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해상전 (2)
꽤 꼼꼼히 살펴봤는지 물속에 들어가 반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운디네가 다시 배로 돌아왔다.
-네 예상이 맞았어. 비토섬 인근에 작은 섬들이 십여 개 정도 있는데 그 주변 모두가 수심이 낮고 암초가 많아. 다가가려면 긴장 좀 해야 할 거야.
따스하고 포근한.
파란색 빛을 머금은 물방울이 내 머리를 감싸왔고 마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바닷속 풍경이 눈앞에 보였다.
‘그냥 들어갔으면 큰일 날 뻔했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가슴이 서늘해 질만큼 수심 가까운 높이까지 솟아올라 있는 암초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난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며 비토섬 북쪽으로 다가갈 수 있는 항로를 그렸다.
“이 선을 따라 섬에 다가갈 수 있을까요?”
“예상했던 것보다 암초가 훨씬 많나 보네요. 성주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장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선장과 항해사들이 내가 지도에 그려 넣은 항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암초를 피해 항로를 그리니 마치 드래곤 로드 씨엘이 머물러 있던 레어처럼 미로가 그려졌고 진입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청방 길드가 자리 잡은 동쪽 바다를 제외하고 나머지 방향은 숙련된 뱃사공들마저 절로 코끝을 찡그리게 할 만큼 바닷길이 너무 험난했다.
-조차가 심해서 물살이 거세지는 게 염려돼서 그런 거면 걱정하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최대한 항로를 따라 이동하라고 해. 물길 자체를 만드는 건 힘들겠지만 나와 발키리 길드 헌터들의 정령들이 힘을 합치면 암초들을 피해서 이동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배 선체가 아만티움으로 감싸져 있어서 어지간한 암초와의 충돌은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선장과 선원들과 달리 운디네가 자신 있는 표정을 지으며 항로를 쳐다봤다.
‘고마워.’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운디네를 쳐다봤다.
뼈를 때리는 팩트 폭행으로 때론 내게 상처를 줄 때도 있지만 운디네는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을 항상 확실하게 구분했다.
그녀가 저리 확신하면 비토섬으로 접근을 하는 건 가능할 듯싶었다.
“귀환 주문서 받으셨죠?”
“……네.”
“최악의 경우 주문서를 사용해 영지로 텔레포트 하면 되니까 일단 항로를 따라 섬에 붙여 주세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네.”
선장과 선원들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악의 경우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건조한 유거성호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지만 모두 내 지시를 따라줬다.
바닷속을 살피는 동안 어느새 지평선 끝이 붉은색으로 가득 차며 석양이 지고 있었고 우린 조금 더 어둠이 내려앉길 기다렸다가 비토섬으로 다가갔다.
* * *
“저기가 좋겠네요.”
물의 정령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비토섬 북쪽에 배를 댄 우리는 닻을 내리고 고정한 후 커다란 동굴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낮에는 마치 한 여름처럼 절로 등에 땀이 맺힐 정도로 덥더니 해가 지니 초가을 날씨처럼 공기가 차가워졌다.
짐작건대 해안가 지역 특성상 밤이 깊어지고 새벽이 되면 더 추워질 것 같았지만 여기서 불을 피우고 자리를 잡으면 적에게 들키지 않고 쪽잠이라도 자며 지낼 수 있을 듯했다.
“이 위쪽으로 올라가면 화룡의 둥지인가 보네.”
“화룡의 둥지요?”
“응. 꿈이라 인지하며 보았던 곳이라 기억이 모호하긴 하지만 드워프가 갇혀 있는 화룡의 둥지로 가면서 얼핏 이 섬을 본 것 같아.”
비토섬 북쪽 해안가를 살펴본 나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저 멀리 지평선을 쳐다봤다.
비록 기억이 모호하긴 하지만 내 감각이 지금 이곳을 와 봤던 곳이라 알려 주고 있었다.
짐작건대 청방 길드와 화룡의 둥지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제가 보기에도 화룡의 둥지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 같네요. 망원경으로 청방 길드 해안 쪽을 살펴보니 배들이 모두 일반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네요. 만약 이곳에서 거리가 멀고 항해 시간이 길었다면 크라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테니까요.]
하몽이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내 시선을 따라갔다.
나무가 베이스인 우리 배와 달리 청방의 것은 금속을 베이스로 지구의 물품으로 만든 현대식 배 같았다.
짐작건대 청방에서는 이미 게이트 내에서 선박을 만들 수 있는 설비를 이미 구축한 듯했다.
헌데 그들이 간과한 게 있었으니 대왕오징어의 존재였다.
청방에서는 아직 이 바다에 고래까지 잡아먹을 정도로 거대한 놈이 숨어 있는 걸 아직 모르고 있는 듯했다.
동굴 안쪽에 대충이나마 발을 뻗고 누울 수 있는 잠자리를 만들고 간단하게 요기를 한 지휘진이 내게 걸어왔다.
“성주님, 정찰대를 꾸려서 청방 쪽 동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흠…….”
지윤미는 늘 하던 대로 자신의 길드원을 데리고 정찰을 자처했고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현재로선 이곳 비토섬에 자리 잡은 청방 길드의 병력 규모를 확인하는 게 급선무이긴 하지만 발키리 길드 헌터들만 보내는 건 꺼려졌다.
드워프를 노예로 부리고 우리처럼 배까지 만든 것도 모자라 먼저 이곳 비토섬을 차지하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청방도 우리만큼이나 이곳 대륙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가진 듯했다.
아무리 발키리 길드가 정찰에 특화된 이능을 갖고 있고 그동안 임무를 맡아 왔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상대가 몬스터가 아닌 사람이었다.
“이번엔 제가 직접 인원을 꾸려서 정찰을 나갈게요.”
“성주님께서 직접 정찰하시겠다고요?”
지윤미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그동안 레이드에 소홀했던 내가 직접 정찰을 자처하니 놀란 모양이었다.
“청방 놈들 저희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강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저희를 신뢰하지 못하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나요. 전 발키리 길드의 정찰 실력을 신뢰합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임무를 완수할 테니까요.”
“그런데 왜…….”
“그게 싫습니다. 그리고 불안합니다. 제가 아무리 목숨을 가장 우선시해서 정찰하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간다는 거예요. 어차피 누군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이곳에서 가장 강한 제가 움직이는 게 맞을 것 같네요. 그래야 적에게 발각돼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살아나갈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요.”
“성주님…….”
“성주님…….”
지윤미와 발키리 헌터들이 세상 그윽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당연한 결정에 모두 감동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하몽 님, 엘프들처럼 동물들로 변신을 해서 정찰을 시작했으면 하는데 제가 참고해야 할 만한 사항이 있을까요?”
[흠……. 일전에도 설명해 드리고 직접 겪어 보셨지만, 변신 반지를 사용하면 외형뿐만이 아니라 본연의 기운까지도 어느 정도 감출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어떤 동물로 변신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원래 갖고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습니다.]
“네. 그 정도는 저도 인지를 하고 있습니다. 토끼의 발로 활을 들고 화살을 날리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요.”
[네. 맞습니다. 정찰을 위해 변신을 계획하셨다면 다람쥐 같은 것으로 변신을 하고 최은빈 님이 이끄는 마녀 부대만 데리고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동물로 변신을 해도 하위 마법들은 사용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하몽이 자신하는 표정을 지으며 최은빈과 마녀 부대 헌터들을 쳐다봤다.
마법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들을 바라보는 하몽의 눈에 신뢰가 가득했다.
“저번에 제대로 마법을 배워 써먹으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고 하지 않았나요? 근데 일전에 조성태 마스터와 최은빈 부대장의 대결도 그렇고, 생각했던 것보다 성취가 빠른 것 같네요.”
[그때는 제가 최은빈 부대장과 마녀 부대원들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요. 전 이곳 대륙 인간들을 기준으로 설명한 거였습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나요?”
[이곳 대륙의 인간들은 귀족이 아닌 이상 농사를 지으며 당장 내일 먹을 식량을 구하고 겨울을 대비해 저장하는데 급급한 삶을 영위했죠. 머리가 좋고 이해력이 좋은 인재를 발견해도 마법을 가르치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최은빈과 마녀 부대 인원들은 타고나길 천재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정말 많은 공부를 해서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천재라…….”
난 놀라움과 약간은 경악까지 섞인 눈빛을 하고선 최은빈과 마녀 부대원들을 쳐다봤다.
스물한 명.
A급 마나를 충전해 줄 인원을 선별하라고 했더니 현자급 마법사마저 인정할 만큼 똑똑한 사람들이었던 모양이었다.
“하몽 님, 그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게 얘기하시면 성주님 오해하세요.”
천재라는 말이 부끄러운지 최은빈이 얼굴 잔뜩 붉어져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고 이내 추가로 하몽의 설명을 이어갔다.
“룬어와 마법 공식을 배우다 보니 지구의 영어와 수학과 상당히 많은 부분이 흡사하더라고요. 그리고 하위 마법들은 그 공식이 복잡하지 않아 비교적 쉽게 외우고 익힐 수 있었고요. 저희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사람 다들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영어와 수학이요?”
“네. 저도 사실 처음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막상 마법을 제대로 배우고 시작하니 수능 공부했을 때보단 덜 어렵고 편하더라고요.”
“아…….”
최은빈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난 하몽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학교까지 추가로 또 4년까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여덟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바로 대학진학을 위한 전쟁이 시작된다.
심지어 요즘은 한글로 자기 이름을 막 쓰기 시작한 네 살배기 어린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기까지 한다고 한다.
고3 아니 고2만 돼도 하루에 네다섯 시간만 자고 종일 책상에 앉아 공부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비정상적인 학업 시스템보다는 마법을 배우는 게 더 쉬운 모양이었다.
“집합, 부분 집합, 약수와 배수, 소인수 분해, 공약수와 공배수, 기수법, 정수와 유리수와 같은 중학교 때 배운 수학 공식만 이해하고 응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하위 마법들은 일 년 안에 다 마스터할 수 있을 거예요.”
“천재 맞네요.”
“네?”
“저 학교 다닐 때 수학이랑 영어를 40점 이상 넘어 본 적이 없거든요. 지금 얘기하는 거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긴 하지만 하나도 모릅니다. 아니 듣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네요. 조금 더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네요.”
난 빙그레 웃으며 최은빈을 쳐다봤다. 비록 녹록지 않은 가정 환경으로 인해 넉넉지 않게 살긴 했지만 그래도 하나 좋았던 건 난 대한민국의 비정상적인 학업 시스템에 피해를 보지 않았다.
“마녀 부대랑 정찰하러 갈 테니 나머지 분들은 여기서 주변을 살펴주세요. 하몽 님, 변신 반지 주세요.”
“네. 여기 있습니다.”
나와 마녀 부대들은 헌터들은 금색 테두리에 붉은색 빛을 뿜어내는 반지를 건네받아 산 다람쥐로 변신해서 엘프들과 함께 청방 길드가 있는 동쪽 섬으로 정찰을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