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해상전 (4)
{아이들 모두 데리고 나와.}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한 명, 두 명, 이백…… 육백육십육 명.
중국의 S급 헌터로 알려진 권혁과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엄청난 인원의 아이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열 살에서 열세 살.
높게 쳐줘도 아직 중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 어린아이들 같은데 군대 훈련소에 입소한 군인들보다도 더 훨씬 빠르게 오와 열을 맞춰 정렬했다.
하루 이틀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나이가 찬 스무 살 이상의 성인들조차 훈련소 내내 제식 훈련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아이들은 오랫동안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로 인해 난 앞줄과 옆줄을 잠깐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금세 인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칠백칠십 번이 탈영했다가 고블린한테 잡혀 왔다. 동료들을 배신하고 이곳을 이탈한 죄는 죽음뿐이지만 너희에게 칠백칠십칠 번을 살릴 기회를 주겠다.}
“…….”
“…….”
{현재시간 21:05분. 현 시간부로 모두 남쪽 숲으로 들어가 해가 뜨는 05:30분까지 버텨라. 그럼, 여기 누워 있는 칠백칠십칠 번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휘이익.
휘이익.
권혁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말을 했고 아이들은 마치 기계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쪽으로 달려갔다.
고블린에게 잡혀 온 아이처럼 다른 아이들의 몸에도 마법진과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다.
고문이나 학대를 받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이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성주님, 주변을 살펴보니 권혁을 포함해서 B급 이상의 헌터 백여 명이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배에서 보았던 건물들이 몰려 있는 곳은 얼추 4시간 정도 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 정도 인원이면 기습만 잘하면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겠네요.”
“네. 권혁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하몽 님과 성주님이 계시니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흠…….”
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최은빈과 마녀 부대를 쳐다봤다.
상대의 전력이 예상외로 높긴 했지만 우리는 엘프들을 제외하고도 A급 헌터만 스물한 명이었다.
아직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을 때 기습을 어렵지 않게 제압을 할 수 있을 듯했다.
[청방 길드 헌터들이 문제가 아니고 아이들이 문제입니다. 청방 길드 헌터들을 제압했을 때 아이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요.]
“네. 저도 그 부분이 걸리긴 합니다.”
난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이 달려간 남쪽 숲을 쳐다봤다.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이곳으로 와 서 훈련을 받고 있을 거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짐작건대 대부분 강제로 이곳에 끌려 왔을 가능성이 컸지만, 아이들의 몸놀림을 보니 이미 청방 길드의 훈련과 교육에 적응한 듯했다.
최악의 경우 청방 길드 헌터들을 제압해도 아이들이 우릴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을 하거나 본진으로 달려가 지원 요청을 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얼핏 보긴 했지만, 아이들 대부분이 마나를 느끼고 이미 몸에 마나 홀을 만들었습니다.]
“저 어린아이들이 모두 각성자라는 말인가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오랜 훈련과 교육을 통해 마나를 느낄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타고나길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정도 전력이면 우리 연합의 길드 한곳과 전투가 벌어져도 서로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하몽 역시 나와 같은 걱정을 하는 듯했다.
그는 우리 연합 한 군대와 전투가 벌어지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건 우리에겐 해당하지 않았다.
청방 길드 헌터들과 함께 상대하려면 애를 먹긴 하겠지만 지금 마음을 먹고 각개 격파를 하면 아이들 역시 쉽게 제압할 수 있을 듯했다. 헌데 그도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나이가 차고 정신적으로 성숙해져 자신의 선택과 판단으로 이곳에 머무는 청방 길드 헌터들을 제압하는 건 부담이 없었지만, 아이들은 아니지 않은가.
이계의 아이들이든, 중국의 아이들이든. 아직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에게 손을 대는 건 가슴이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몽 님은 동쪽으로 가서 청방 길드 본진의 병력과 인원을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퍼거슨과 이곳 대륙에서 이전한 사람들의 거취도요.”
[네, 알겠습니다.]
“최은빈 부대장은 저와 함께 아이들을 따라가 상태를 확인해 보죠.”
[네, 알겠어요.]
하몽과 엘프들은 동쪽으로.
그리고 나와 마녀 부대는 남쪽으로.
우린 인원을 둘로 나눠 일단 정보를 모으는 데 주력했다.
아직은 싸우기보다는 최대한 존재를 감추고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으고 나서 움직이는 게 좋을 듯했다.
* * *
{젠장! 탈영하다가 붙잡히면 그냥 죽이면 되지. 왜 어울리지 않게 선심을 베풀어서 우리까지 이 고생을 시키는 거야.}
{내 말이. 사방이 막혀 있는 섬에서 도망가면 어디를 도망간다고. 바보 같은 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성질을 부리고 그래. 괜한 일에 열 내지 말고 다들 와서 이거나 먹어. 비록 잠자리는 불편하게 됐지만, 덕분에 고기는 먹을 수 있게 됐잖아.}
아이들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자 작은 동굴 앞에 십여 명의 아이들이 모닥불을 만들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늑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숲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아이들은 불을 지펴 체온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멧돼지 새끼마저 잡아 와 뜨거운 물을 부어 털을 뽑으며 식량까지 구했다.
‘중국 아이들인가?’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니 언어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지구에서 넘어온 듯했다.
마치 훈련소처럼 번호로 서로를 부르긴 했지만 같은 곳에서 온 동질감으로 인해 팀을 짜서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기껏 주변에 있는 늑대인간과 타란툴라를 해치웠더니 쥐새끼들이 가장 안전하고 따듯한 곳에 자리를 잡고 고기마저 구워 먹으려고 하고 있네?]
노랑머리와 파란 눈을 한 또 다른 아이가 스무 명의 아이들을 이끌고 와서 중국 아이들을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다.
[곱게 다른 데로 갈까? 아니면 이곳에서 죽여줄까?]
{허, 허락해 주면 다른 데로 갈게.}
[좋아. 허락할게.]
{고마워.}
[멧돼지는 놓고 가. 너희 목숨값 대신 받는 거니까.]
{……그래.}
기껏 잠자리와 먹을 것을 구했던 중국 아이들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도망치듯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골치 아프게 생겼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창 피시방에 가서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학원에 가서 공부해야 할 어린아이들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으며 죽고 죽이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게 말투와 행동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구백구십구 번.
중국인들을 이끄는 아이의 번호는 아까 광장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숫자보다 훨씬 큰 숫자였다.
짐작건대 내가 본 아이들이 전부가 아니거나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다분했다.
[형,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있을 거 아니지?]
[이대로 안 있으면 어떡하자고? 지금 린드를 구하기라도 하자는 거야?]
[방법이 없을까? 우리야 이미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됐지만 린드는 버텨내지 못할 거야.]
[없어. 우리 힘으론 절대 흑마법사를 이기지도 못하고 도망갈 수도 없어. 그러니 너도 포기해. 린드를 구하겠다고 우리까지 다 죽을 순 없잖아.]
[형…….]
도망을 갔다가 잡혀 온 아이와 원래 아는 사이인지 중국인 아이들에게 자리를 빼앗은 아이들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북쪽을 쳐다봤다.
[그만해. 형이 독하게 마음먹으라고 했잖아. 그런 약한 마음을 먹으면 흑마법사가 아니라 다른 아이들한테 먼저 죽임을 당할 거야. 그러니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너 사는 데만 집중해.]
2번.
왼쪽 상의에 꽤 낮은 숫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보며 나무라듯 말을 했다.
[주먹밥 하나를 먹기 위해 친구인 마크와 한스도 버렸던 나야.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던 거고. 너라고 다를 건 없어. 그렇게 약한 마음을 품은 채 훈련에 임하다가 뒤처지면 난 너도 버릴 거야.]
[안 그럴게. 미안해.]
분노와 원망.
기껏해야 열세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눈이 마치 수십 년을 살며 온갖 풍파를 다 겪은 어른의 눈처럼 이글거렸다.
짐작건대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모질고 힘이 드는 모양이었다.
“성주님 잠깐 저쪽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한참 아이들이 얘기하는 걸 엿듣고 있는데 최은빈이 내 꼬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또 다른 아이들이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지 빛이 번쩍거리고 커다란 괴성이 들려왔다.
쿠아아아아앙.
쿠아아아아앙.
“#$#$#$#$#$슬로우!”
“##$#$#$#$#슬로우!”
“#$#$#$#$#$!에너지 볼트!”
“$#$#$#$#$#$에너지 볼트!”
소리를 따라 찾아가니 수십여 명의 아이들이 늑대인간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아레스나 태백산맥 길드 헌터들은 손 한번 못 쓰고 질 수도 있겠는데요?”
“마녀 부대는 이길 수 있겠어요?”
“이전에 저희였다면 몰라도 지금은 이길 수 있어요.”
최은빈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로는 이긴다 했지만, 다람쥐로 변신한 그녀의 앞발과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마나 팔찌로 인해 그녀들의 마나량과 농도가 더 짙을지는 모르지만, 늑대인간을 상대하는 아이들의 움직임과 마법 활용은 마녀 부대 못지않았다. 아니 같은 등급이라 가정하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위 마법을 응용해서 몬스터 사냥을 하는 훈련을 받은 것처럼 능숙했다.
“볼 건 다 본 것 같으니 하몽 님이랑 합류하죠.”
“네, 알겠어요.”
우리의 예상대로 아이들은 이미 누구의 편에 설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훈련과 교육에 길들어져 있었다.
이 아이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청방 길드와 싸우려면 다른 활로를 찾아봐야 할 듯했다.
잠시 아이들의 동태를 살핀 난 마녀 부대와 함께 청방 길드 본진이 있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 * *
이곳 대륙의 이 종족 연합이 마왕과 마족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숨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고 했다.
십년만 해도 강산이 변할 만큼 긴 시간이었고 비토섬의 동쪽은 마치 유럽의 섬 도시처럼 꽤 쾌적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수백여 명의 아이들이 훈련을 받는 북쪽 섬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동쪽 도시 옆 높은 산자락에 올라 구경을 하고 있는데 수십 마리의 산 다람쥐들이 나무와 나무를 건너뛰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오셨습니까. 성주님.]
“네. 이대로 청방 길드랑 싸우면 아이들과의 전투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잠시 살펴보다 이쪽으로 왔어요.”
[역시 그렇군요.]
하몽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도시를 살펴보니 이곳으로 피신한 대륙 원주민들과 청방 길드가 동맹을 맺은 것 같습니다.]
“동맹이요?”
[네. 스카이 캐슬이 우리 엘프족과 오크족한테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약속한 것처럼 청방 길드도 식량을 지원하며 몬스터와 싸우는데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흠…….”
난 고민과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도시 중앙에 청방 길드 깃발이 꽂혀 있는 건물을 쳐다봤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서로 원하는 것이 있으니 동맹을 맺은 건 이해가 됐으나 아이들이 인성마저 사라질 만큼 모진 훈련을 받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