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38화 (138/255)

138화. 엘프족 (4)

“저 성주님, 네크로맨서에게서 나온 전리품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가 나왔습니까?”

“네. 로브랑 후드, 지팡이, 반지……. 모두에서 범상치 않은 마나가 느껴져요. 그리고 전부 카프리가 그리는 마법진처럼 특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요. 밖으로 나가서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다들 유니크 이상의 아이템인 것 같아요.”

전장을 정리한 지윤미 마스터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나와 하몽의 눈치를 살폈다.

노멀-매직-레어-유니크-레전드…….

유니크 등급이면 그동안 카프리가 만들어 주었던 장비들보다 더 상위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보아하니 네크로맨서가 사용했던 무구들이 꽤 탐이 나는 모양인데 우리가 처리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모양이었다.

-장로급이라 그런지 좋은 로브를 입고 있었네요. 이거 하나만 입어도 평소보다 마나 회복이 두 배 이상 빨라지겠네요.

“장로급이요?”

-‘무르무르’라고 꽤 고위급 마족이에요.

“아…….”

하몽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네크로맨서가 착용하고 있던 아이템을 살피며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흑장로의 로브. 마법 회복 속도 상승

흑장로의 후드. 마법 공격력 상승

흑장로의 지팡이. 마법 공격력 상승, 마법 공격 속도 상승.

흑장로의 반지. 변신 가능.」

-이 반지를 착용하면 외형은 물론이고 기운까지 본질에 가깝게 변할 수 있을 거예요.

하몽이 빙그레 웃으며 네크로맨서에게 얻은 전리품들을 내게 내밀었다.

“저희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저흰 그저 거들었을 뿐인데 이걸 탐낼 수야 있나요.

“거들었다니요. 하몽 님 혼자서…….”

-저 혼자서 해치울 수 있었다면 진즉에 해치웠겠죠. 무르무르의 진정한 힘은 수백만의 언데드 몬스터인데 그대와 그대의 동료들이 그걸 막아내 줬잖아요.

“그래도 저희 혼자 다 가지기에는 염치가…….”

-정 마음이 불편하시면 신선한 음식을 더 많이 갖다주세요. 저희에겐 지금 아이템보다 먹을 것이 더 소중하거든요.

내가 아이템들을 돌려주려 하자 하몽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용의 계곡 안쪽에 작은 토굴들이 보였고 짐작건대 그동안 저기서 언데드 몬스터들의 눈을 피해 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스터님, 일단 호박고구마와 채소들을 있는 대로 가져 와 주세요. 그리고 저희가 먹을 것도요.”

“네. 알겠어요. 가는 김에 카프리도 데리고 올까요?”

“네. 그래 주세요. 네크로맨서를 해결했으니 카프리도 와 줄 거예요. 그가 오면 밥도 좀 먹고 드래곤의 레어도 찾아보죠.”

“네.”

지윤미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은 안 하지만 네크로맨서의 아이템이 우리 수중에 들어 온 게 흡족한 듯했다.

그리고 이내,

“……죄송해요.”

“네?”

지윤미 마스터가 쭈뼛거리며 내게 사과해 왔다.

“나중에 따로 정식으로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아서요.”

“…….”

“가장 강하신 분이 레이드에 참여 안 하고 농사를 짓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근래에 성주님 욕 많이 했거든요.”

“끙…….”

“근데 이번에도 또 성주님의 판단과 결정이 옳았네요. 농사를 지어서 엘프들과 접전이 생기지 않고 흰 토끼로 변신한 엘프들에게 고구마와 채소들을 나눠 주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저흰 이곳에서 다 죽었을지도 모르니까요.”

“…….”

“앞으론 다신 성주님이 하고자 하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게요. 그럼 다녀올게요.”

“…….”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지윤미 마스터가 도망치듯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짐작건대 그동안 남몰래 날 어지간히 욕을 했었나 보다.

그런데 정작 호박고구마로 인해 위기를 극복하니 염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얘기했던 것처럼 전쟁은 칼과 같은 무기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본의 아니게 증명됐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을 테니까.

“지금 저희 일행들이 음식을 가지러 갔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곧 도착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이걸 왜 제게?”

하몽이 소매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 건네줬다.

-보아하니 대륙 공용어를 모르시는 것 같은데 도움이 될 겁니다.

“설마?”

-언어 변환 마법이 내장된 아티팩트입니다.

“……이렇게 귀한 것을 그냥 받아도 되겠습니까?”

-성주님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저희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하몽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봤다.

채소 좀 나눠주고 이래저래 정말 큰 보답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저희 아이들이 변신한 동물은 토끼가 아니라 바다 건너 사막에 사는 여우입니다.

“네?”

-언데드 몬스터들이 하도 많아 일일이 싸울 수도 없고 해서 작고 빠른 동물로 변신해서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거든요.

“아…….”

변신 조종 반지.

하몽의 설명을 들은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네크로맨서가 착용하고 있던 반지를 쳐다봤다.

짐작건대 저 반지를 차면 엘프들처럼 변신을 할 수 있을 듯했고 몬스터의 눈도 피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먹을 것만 주면 앞으로도 계속 도움을 주려나?’

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몽을 쳐다봤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는 카프리가 말한 현자급 마법사였고 함께해 주기만 한다면 큰 도움이 될 듯했는데 먹을 것에 저리 집착하는 게 사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런 능력을 갖추면 우리처럼 세력을 확장해 몬스터와 대항하며 얼마든지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

[염병할 놈. 오랜만이구나.]

[카프리. 살아있었군요.]

[당연히 살아있었지. 내가 죽기라도 한 줄 알았어?]

스카이 캐슬에 남아 있던 카프리가 도착했고 그는 오키도키를 다시 만났을 때보다 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하몽을 쳐다봤다.

[이들이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을 보고 카프리의 손길이 느껴져 혹시나 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반갑네요.]

탁!

[반갑기는 얼어 죽을.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

[끙…….]

하몽은 카프리를 향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지만, 카프리가 몸서리를 치며 그 손을 쳐냈다.

‘친한 종족이 없네. 엘프들도 드워프를 잡아서 노예로 부렸나?’

어째 오크들보다 엘프들하고 사이가 더 좋지 않아 보였다.

만약 하몽이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오키도키한테 한 것처럼 두들겨 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카프리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곳에 오지 않으려 했던 게 단지 언데드 몬스터의 위협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수백만 명의 인간과 오크, 드워프 종족들이 도와 달라고 했을 땐 외면을 하더니. 고작 호박고구마 때문에 손을 보탰다며?]

[카프리 당신한테는 면목이 없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쯧쯧. 고귀한 엘프들도 고작 백 년도 안 되는 세월 만에 많이 바뀌었고만.]

카프리가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듯 하몽을 쳐다봤다.

“카프리 왜 그래요.”

난 조심스레 다가가 카프리의 소매를 잡았다.

우린 지금 하몽과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했고 앞으로도 계속 도움이 필요했다. 이렇게 척져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이 대륙에 처음 마계의 문이 열렸을 때 모든 이 종족들이 힘을 합쳐 같이 마족과 몬스터들을 막아 내기 위해 동맹을 했는데 저놈들만 중립을 선언하고 땅굴로 들어갔다.”

“중립을 선언했다고요?”

“그렇다. 자신들이 보기엔 마족이나 인간이나 다를 게 없다는 개소리를 지껄였지.”

[아름다운 외형으로 인해 우리 엘프들은 인간들에게 당신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 역시 대장장이 기술로 인해 수백, 수천 명의 동료가 납치되어 노예가 되었다. 허나 그건 그 당사자에게 풀어야지. 너흰 그걸 핑계로 대륙의 멸망을 방관했다.]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카프리와 하몽을 번갈아 쳐다봤다.

카프리가 왜 이렇게 날을 세우고 있나 했더니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후회하고 있다고.]

[네. 속 좁게 군 걸 인정합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이번엔 돕겠습니다.]

[우릴 계속 돕겠다고?]

[네.]

하몽이 세상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인간이든, 마족이든 누가 이 대륙을 차지하든 간에 상관없을 줄 알았는데 마족이 대륙을 차지하니 저희 아이들은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땅굴에서 살아야 했고 작은 벌레와 나무뿌리 같은 것들을 먹으며 연명을 해야 하는 삶으로 바뀌더군요.]

그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돌며 뛰어놀고 있는 사막여우로 변신한 엘프들에게 가 있었다.

마족과 몬스터와의 전쟁을 피해 목숨은 연명한 지 모르겠으나 삶이 그리 평탄치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서 둘의 언쟁을 멈추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지나간 일로 얼굴을 붉혀봤자 좋을 것이 없을 듯했다.

“저희 세계에 욜로(You only live once)라는 말이 있거든요.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삶이죠.”

난 빙그레 웃으며 하몽을 쳐다봤다.

-흠…….

“단 하루를 살더라도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일 다 하며 사는 삶을 지향하는 거죠.”

-아…….

하몽이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저도 그런 거 잘 모릅니다. 제가 몬스터랑 싸우는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단 하나입니다. 저와 함께 그 길을 함께 걸어 보시겠습니까?”

-네. 같이 가겠습니다.

하몽이 세상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그때,

[우리 성주는 수천만 명의 인간과 또 수십만, 아니 수백만이 될 오크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다.]

[……?]

[고작 수백 명의 엘프를 이끄는 수장 따위가 그렇게 고개를 까닥거리며 동맹을 맺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

카프리가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하몽을 노려봤다.

그리고 이내,

[꿇어.]

[…….]

[싫어?]

[아니요. 인간의 법이 이렇다면 따르겠소.]

하몽이 내 앞에 걸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따라 해.]

[…….]

“엘프족의 수장 하몽이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

[따라 하라고.]

“엘프족의 수장 하몽이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

“…….”

하몽은 카프리가 지시하는 대로 내게 군례를 취했다.

“카프리, 그만 하세요. 왜 이래요.”

“수백만 명의 이 종족이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방관했던 종족이다.”

“그래도…….”

[하몽 명심해라. 이게 안해용 성주와 너의 눈높이다. 앞으론 버릇없게 굴지 마라]

[알겠소.]

“끙…….”

난 엘프족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카프리가 자기 멋대로 우리 관계를 정리했다.

“카프리?”

“왜?”

“카프리도 저한테 그리 예의 있게 행동하지는 않지 않나요?”

“난 친해서 괜찮다.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마라.”

카프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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