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마법사의 탑 (2)
“저희는 동료들이 잠들어 있는 하늘 공원을 지키기 위해 성주님과 함께 한다고 한 거예요.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이런 식으로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최은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추방이라는 말까지 하며 그녀의 결단을 강요했는데도 쉽사리 내 뜻에 따르지 않았다.
“아레스, 발키리, 태백산맥 그리고 울프와 레인보우 길드마저 영지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고 있는데…….”
“마녀 부대도 그들 못지않게 큰 보탬이…….”
“아니요. 지금까지 저희 마녀 부대는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매번 후방에 위치하며 소외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항상 다른 길드의 헌터들과 헬퍼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둔 채 지내고 있는데,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닌가요?”
“흠…….”
난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최은빈을 쳐다봤다.
난 나름대로 최은빈과 마녀 부대를 배려해서 내린 결정인데 나의 배려가 오히려 그녀에겐 소외감을 증폭시킨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4서클까지 그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한 거지. 그때까지 전투에서 배제되어 수련만 해야 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요? 고위 마법을 사용할 때도 후방에 있었는데 그것마저 사용하지 못하면…….”
[저희 아이들이 언데드 몬스터를 처리한 마법은 3써클 마법 턴언데드였습니다. 그리고 술식과 룬어만 제대로 이해 한다면 1, 2클래스 마법사들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고요.]
하몽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와 최은빈을 쳐다봤다.
“언데드 몬스터들을 마법 한 번에 터트려버리던데 그게 3써클이었다고요?”
[헌터님이 습득한 마법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3써클이 분명해요. 4써클 파이어볼이 더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긴 하지만 언데드 몬스터한테는 그리 효율이 높지 않은 마법이죠.]
“흠…….”
[1, 2써클의 하위 마법이라 해도 몬스터의 속성을 파악하고 상성에 맞는 마법과 연계 마법을 사용하면 오히려 상위 마법보다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어요.]
“아…….”
최은빈이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하몽을 쳐다봤다.
“그래서 성주님도 지난 데스 나이트 레이드를 할 때 저희가 아닌 플로라 길드를 더 적극적으로 운영을 하신 거였군요.”
“네. 운디네가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지만 그런 이유였긴 했습니다.“
난 최은빈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법의 이해.
속성.
연계.
하몽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최은빈과 난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데스 나이트 레이드를 할 때 마녀 부대의 파이어볼보다 1써클 마법인 플로라의 힐이 더 치명적이었던 것처럼 단지 써클과 마나가 높다고 강한 건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하몽 님께선 몬스터의 속성과 같은 것들을 파악하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몬스터 속성을 숙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중립을 선언하고 땅굴로 들어가 있었어도 그동안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거든요.]
“아…….”
[그리고 마법 역시 고대의 사라진 마법진과 룬어를 해석해 계속해서 복구하고 있습니다.]
“마법 복구를 하고 계신다고요?”
[네. 마족과 몬스터의 침공으로 대부분 손실됐지만 지금 1써클 마법만 해도 이십여 개를 복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몽이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짐작건대 몬스터에게 대항하기 위해 꽤 오래전부터 나름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성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몽 님께 제대로 마법을 배워 볼게요.”
“네. 잘 선택하셨어요.”
절대 뜻을 굽히지 않을 것 같던 최은빈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하몽에게 배움을 청했다.
그리고 이내,
[하몽 네 놈이 놀고 있지 않을지는 알았는데 꽤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네. 늦게라도 철이 들어서 다행이다.]
[카프리 님…….]
카프리가 다가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하몽을 쳐다봤다.
[이왕 가르치는 거 마녀 부대만 하지 말고 근사하게 마탑 하나 지어 줄 테니 헌터들 좀 모아서 제대로 한번 해 봐.]
[마탑을 지어주시겠다고요?]
마탑이라는 말에 하몽이 토끼 눈을 하고선 카프리를 쳐다봤고 나도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마탑이 뭐예요?”
“마법사의 탑이라고 마법사 놈들이 연구도 하고 실험을 할 수 있는 건물을 말하는 거다. 멍청이가 계속 말을 줄여서 하기에 나도 따라해 봤다.”
“아…….”
머리가 똑똑해서 그런지 카프리는 하나를 가르치며 열을 깨우쳤고 벌써 말을 줄여서 하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물론 고생고생해서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님께서 아시면 그리 좋아하시진 않겠지만 말이다.
[마탑을 지으려면 많은 인력과 자원이 필요한데 왜 제게 그걸 지어주시겠다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마족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고위 마법사들이 많이 필요할 테니 하몽네가 제대로 한번 양성해 보라고. 그리고 부탁할 것도 있고.]
[부탁이요?]
[씨엘의 레어를 가려고 하니 손을 보태라.]
[씨엘 님의 레어를 가신다고요? 설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겁니까?]
씨엘이라는 말에 하몽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짐작건대 씨엘이 운디네가 느꼈던 드래곤의 이름인 듯했다.
[아직 생생하다. 병 걸린 것도 없고.]
[그런데 어째서 드래곤의 레어에 찾아가겠다는 겁니까? 허락 없이 드래곤의 영역에 침범하면 드래곤의 분노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그놈 죽었어. 살아 있으면 자신의 영역 근처에 이리 언데드가 설쳐 대는 데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아마 사달이 나도 수십 번은 났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잠을 자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카프리 님도 알다시피 드래곤은 한번 자면 수십 년 동안 잠을 자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럼 다 죽는 거지. 뭐.]
[끙…….]
하몽이 앓는 소리를 내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마치 동네 마실 가자고 하는 거같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프리와 달라 하몽은 얼굴 가득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차피 이렇게 어영부영 세를 확장하면 한순간에 마족한테 밀릴 수밖에 없어.]
[그래도 굳이 일부러 수명을 단축할 필요는…….]
[자네도 이제 백 년 넘게 살아 봤으면 느꼈을 거 아니야. 이렇게 살아 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우리 한 방을 노리자고. 드래곤의 심장과 부산물만 챙길 수 있다면 마탑은 물론이고 성곽에 앱솔루트 베리어 마법진마저 새겨 놓을 수 있잖아. 그렇게 대마법진 몇 개만 만들어 놓아도 어지간한 마족들은 감히 쳐들어올 엄두도 못 낼 거야.]
[예전 인간들처럼 황궁이라도 지으려는 겁니까?]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자네도 알다시피 인간들의 황궁만큼 마족을 막아 내는데 효율적이었던 시설도 없었으니까.]
카프리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운디네를 통해서 드래곤이 강하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는데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인 듯했다.
[네, 알겠습니다. 카프리 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따르지요.]
[그래. 잘 선택했네. 그럼 성주랑 함께 조심해서 다녀오시게나.]
[네? 그 말은 안해용 성주님이랑 저랑 둘이 다녀오라는 말입니까?]
하몽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카프리가 또 기껏 바람만 다 집어넣고 나서 또 발을 빼 버렸다.
[나야 살 만큼 살아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자네 종족의 아이들은 아니지 않는가. 씨엘 그놈이 살아 있으면 또 지랄발광할 테니 난 아이들을 이끌고 영지에 가 있겠네. 수고하시게.]
[…….]
“…….”
카프리가 나와 하몽만 남겨 두고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이 일행들에게 걸어갔다.
보아하니 진짜 우리 둘만 남겨 두고 철수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쩝, 우리 둘이 가야 할 것 같군요.]
“괜찮을까요?”
[카프리 님의 말처럼 차라리 우리 둘이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성주님이랑 저랑 단둘뿐이면 혹시 씨엘 님이 살아계셔도 도망칠 기회라도 잡을 수 있을 테니.]
하몽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프리의 현란한 말솜씨에 설득당해 이미 드래곤의 레어에 가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드래곤이 강하긴 하지만 있는 힘껏 도망쳐서 세계수 근처까지만 갈 수 있다면 살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을 거야.
‘……그래.’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환 마법진은 물론이고 스카이 캐슬의 방어를 위해선 드래곤 하트가 꼭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드래곤 레어에 한번은 다녀와야 할 듯싶고.
어차피 가야 하는 곳이라면 그 누군가가 내가 되는 것이 맞을 듯했다.
이번처럼 뒤로 한걸음 빠져 있다 위험에 빠진 동료들을 구하기 달려오며 느꼈던 그 참담함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전 잠시 저희 아이들한테 다녀오겠습니다.”
“네.”
터벅터벅.
하몽이 전달할 사항이 있는지 안젤리나라고 불리던 엘프에게 걸어갔다.
짐작건대 그녀가 하몽의 뒤를 이을 후계자인 듯했다.
[안젤리나 혹시 이곳에서 큰 소음이 들리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바로 카프리 님을 따라 게이트를 넘어가. 아무리 화가 나도 드래곤이 너희를 따라 차원까지 넘어가지는 않을 테니.]
[할아버지 그냥 안 가시면 안 돼요? 저 호박고구마 안 먹어도 돼요. 그냥 예전처럼…….]
[이제는 이 할아비가 싫구나. 이 할아비는 저 밝고 환한 해를 보며 살고 싶구나.]
하몽이 안젤리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이내,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마.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아이들을 데리고 카프리 님을 따라가.]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그래. 언제 이 할아비가 약속을 어긴 적이 있더냐?]
[아니요. 없었어요. 그러니 이번에도 꼭 지켜주세요. 전 할아버지를 믿어요.]
안젤리나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인사를 해야겠지?’
둘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나도 수정이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수정아…….”
“저도 같이 갈 거니까 인사할 필요 없어요.”
“응?”
“오빠가 죽으면 저도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거예요.”
수정이가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며 날 노려봤다.
표정을 보아하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날 따라갈 기세였다.
그리고 이내,
“성주님 저한테도 인사 안 하셔도 됩니다.”
“저도요.”
“나도.”
조성태, 최영식, 최병용, 이어진, 김종관…… 스카이 캐슬 연합 소속 마스터들과 동맹을 맺은 길드의 마스터들이 함께하기를 자처했다.
“너희들도 함께하겠다고?”
“네, 카프리가 그러던데 드래곤이 살았든 죽었든 레어 근처로 가면 가디언들이 있을 거라네요. 둘이서만 가면 가디언들과 싸우다 마나를 다 사용할 수도 있으니 같이 가라고 하더라고요.”
마스터들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날 쳐다봤다.
이들 역시 내가 허락을 하지 않아도 억지로 따라올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