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59화 (159/255)

159화. 해상전 (7)

“오랜만에 나도 낚시 한번 해 볼까?”

떡밥을 잔뜩 뿌려 놓은 바다를 향해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낚싯대를 던졌다.

미끼를 던져 놓았으니 이제 대어가 물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터벅터벅.

털썩.

[구경 좀 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하몽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옆에 걸터앉았다.

짐작건대 납치를 한 아이들한테 또 한 소리 들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아직 그대로인가요?”

[네. 배가 많이 고플 텐데 삼 일째 음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쯧쯧. 죽는 것보다 배고픈 게 더 무섭다고 하더니 엘프들에 대한 원망이 정말 대단한가 보네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들을 잡아다가 모진 훈련을 시키는 청방 길드 헌터들보다 저희를 더 증오하는 것 같더군요. 퍼거슨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부모 모두 비옥한 토지가 있는 대륙을 떠나 이 외딴섬으로 오게 된 것을 모두 저희 엘프 때문이라고 교육한 것 같습니다.]

하몽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다를 쳐다봤다.

아이들이라도 좀 협조를 해줘야 청방 길드를 상대하는 게 좀 수월해질 것 같은데 여의치 않은 듯했다.

“지금 상태에선 크라켄이 와도 문제네요.”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있는 흙을 매만졌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이 섬은 크기가 크고 동, 서, 남, 북으로 울창한 숲마저 형성되어 있었지만, 토양에 염분이 많아 벼농사를 짓기엔 적절치 않았다.

짐작건대 이곳 원주민들은 청방 길드가 오기 전에도 삶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을 듯했다. 그로 인해 식량을 제공해 준다는 청방 길드의 말에 쉽게 동맹을 체결하고 입도를 허락했을 것이고.

그래서 내가 크라켄을 불러들이려는 것이었다.

크라켄이 와서 청방 길드의 배를 난파시키고 바닷길이 막히면 이곳 원주민과 청방 길드 사이의 갈등이 점점 심화할 테니까.

허나 여기서 하나 선결되어야 할 것이 이곳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청방은 물론이고 이곳 원주민들과도 전쟁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싸우는 건 두렵지 않지만 불필요한 전쟁은 피하고 싶었다.

“훈련소에 있는 아이들의 부모부터 납치해 와야 할 것 같네요.”

[부모들을 납치해 오자고요?]

“아무리 강도 높은 훈련과 교육을 받아 육체와 정신력이 강해졌을지 몰라도 아직 애들이잖아요. 엄마와 아빠 말은 들을 거예요.”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동쪽 섬을 쳐다봤다.

연이은 테러로 인해 경계가 삼엄해 위험하겠지만 아무래도 도시에 한 번 더 갔다 와야 할 듯했다.

* * *

“이 집도 아이를 훈련소에 보낸 것 같네요. 체크해 두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시 햄스터로 변신한 우린 도시 속으로 스며들어왔고 어렵지 않게 아이들의 부모를 찾아내었다.

흐느낌과 울음소리가 나는 집에 숨어 들어가 잠시 지켜보면 여지없이 자식을 훈련소에 보낸 부모의 집이었다.

한참 품에 두고 보살필 어린 자식을 남의 손에 뺏긴 부모들은 침대에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흐느끼며 밤을 지새웠다.

[아이들을 훈련소로 보낸 대부분 집에 켄트 왕국 근위 기사단과 마법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무구들이 있습니다.]

“흠…….”

아이들의 부모 집을 살펴보던 하몽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멈췄다.

이제 보니 단순히 마나 감응력이 뛰어난 아이들을 선별한 게 아니라 이곳 병력을 통제하기 위해 볼모 역할까지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네요.”

아이들의 부모 집 인근에는 모두 청방 길드 헌터 복을 입은 사내들이 한두 명씩 감시마저 하고 있었다.

[성주님, 아무래도 부모들을 데리고 가긴 힘들 것 같습니다. 왕실 근위 기사단이면 최하 B급 이상의 상위 헌터들입니다. 납치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저희를 믿고 순순히 따라가 준다는 보장도 없고요.]

“흠…….”

[그리고 설사 순순히 따라간다 해도 감시자들이 있어 이 많은 인원을 동시에 빼냈다간 금방 청방 길드에서 눈치를 챌 겁니다.]

“순간 이동 반지로 어떻게 안 될까요?”

[감시자 중에 흑마법사들이 여럿 보였습니다. 텔레포트 마법 자체가 꽤 상위 마법이라 한두 번은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겠지만 연달아 시전하면 눈치를 챌 겁니다.]

하몽이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들을 험히 다뤄 부모들에게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경계가 너무 삼엄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아이들은 물론이고 이들하고도 다 싸워야 할 것 같은데…….’

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와 청방 길드가 싸움이 나면 아이를 볼모로 잡힌 부모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한테 검을 겨눌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짐작건대 청방 길드에 대항하고 있는 퍼거슨 역시 그래서 테러만 자행할 뿐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을 듯했다.

그런데 그때,

‘이 와중에 고깃국을 끓여 먹는다고?’

방금까지 자식을 보고 싶은 그리움에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집에서 구수한 냄새가 퍼져 나와 코끝을 간질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 주는 부성애와 모성애였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인간이라면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곤 하지만 부모는 달랐다.

“저 집만 한 번 더 살펴보고 가죠.”

[네.]

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냄새를 따라갔고 하몽도 군말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그도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또 고깃국이야?]

[케빈이 올까 싶어서요. 당신도 알잖아요. 우리 케빈이 고깃국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거.]

[당분간 못 온다고 했잖아. 다음 달에나 돼야 올 거야.]

[혹시나 해서요. 당신이 협조적으로 나오니 청방 사람들이 예쁘게 봐줘서 휴가라도 줄 수 있는 거잖아요.]

[……한 번 더 얘기해 볼게.]

[고마워요.]

창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니 40대 초반의 부부가 식탁 위에서 식사를 하는 게 보였다.

여자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에 아주 애간장이 녹는 표정인데 남자는 그게 못마땅한지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했다.

식탁 위에는 두 사람의 밥과 국 말고도 빈자리에 하나씩 더 채워져 있었다.

짐작건대 언제 자식이 돌아올지 몰라 계속해서 저리 빈자리에 음식을 채워 놓았던 듯했다.

그런데 그때,

[이제는 집 안까지 들어와서 감시하는 건가?]

“……?”

[아버지가 찾아오면 내 발로 가서 얘기해 줄 테니 더 이상 내 인내심 자극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나가.]

남편이 살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내가 사람인 걸 눈치챘다고?’

난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난 천장 사이에 숨어 작은 구멍을 통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내 위치를 정확히 캐치한 건 물론이고 변신마저 간파했다.

-소드 마스터야. 조심해.

‘S급이라고?’

-어. 거리를 벌려. 자칫했다간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그 정도야? S급이면 나보다 낮은 거 아니야?’

-등급은 우리보다 한 단계 낮을지 몰라도 무조건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 언제나 방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운디네가 형상화되어 나타나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며 사내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혹시나 했는데 에릭이었구나. 나 기억하겠니?]

[하몽 아저씨? 당신이 어떻게!]

하몽이 변신을 풀고선 사내에게 걸어갔다.

짐작건대 저들이 말한 케빈과 우리가 데리고 있는 케빈이 동일인인듯했다.

그렇다면 저들은 퍼거슨 공작의 아들과 며느리라는 것이었다.

[많이 컸구나. 예전엔 이만했었는데.]

하몽이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가리키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그때 그대로군요.]

챙!

사내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서 하몽의 목에 겨누었다.

[인사는 이쯤 했으면 된 것 같으니 왜 이곳에 왔고 집까지 숨어들어서 감시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들어야겠군요.]

“…….”

“…….”

하몽이 웃으며 인사를 하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던지 사내의 몸에서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여차하면 바로 목이라도 벨 것처럼 공기가 차가워졌다.

[……퍼거슨 님을 뵈러 왔다.]

하몽은 용의 계곡에서 날 만나고 같이 네크로맨서를 해치우고 스카이 캐슬에 합류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일들을 빠짐없이 모두 사내에게 설명했다.

[지금 제 아들을 납치했다는 건가요?]

[납치가 아니라 보호를 하는 거다. 그대로 보내면 아이 신변이 위험할 것 같기도 했고 우리의 정체가 노출될 수도 있었으니까.]

[흠…….]

아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말에 잔뜩 날이 서 있던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흴 도와주겠다는 건가요?]

[협조하면. 근데 만약 지금처럼 계속 날 적대적으로 대한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고.]

하몽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을 어떻게 믿죠?]

[아버지한테 들었으면 알겠지만, 우리 엘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우리와 함께 힘을 합치겠다면 아이들은 우리가 구출해 주겠다.]

[여보, 함께 하겠다고 하세요. 아이들만 무사히 구출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청방 사람들한테 끌려다닐 필요 없잖아요. 흑흑.]

하몽의 설명을 들은 여인이 사내의 팔목을 잡고 서럽게 눈물을 토해냈다.

내 짐작대로 아이들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청방 길드 헌터들에 의해 끌려다녔던 모양이었다.

[제가 직접 아이들을 만나 봐야겠습니다.]

“그건 힘들 것 같네요. 보아하니 제법 성취가 높으신 분 것 같은데 청방에서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하고 있을 겁니다. 당신이 직접 움직이면 자칫했다간 일을 그르칠 수가 있습니다.”

하몽을 따라 변신을 푼 난 사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직접 우리와 함께 가서 케빈을 설득해 준다면 일이 편하긴 하겠지만 너무 거물이라 같이 그를 데리고 가는 건 너무 위험할 듯했다. 혹여나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적들이 확인차, 집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

“케빈이 이 고깃국을 좋아했나 보네요. 이것만 조금 챙겨 주세요. 그리고 혹시 어머니와 케빈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나 징표 같은 것은 주면 더욱 좋고요. 그럼 제가 그걸로 케빈을 설득해서 이리로 데리고 와 볼게요.”

[정말요? 정말 케빈을 보게 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가,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금방 가져올게요.]

여인이 자리에서 부랴부랴 일어나 미역국을 옮겨 담고 방에 들어가 이불과 베개를 가져왔다.

[우리 케인이 어렸을 때 쓰던 침구류에요. 이 이불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해 친구네 가서 잘 때도 꼭 들고 다니던 거예요.]

“고맙습니다. 이거면 충분하겠네요.”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미역국과 침구류를 건네받았다.

직접 함께 가지 못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이 정도면 케인에게 자신의 부모와 우리가 한편이 됐다는 걸 믿게 할 수 있을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