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비토섬 (4)
[비토섬으로 가 보시겠습니까?]
“네. 그래야 할 것 같네요.”
하몽의 질문에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먼 바다로 나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하몽의 표정을 보아하니 퍼거슨과 이곳 대륙에 살았던 인간들이 우릴 반기지 않을 수도 있을 듯싶지만 부딪쳐 봐야 할 거 같다.
카프리와 하몽 덕분에 마녀 부대의 마법 응용력이 올라가긴 했지만 반대로 근접 클래스의 약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약점을 안 이상 이대로 간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귀환 마법진이 있으니 최악의 상황이 발생해도 영지로 텔레포트를 할 수 있으니 결정을 하는데 부담감을 줄일 수 있었다.
“형, 힘드시겠지만 선택을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재난 관리 본부와 헌터 협회. 그리고 저희가 보유한 코어를 모두 합치면 이십여 명 정도의 헌터나 헬퍼를 A급으로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십 명이나?”
“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헌터 집단이 세 곳이나 모였잖아요. 생각보다 그동안 모아 놓은 코어가 많더라고요.”
이부성이 마나 팔찌 충전량에 대해 기록한 지표를 내게 보여줬다.
「1티어 몬스터 코어 기준. (Ex. 오크)
F=>E급 필요 코어 10,000개
E=>D급 필요 코어 20,000개
D=>C급 필요 코어 40,000개
C=>B급 필요 코어 80,000개
B=>A급 필요 코어 160,000개.
.
.
.」
“F급을 B급까지 올리는데 필요한 코어랑 B급을 A급으로 올리는 코어랑 비슷하네?”
“네. 단계가 올라갈수록 그만큼 더 많은 마나가 필요하더라고요. 지금 확보한 코어로는 B급 헌터 이십 명을 A급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근데 전 코어를 좀 손해 보더라도 헬퍼들에게도 그 기회를 줬으면 해요.”
“헬퍼들에게?”
“비각성자의 마나 팔찌에 마나를 충전하려면 그만큼 코어가 더 많이 필요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믿을만한 사람을 지원해 줬으면 해요. 헌터 등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지원해 줬다가 행여나 연합에서 탈퇴하거나 딴생각을 품게 되면 우린 그만큼 손실을 보게 되잖아요.”
“흠…….”
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부성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보아하니 장지원이 태백산맥 헌터들을 지원해 줬으면 하는 것처럼 그도 그동안 함께 고생한 헬퍼들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너까지 왜 그러냐…….’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키는 대로 일을 할 땐 몸이 조금 피곤할지언정 속은 편했는데 막상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리에 오르니 머리가 아팠다.
[이부성 헬퍼님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이번에는 이십 명 모두 마녀 부대 헌터들을 선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듣기론 그녀들도 이곳에 갇혀 있던 연합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달려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믿을만한 사람들 아닌가요? 그리고 현재로선 마나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이들을 지원해 주는 게 비토섬과 화룡의 둥지로 원정갔을 때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네. 제가 판단에도 그게 현명할 것 같네요.”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최은빈을 쳐다봤다.
나 혼자서 결정할 사항이 아닌 것 같아서 최대한 지휘진의 의견을 반영하려 했는데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점점 갈등만 생기고 깊어질 듯했다.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내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최은빈 부대장님 마녀 부대 헌터들 중에서 이십 명을 선별해 주세요. 전부 다 A급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저희 부대에서만 이십 명을 선발하라고요?”
최은빈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내가 마녀 부대에 마음이 기운 것은 눈치챘어도 이렇게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지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카프리가 만들어준 용 갑옷과 하몽 님의 가르침이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마녀 부대는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하몽 님의 말씀처럼 앞으로의 원정에 있어 마녀 부대 헌터들이 강해지는 게 현재로선 가장 효율이 높을 것 같네요.”
“……가, 감사합니다.”
최은빈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절로 미소가 그려질 정도로 기분이 좋은 모양인데 다른 마스터들한테 미안해서 애써 참아 내고 있는 듯했다.
“혹시 제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마스터님들께서 뜻을 모아 정식으로 지휘진 회의를 소집하세요. 그럼 저도 따를 테니.”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지휘진을 쳐다봤다.
“저흰 불만 없어요. 성주님의 뜻을 존중합니다.”
지윤미, 박민정, 권수정.
“불만 없습니다. 성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조성태, 최우람, 박대세, 김현우,
“……어차피 속으로 다 결정해 놨으면서 뭐하러 뜸을 들여서 사람 마음을 상하게 하냐. 쩝.”
장지원, 김현규, 김영균.
“……성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성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재난 관리 본부와 헌터 협회까지.
장지원이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볼멘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내 뜻에 따라주었다.
“근데 두 분은 화해하셔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거죠?”
난 기대하는 표정을 지으며 장지원과 카프리를 쳐다봤다.
화해하기 전에는 일어나지 말라고 했는데 두 명 다 어느새 의자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고 있었다.
“화해했어. 생각해 봤는데 내가 날을 세워야 할 사람은 카프리가 아니었더라고.”
“화해했다. 멍청이가 다신 안 볼 것처럼 얘기해서 서운하긴 했지만 나 역시 멍청이의 생각에 동의한다. 우리 사이를 이렇게 만든 주범은 따로 있었다.”
장지원과 카프리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날 노려봤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어째 등에 살짝 한기가 들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짐작건대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의 화살을 내게 돌린 듯했다.
벌까지 서 놓고 먼저 사과하기 자존심이 상했는지 괜히 엄한 사람을 타겟으로 정하고 화해를 한 듯했다.
* * *
발키리 길드 10명.
태백산맥 길드 3명.
그레이 기사단. 20명.
마녀 부대. 20명.
재난 관리 본부. 3명.
헌터 협회. 20명.
엘프. 10명.
이른 아침.
비토섬으로 가기 위해 각 세력의 B급 이상에 상위 헌터들이 선착장에 도착했다.
귀환 마법진이 생기기 전만 해도 원정을 나가면 무조건 최대한 많은 인원을 추려서 다녔지만, 이제는 소수 정예로 움직이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고 불필요한 위험도 예방할 수 있을 듯했다.
“출발하시죠.”
“네.”
부우우우우우웅!
부우우우우우웅!
커다란 뿔 나팔 소리를 신호로 배가 출발한다.
난 주섬주섬 손을 움직이며 벨트를 매만졌다.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어떤 위험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렵긴 했지만 회복 포션과 해독 키트 그리고 귀환 마법서가 내장된 벨트를 매만지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카프리 님과 하몽 님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문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지윤미가 신기하고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등에 걸려 있는 화살통을 매만졌다.
겉으로 보기엔 수십여 발의 화살들이 들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론 하몽이 안에 아공간 마법진을 그려 넣어 수만 발에 이르는 미스릴 화살이 들어있었다.
지구의 과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편리해진 것처럼 이능 아이템이 계속 개발하고 발전함에 따라 레이드를 떠나는 헌터들의 불편함과 위험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무슨 할 말 있나?’
간만에 배를 타고 나와 바다 냄새를 들이키며 만끽하고 있는데 재난 관리 본부 임풍훈 팀장이 계속 내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재난 관리 본부와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립각을 세워 내가 아직 불편한 모양이었다.
난 어젯밤 삶아서 차갑게 식혀 가방에 넣어둔 족발과 소주가 들어있는 수통을 꺼내 임풍훈 팀장에게 걸어갔다.
“임 팀장님, 족발 드십니까?”
“족발이요? 직접 싸 오신 겁니까?”
“네. 예전에 이세훈이랑 배낚시 다닐 때 이렇게 족발을 싸 와서 배에서 썰어 먹곤 했거든요. 한입 드셔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오물오물. 냠냠.
“이것도 한잔하세요.”
“물은 괜찮…….”
“물 아니에요.”
“네?”
꿀꺽.
“헐…….”
“비밀이에요. 물인 척하면서 드세요.”
난 검지로 코와 입에 대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성주인 내가 손질되지 않은 족발을 가져와 직접 살을 떼어 내어 주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물이 들어 있을 줄 알았던 수통에 소주가 들어있으니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술을 찾아다니는 스타일은 아닌데, 배 위에서 이렇게 한 잔씩 하면 정말 맛있더라고요.”
“몰래 먹어서 더 맛있는 건 아니고요?”
“그럴 수도 있고요. 크으.”
꿀꺽.
당황스러워했던 것도 잠시 임풍훈이 알아서 족발을 먹으며 술을 마시는 걸 보고 나도 한 모금 들이켰다.
그가 나를 어려워하는 만큼이나 나도 그가 편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몰래 먹을 것과 술을 나눠 마시니 대화를 하는 게 한결 편안했다.
“저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어려워하지 마시고 하세요.”
“눈치채셨습니까?”
“그렇게 대놓고 주변을 배회하는데 모를 리가 없죠. 저 찾아오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닌가요?”
“네. 사실 그렇습니다.”
미소 지은 얼굴로 족발을 씹던 것도 잠시 임풍훈이 굳은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헌터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지금 가고 있는 비토섬에 석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게 맞나요?”
“그것 때문에 그리 심각했군요. 네, 맞아요. 카프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얘기한 것이니 아마 비토섬에 석유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걸 차지하게 된다면 재난 관리 본부와 헌터 협회와도 공유할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난 임풍훈 팀장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슨 할 말이 있어 이러나 살짝 긴장했는데 석유 때문에 그랬나 보다.
카프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비토섬에 유전이 있다면 광산과 이능 아이템만큼이나 우리에게 막대한 이익을 얻게 해 줄 자원이었기에.
“그렇게 해 주시면 저희나 헌터 협회나 정말 큰 힘이 되겠네요. 근데 제가 물어본 이유는 그게 아니라 청방 길드 때문에 물어본 겁니다.”
“청방 길드요?”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요 몇 년간 중국에서 수입하는 석유의 양이 줄어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중국 경제를 봤을 땐 분명 석유 수입이 늘어나야 하는데 말이죠.”
“흠…….”
난 고민과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임풍훈을 쳐다봤다.
아만티움으로 감싼 쾌속선.
카프리는 아만티움으로 감싸지 않으면 바다 몬스터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 비싼 금속을 이용해 배를 감싼 것인데 임풍훈은 지금 청방 길드가 먼저 비토섬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하는 듯했다.
“중국에서도 아만티움 광산을 발견했나요?”
“아만티움이요?”
“네. 아만티움이 없으면 배를 만들어 봤자 자유롭게 바다를 다닐 수 없어요. 이 아래엔 꽤 크고 무서운 놈이 살고 있거든요.”
“흠…… 아직 청방에서 아만티움 광산을 발견했다는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바다를 다니는 게 위험한 거지.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만…….”
괜한 기우일 거라고 설명을 했지만 임풍훈은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아니 눈빛을 보니 거의 확신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성주님, 이것 좀 보셔요.”
“……?”
지윤미가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다가와 내게 망원경을 건네줬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저 멀리 바다 지평선에 주먹만 한 작은 섬이 보였다.
짐작건대 저곳이 우리의 목적지인 비토섬인 듯했다.
난 망원경에 눈을 가까이해서 섬을 비췄다.
지윤미가 뭘 보고 놀랐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
그리고 이내 난,
“젠장!”
그녀의 얼굴색이 왜 바뀌었는지 바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검은 표범이 그려져 있는 깃발.
아직 거리가 멀어 섬이 주먹만 한 게 보였지만 망원경으로 보니 그 섬에 지구의 건물과 생김새가 비슷한 건물들이 잔뜩 지어져 있었고 그 위에 청방의 깃발마저 꽂혀 있었다.
당연히 다른 나라에선 아직 비토섬의 존재를 모를 줄 알았는데 우리가 한발 늦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