라도 된 듯한 표정이었다.

적이지만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쁜 놈들은 대부분 머리가 그리 좋지 않던데 철두철미한 놈들이었다.

{웃어? 지금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지금 너희 발아래 있는 마법진은 발록 님께서 친히 내게 각인시켜 준 거다. 우리 같은 흑마법사가 부리는 게 아닌 이상 그 어떤 마법도 이곳에선 발현이 되지 않아.}

“그래? 그래서 그렇게 여유로웠구나. 근데 이걸 어쩌나? 너희 상대는 우리가 아닌 것 같은데?”

난 빙그레 웃으며 권혁의 뒤를 쳐다봤다.

그의 뒤엔 열 살배기 아이들 수백여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부모님의 징표를 본 아이들이 우리가 혼란을 벌어준 틈을 타 탈출한 모양이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2번 당장 그 자리에서 멈추지…….}

[2번이라고 부르지 마라. 내 이름은 케인이다.]

스으윽.

{컥.}

선두에서 아이들을 이끌고 온 케인은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단검을 쥔 손을 휘둘러 권혁의 팔을 잘랐다.

정말 대단한 스피드였다.

분명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나조차도 순간 그의 움직임을 놓쳤을 정도였다.

스으윽.

{컥.}

[케인 형, 뭐 하는 거야. 고귀하신 청방 헌터들님께서 그러셨잖아. 마법사들을 상대할 때는 우리처럼 이렇게 마나 홀을 단번에 꿰뚫어야 한다고 했잖아.]

스으윽.

{컥.}

스으윽.

{컥.}

아이들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흑마법사들에게 다가가 마나 홀이 있는 심장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흑마법진으로 마법 구현을 봉인했으나 아이들의 육탄 공격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훈련소에 갇혀 마법 교육을 받고 있는지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동안 암살 교육을 받은 모양인지 아이들의 움직임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나도 기억하고 있어. 근데 이놈은 그리 쉽게 죽여 주고 싶지 않았거든.]

[역시 우리 형이네. 그래서 나도 죽이지는 않았어.]

#@#$#$#$#$…… 컥!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내가 그동안 당한 세월이 얼마인데 마법을 쓰게 놔둘 것 같아?]

{커으으으윽.}

권혁의 팔을 자른 케인이 이내 단검을 쑤셔 넣어 벌리더니 이를 부러뜨리며 혓바닥을 잘라냈다.

[첫 번째는 그동안 나와 친구들을 때린 벌이고 지금은 그 세 치 혀로 우리를 속인 벌이야.]

내가 보고 예상한 것보다 그동안 아이들의 분노가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이제 보니 비록 마나 홀이 파괴되었을지는 몰라도 생명을 잃은 흑마법사는 없었다.

아이들은 흑마법사의 마나 홀만 파괴하고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응징을 가했다.

“이렇게 무서운 아이들인지 몰랐네요. 아이들과 붙었다면 우리도 무사하긴 힘들었을 것 같네요.”

[그러게요.]

최은빈과 하몽이 두려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을 쳐다봤다.

빈말이 아니었다.

흑마법사들을 처리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등골이 오싹했다.

독기도 독기지만 청방 놈들이 그동안 정말 훈련을 잘 시켜놓은 모양이었다.

아이 한 명, 한 명 모두가 어지간한 헌터와 붙여 놓아도 지지 않을 만큼 날카롭고 강력한 기세를 뿜어 댔다.

[한스. 어서 애들 데리고 배를 돌려. 이러다 너희 아버지 진짜 돌아가시겠다.]

[응, 알았어.]

케인의 명령에 수십여 명의 아이들이 해안가로 달려갔다.

보아하니 크라켄의 미끼가 되기 위해 배에 올라탄 어른들의 자식들인 모양이었다.

[아빠! 아빠! 돌아오세요!]

[아빠 저희 여기 있어요. 그러니 배를 돌리세요.]

{지, 지금 우리 중국과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권혁의 친위대쯤 되는지 그와 인근 거리에 있다가 마나 홀에 단검이 꽂힌 마법사 하나가 가쁜 숨을 내쉬며 내게 협박해 왔다.

“너희를 건들면 중국과 전쟁을 해야 하는 건가?”

{당연하지. 우리를 이렇게 죽인 걸 알면 정부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흠…….”

{한국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우리 중국이랑 전쟁이 나면 하루도 안 돼서 가루가 될 거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우릴 빨리 치료해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까.}

대국의 국민이라 그런가.

흑마법사들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와중에도 전쟁을 운운하며 날 협박했다.

중국이랑 전쟁하는 건 두렵다. 그럼 그의 말처럼 순식간에 패배를 할 수도 있고 정말 많은 사람이 죽게 될 테니까.

근데 그가 하나 모르는 게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중국 정부가 모르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저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정말 엄청나게 크네요.]

난 빙그레 웃으며 바다를 쳐다봤다. 아니 동쪽 바닷속 대부분을 검게 만든 크라켄을 쳐다봤다.

아이들이 소리 지르는 걸 들은 어른들이 배를 돌려 항구로 돌아오자 내 계획대로 크라켄이 바닷속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며 청방 길드의 배에 다가가고 있었다.

{살려 줘! 저 배가 들어오지 못하면 너희도 무사하지 못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우린 크라켄을 피해서 얼마든지 이 섬을 오고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너흰 이제 그러지 못하겠지. 그리고 크라켄 때문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확인도 못 할 테고.”

{끙…….}

{끙…….}

단검에 꽂혀 놓고도 사나운 기세를 풍기던 흑마법사들이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바다를 쳐다봤다.

청방의 배도 제법 크긴 했지만, 크라켄의 다리 하나와 크기가 비슷했다.

그리고 어느새 크라켄은 서너 개의 다리를 이용해 청방의 배를 감싸고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 계획대로 대어가 청방이라는 미끼를 제대로 물어 버린 것이었다.

[할아버지!]

[그래. 할아비다. 안 그래도 구하러 가려고 했는데 마침 탈출했구나. 자초지종은 나중에 들을 테니 일단 쉬고 있어라. 이제부턴 우리 어른들이 해결할 테니까.]

[네. 흑흑.]

어깨까지 내려오는 흰 머리를 묶고 멋들어지게 턱까지 흰 수염이 있는 할아버지 한 명이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퍼거슨 공작인가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그 뒤는 켄트 왕국의 왕을 수호했던 근위 기사단들입니다.]

하몽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도시를 쳐다봤다.

그곳엔 아직 이곳을 점거했던 청방 길드 헌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들을 향해 두 마리의 사자가 새겨진 망토를 입은 수백여 명의 기사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대로 달려들어 전면전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들도 직감한 것이다.

우리와 아이들이 던진 작은 불씨로 시작한 지금 이 혼란이 스스로 청방 길드를 몰아낼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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