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44화 (144/255)

144화. 드래곤 레어 (4)

“상대하는 건 무리인가요?”

[지금 저희 전력으론 세 마리가 한계입니다.]

하몽이 몬스터들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드래곤은커녕 가디언들을 상대하는 것도 여기가 한계인 듯했다.

십여 마리의 사이클롭스.

수십여 마리의 서큐버스.

트롤, 해골, 타란툴라까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소수 정예 부대로 왔는데 가디언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제가 앞장서죠.”

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가 선두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텔레포트를 할 때 하더라도 7층 구경이라도 해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물론 그마저도 끝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겠지만 말이다.

“준비되셨으면 출발합니다.”

“네.”

“네.”

후다다다다닥.

후다다다다닥.

땅을 내달리면서 속도가 붙은 난 오른쪽 벽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미안, 형들이 바빠서 다음에 놀아줄게!”

“우워워워워워.”

“우아아아아아.”

우리가 돌격하는 줄 알고 전투 자세를 취했던 몬스터들이 닭 쫓던 개 마냥 우릴 쳐다보며 괴성을 질러 댔다.

-오빠, 어디 가세요. 저랑 놀아요.

‘실프.’

-응, 알았어.

살랑살랑.

쑤컹.

“아응.”

일부 서큐버스가 따라오며 유혹을 하려 했지만 난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윈드 블레이드로 목을 베었다.

-오빠…….

“꺼져.”

휘이익.

쑤컹

“아응.”

처음엔 몰라서 당했지만 한번 상대를 해 봐서인지 다른 마스터들도 서큐버스가 마법을 부리기 전에 목을 베며 따라왔다.

삼십육계 줄행랑.

병법에도 나와 있다고 하더니 정면 승부를 하는 것보다 오히려 진군하는데 속도도 빠르고 힘도 절약됐다.

서큐버스의 반지 덕분이었다.

만약 반지를 구하지 못했더라면 후퇴할 것까지 감안해야 했겠지만, 이제는 그럴 걱정까지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길이 없어.”

노움의 안내대로 달려왔는데 막다른 길이었다.

‘노움?’

-이래서 6층까지 뿐이 안 느껴졌구나.

‘끝이야?’

-이 아래 분명 공간이 있는데 드래곤의 기운 때문에 나도 입구를 못 찾겠어.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동, 서, 남, 북 어디를 둘러봐도 입구로 보일만 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주님, 몬스터들이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후우…….”

괴성을 질러대며 우릴 쫓아오던 몬스터들이 추격을 멈추고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그때,

[성주님, 빨리 뒤로 물러나세요.]

“네?”

[마법진입니다. 성주님이 서 있는 동궁 아래 전부에 마법진이 그려 있어요.]

하몽이 비명을 지르듯 내게 소리를 질렀다.

몬스터에게 쫓기며 달려와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동궁 아래에 커다랗게 마법진이 그려 있었다.

허나,

“늦은 것 같은데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법진을 인지함과 동시에 노란색 빛이 내 몸을 감싸며 눈 깜짝할 사이에 풍경이 바뀌었다.

-풍경이 바뀐 게 아니라 텔레포트를 한 거야.

끄덕끄덕.

눈앞에 노란색 산이 보였다.

-드래곤이야.

‘아…….’

노란색 드래곤.

이 존재가 씨엘이라는 드래곤인 모양이다.

마치 산에 불이 나고 산사태라도 난 것같이 드래곤의 몸 곳곳에 커다란 상처가 보였다.

내 짐작대로 누군가와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레어로 돌아온 듯했다.

가슴을 옥죄어 오는 강력한 마나가 느껴진다.

‘이대로 죽는 건가?’

불행히도 아직 생명이 붙어 있는 듯했다.

드래곤이 살아 있으면 하몽의 텔레포트 마법으로 다 같이 탈출하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일행들은 이곳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분명 내가 텔레포트 하는 걸 봤으면 바로 동궁 안으로 들어왔을 텐데 말이다.

-죽었어.

‘응? 죽었다고? 이렇게 강한 마나가 느껴지는데?’

-나도 마나는 느껴지는데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아.

운디네가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드래곤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때,

-인간인가?

머릿속으로 이명이 들려왔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나의 레어 까지 들어오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머리가 윙윙할 정도로 들리는 이명.

목소리만 들어도 운디네와는 격이 다른 존재인 듯했다.

짐작건대 세계수 정도의 존재는 될 것 같았다.

-내가 그동안 소환됐던 차원에선 일부 드래곤들이 신의 의지를 받아 중간계를 수호했어. 이차원도 만약 의지를 내렸고 저 드래곤이 그걸 받았다면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닐 거야. 신의 의지를 받는 순간 바로 반신의 존재가 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끙…….”

-만약 신의 의지를 받았고 네가 아니 우리가 그의 분노를 받았다면 정령계까지 따라와 날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니까.

운디네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어떤 상황이 와도 항상 자신만만했었는데 앞에 있는 드래곤은 그녀조차 두려움이 생긴 듯했다.

-드래곤 로드.

‘응?’

-드래곤의 수장인 것 같아.

“끙…….”

아무래도 똥을 밟아도 제대로 밟은 것 같았다.

단순 드래곤도 상대할 엄두가 안 나는데 그중에 대장 집에 찾아온 모양이다.

그것도 심장을 차지하기 위해서.

짐작건대 내년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될 듯했다.

그런데 그때,

-불, 물, 바람, 땅의 정령에 세계수의 축복까지 받았다고?

드래곤의 이명이 왠지 조금 온화하게 들려왔다.

“세계수의 사명을 받고 몬스터를 막아내고 있습니다.”

-지금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네?”

-바보야, 반신이라고 했잖아. 솔직하게 말해. 네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야.

“아…….”

세계수라는 말을 할 때 약간의 호감이 느껴져 사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포장했는데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래를 했습니다.”

-거래라…… 무엇을 거래했지?

“내용은 같습니다. 세계수는 자신의 영역에 몬스터들이 들어오는 걸 막아 달라고 했고 전 그걸 수락했고 힘을 보태 달라고 했습니다.”

-세계수도 꽤 궁했나 보군. 고작 인간과 거래를 하고 말이야.

사실대로 말을 하니 드래곤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이명을 보내왔다.

허나,

‘세계수도?’

난 그 이명에서 의아한 부분을 발견했다.

‘도’라는 말은 자기 역시 궁지에 몰려 있다는 말을 할 때 붙이는 거였기에.

‘운디네…….’

-죽었어.

‘응?’

-아무리 봐도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아. 아니 느껴지긴 하는데 앞에 있는 드래곤이 아니야. 드래곤 육에 밑에 희미하게 생명력이 느껴지긴 하는데 다른 존재야.

‘새끼인가?’

-응. 헤츨링인 것 같아. 아직 알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아.

두려움 기색을 했던 것도 잠시 운디네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헤츨링을 보호하기 위해 의념을 남겨 놓은 것 같아. 그래서 가디언 들도 계속 권속 상태였던 것 같아. 무슨 안배를 해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은 칠 수 있을 것 같아.

운디네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고개만 끄덕거리면 바로 힘을 개방해 뚫어낼 모양이었다.

-고작 중급 정령의 힘으로 내 손에서 벗어나려 하는 건가?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보려고요. 여기서 죽기엔 너무 억울하거든요.”

난 빙그레 웃으며 드래곤을 쳐다봤다.

너무 무섭고 떨리니 되레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좀 먹고살 만해졌는데 여기서 반항해 보지 않고 죽기엔 내 인생이 너무 불쌍했다.

그런데 그때,

-나와도 거래를 하겠는가?

‘……?’

드래곤이 내게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중급 정령쯤 됐으면 눈치를 챘겠지. 내 생명이 이미 꺼졌다는 걸.

“네.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육체 밑에 헤츨링이 있다는 것까지.”

-신의 의지를 이을 살아 있는 유일한 드래곤이네. 이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지켜주게. 그럼 나도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지.

“헐…….”

난 반쯤 넋이 나가 입을 쩍 벌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더니 고작 인간과 엘프조차 막아내질 못하다니. 아마 너희를 소멸시킨 다해도 곧 마족들이 들이닥치겠지. 이 아이를 지킨다고 약속해 주게. 그럼 나도 내 남은 모든 힘을 자네에게 넘겨주지.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지켜줄 의향은 있습니다. 허나 감당하기 힘든 존재들이 쳐들어오면 저도…….”

-하하, 용생 만년 만에 자네처럼 웃기는 인간은 처음 보는군. 드래곤 로드인 내가 부탁을 해서 착각을 하나 본데 나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는 않네. 다만, 현재 상황이 네놈 말고는 선택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거래를 제안한 거지.

드래곤이 웃는 것도 잠시 씁쓸한 목소리로 이명을 보내왔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내게 그리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게 거래를 제안한 듯했다.

“인간 안해용 메티스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제 목숨이 다하는 데까지 헤츨링을 보호하겠습니다.”

난 메티스의 이름을 거론하며 오크들에 이어 드래곤과 다시 한번 맹세를 했다.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아니 어차피 스카이 캐슬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선 몬스터를 토벌하고 싸워야 하니 밑질 것이 없는 거래인 듯했다.

-부탁함세.

찬란하고 밝은 노란 색 빛이 내 몸을 감쌌다.

그리고 이내,

중간계의 조율자.

데몬.

발록.

.

.

.

드래곤의 의념이 갖고 있던 힘과 일부 지식이 내게 전수됐다.

-노란색이 아니라 금색이야.

‘…….’

-예상은 했지만 다른 드래곤들마저 다 죽었을지는 몰랐네.

‘……?!’

-보통 드래곤 로드들은 신에게 대륙의 조율을 맡게 하거든. 그래서 보통 어지간한 큰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활동을 하지 않는데 마왕과 마족들이 쳐들어오자 상대하러 나갔다가 다 당한 모양이네.

“이제 완전히 죽은 건가?”

-어, 헤츨링을 부화시키고 보호하기 위해 의념을 남겨났던 모양인데 그 소임을 네게 넘겨서 의념마저 사라진 것 같아.

운디네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드래곤의 육체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성주님 괜찮으십니까?]

“성주님 괜찮으세요?”

“오빠, 괜찮은 거죠?”

6층에 있던 일행들도 마법진을 타고 레어 안으로 들어왔는데,

“네. 괜찮아요. 다들 무사한…….”

“와! 대박! 저거 전부 보석 아니야?”

“헐! 이거 다 금이에요. 금!”

내 대답은 듣지 않고 모두 드래곤 뒤편으로 달려갔다.

이제 보니 레어 뒤편에 금으로 만든 동전과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 대는 보석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인간이란 참 재미있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앞에 드래곤의 육체를 남겨놓고도 고작 저런 보석 따위에 먼저 관심을 보이다니.]

“……?”

마스터들과 달리 하몽은 드래곤의 육체에 다가가 손으로 매만졌다.

[이 비늘 열다섯 장만 카프리 님의 손에 들어가면 어지간한 물리 공격과 마법을 다 막아낼 수 있는 방어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드래곤의 뼈는 아만티움로 만든 방패조차 뚫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무기를 만들 수 있고요.]

“헐…….”

[보통 생을 다한 드래곤들은 스스로 산화하며 육체와 육체가 가지고 있던 마나를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마련인데 그대로 남아 있네요. 카프리 님이 보시면 많이 좋아하시겠네요.]

하몽이 기쁨과 기대감, 두려움과 같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드래곤의 육체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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