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엘프족 (2)
“형, 이놈들 고기는 안 먹는데요?”
“그러게. 여우인 줄 알았는데 채식 동물이었나?”
마치 깡패처럼 밭에 들어와 모종들을 파헤쳤던 놈들의 외형은 덩치도 그렇고 사막여우와 생김새가 비슷해 잡식성인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르게 고기는 손도 대지 않았다.
“채식 동물인 것 같긴 한데 근데 또 그냥 풀은 안 먹는 것 같아요.”
근데 또 웃긴 게 볏짚과 같이 초식 동물이 환장해서 먹는 것들은 또 손도 대지 않고 고구마와 감자, 당근, 배추, 무와 같이 사람들이 먹는 음식들만 먹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뭐. 이제 모종은 안 건드리잖아.”
“그러니까요. 보니까 저놈들 모종도 좋아해서 먹은 게 아니라 하도 먹을 게 없으니 모종이라도 먹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난 이부성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침 9시.
점심 12시.
저녁 6시.
밭을 일군 곳 옆에 하루에 세 번 하얀 여우 아니 하얀 토끼들이 먹을 만한 채소들을 갖다 놓자 더 이상 울타리를 넘어오지 않았다.
이부성이 짐작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는 채소들을 더 좋아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헌터들의 손에 붙잡히지 않을 만큼 빠르고 지능이 높은 놈들이니 내 경고를 이해한 것일지도 몰랐다.
달달달달달달.
달달달달달달.
“해용 성주, 나 왔어.”
“어서 오세요. 형님.”
“으읔. 냄새.”
흰 토끼들이 귀여워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근학이 경운기 뒤에 소똥으로 보이는 것들을 가득 담아 가져왔고 이부성이 인사한 것도 잊은 채 손을 들어 코부터 틀어막았다.
“하늘 목장에서 가져온 거예요?”
“어. 지력이 좋아서 굳이 안 뿌려도 될 것 같긴 한데. 변지섭 헬퍼가 그동안 소똥을 모아 1년 가까이 잘 숙성 시켜 놨더라고. 그냥 썩히기에는 아까우니 뿌려 보려고.”
이근학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암염 지대에서 가져온 씨앗을 가지고 키운 배추 모종을 심은 밭을 쳐다봤다.
천연 비료.
말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게 예사롭지 않더니 땅 농사까지 해본 경험이 있는지 변지섭 헬퍼가 소똥마저 알뜰하게 모아 잘 숙성을 시켜 놔둔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캬앙.”
“캬앙.”
툭! 툭!
흰 토끼들이 채소들이 들어있던 빈 상자를 앞발로 툭툭 건들며 구슬프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벌써 다 먹은 건가? 늘 주던 만큼 준 거 아니야?”
“네. 맞아요. 제가 지켜봤는데 여기서 바로 먹는 놈들도 있는데 채소들을 싸 갔다가 다시 오는 놈들도 있더라고요.”
“그래? 친구들 갖다주는 건가?”
“네. 여기 있는 놈들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아요.”
“흠…….”
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흰 토끼들을 바라봤다.
농작물도 지키고 사정이 딱해서 음식을 나눠주긴 했지만 저리 당연하게 더 요구까지 하니 왠지 빈정이 상했다.
“너무 괘씸한데…….”
“그죠? 사실 저도 그 생각이 들긴 했어요.”
이부성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그때,
“귀엽잖아. 저리 귀여운 얼굴로 먹을 것을 먹는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밥값은 하는 거 아니야?”
“…….”
이세훈이 양쪽 어깨 위에 고구마와 감자가 잔뜩 들어있는 상자를 들춰 메고 걸어왔다.
“뭐야? 어떻게 알고 가져왔냐?”
“어떻게 알긴. 여기 말고도 다른 오크성에 있는 밭 주위에도 저놈들이 먹을 거 더 달라고 울어 대서 갖다주고 오는 길이야.”
“다른 데서도?”
“응. 3, 4…… 10성까지 합치면 대략 이백 마리 정도 되는 것 같아.”
“이놈들 아주 호구 잡았고만.”
“그렇게까지 빈정 상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저놈들 때문에 요즘 영지에 있는 아이들이 그래도 웃을 시간이 많아졌으니까.”
이세훈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흰 토끼들한테 다가가 채소들을 나눠주고 먹는 모습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봤다.
“저리 먹는 것만 봐도 힐링 되잖아. 영지에 있는 아이들도 흰 토끼들한테 반했는지 식사 시간만 되면 밭에 찾아와 구경한다고 하더라. 그리고 일부 애들은 직접 자신이 갖다주고 싶다며 자처해서 배달하는 애들도 있고.”
“그래? 그 정도야?”
“어. 그 정도야. 삥 뜯기는 거 같아도 그냥 주자. 저놈들한테 음식 나눠 주는 거 중단하면 영지에 있는 아이들 전부 너를 적으로 간주할지도 몰라.”
“……그럼 안 되지.”
난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세훈이 말하는 아이 중엔 은솔이도 있을 테니까.
난 새로 생긴 내 동생한테 미움받기 싫었다.
“잘 생각했어. 헌터들한테 미운털 박힌 것도 모자라 아이들한테까지 미움받으면 너도 살맛 안 날 테니까.”
“끙…… 아직도 그래?”
“아직도 가 아니라 더 불붙었지. 용의 계곡 쪽으로 땅을 넓히면 넓힐수록 언데드 몬스터의 출몰 빈도와 개체 수는 많아지는데 영지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농사를 짓고 있으니 좋게 보일 리가 없잖아.”
이세훈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농사 한번 짓기 힘들었다.
내 생각엔 나름 영지 발전을 위해서 이바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들 보기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
슈우웅 펑!
슈우웅 펑!
용의 계곡이 있는 하늘에서 비상 신호를 알리는 빨간색 폭죽이 연이어 터져 올랐다.
“젠장! 루카스!”
히이잉!
“이랴!”
난 폭죽을 봄과 동시에 바로 루카스의 등에 올라타 용의 계곡 쪽으로 달려갔다.
* * *
“젠장! 이 많은 놈들이 어디서 다 나타난 거야.”
슈우웅 펑!
슈우웅 펑!
상황이 다급한지 폭죽은 연이어 계속 올라왔고 그걸 나침반 삼아 달려가는데 언데드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노움!”
-응. 알았어.
우르릉 쾅쾅!
우르릉 쾅쾅!
‘노움!’
-이제 한 번밖에 안 남았어.
‘응?’
-벌써 5번이나 썼어.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너 곧 혼절하게 될 거야.
‘그럼 어떡하라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돌아가자. 일전에 얘기했잖아. 인간이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하다간 혼절이 아니라 아예 정신이 붕괴할 수도 있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수천 마리의 해골들을 보며 노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벌써 5번의 지진을 만들며 땅을 가르고 언데드 몬스터들을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땅속 깊이 떨어뜨렸는데도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놈들 단순한 언데드 몬스터가 아닌 것 같아.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어.
살아있는 것에 대해 맹목적으로 공격을 하던 평소 모습과 다르게 언데드 몬스터들이 집단을 이루고 진형을 짜 주요 길목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아…… 내가 같이 레이드를 나갔어야 했는데…….”
난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쳐다봤다.
레드 문.
지구의 것과 마찬가지로 노란색이었던 달이 지금은 붉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나 떠서.
대한 헌터 협회 이만여 명.
슈우웅 펑!
슈우웅 펑!
나름 대규모 인원이 와서 레이드를 시작해 안심하고 농사에 전념했는데 지금 그 많은 인원이 여기저기서 살려 달라고 쉼 없이 폭죽을 쏘아 대는데 정작 나조차도 고립되고 말았다.
언데드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런데 그때,
“성주님!”
“박민정?”
“네. 저예요. 역시 성주님이셨네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박민정과 백여 명의 발키리 헌터들이 보였다.
“무사하셨네요. 다행입니다.”
“아직은 아니에요. 지금 저희 몰이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몰이요?”
“네. 퇴로가 완전히 막혔어요.”
“아니에요. 제가 오면서 다 해치…….”
박민정이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고 난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뒤로 돌렸는데,
“분명 다 해치웠는데…….”
어느새 우리 뒤편에 다시 수천 마리의 언데드 몬스터들이 몰려와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저희도 모르겠어요. 분명 해가 지기 전까지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는데 복귀를 하는 도중에 저렇게 붉은 달이 뜨더니 언데드 몬스터가 저렇게 증상도 없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박민정이 붉은 닭을 보며 절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모양인데 계속 수포가 된 모양이다.
그리고 그때,
-네크로맨서가 온 것 같아.
‘네크로맨서?’
-일전에 얘기해 줬잖아. 언데드 몬스터들을 수하로 부리는 마족이야. 그놈을 죽어야 해.
‘찾으면 죽일 수 있을까?’
-데스 나이트보다 육체적 능력은 낮은 놈이야.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하는 것 때문에 까다로운 거지. 찾기만 하면 어떡하든 방법이 생길 거야.
운디네가 형상화되어 나타나 용의 계곡 쪽을 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
“성주님!”
“마스터님!”
“후우. 역시 성주님이셨군요. 구해 주러 올 줄 알았어요.”
지윤미 마스터도 레이드를 나왔던 발키리 헌터들을 모아 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언데드 몬스터의 공세가 대단했는지 다들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가득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같이 왔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성주님이 계셔도 뾰족한 수는 없었을 거예요.”
“아닙니다. 제가 이곳에 있었어도 적어도 이렇게 또 고립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제야 후회가 되었다.
그녀가 얘기했던 것처럼 같이 레이드를 나왔으면 내가 가진 능력으로 퇴각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아무도 성주님을 원망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지윤미 마스터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발키리 길드 헌터들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익숙한 얼굴을 한 사람들 몇몇이 보이지 않는다.
“……죽은 건가요?”
“아직 몰라요. 다들 조별로 흩어져서 사냥하고 있었어요. 제가 모은다고 모았는데 해골들 때문에 다 합류를 시키지 못했어요.”
지윤미 마스터가 내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시는 나오질 않길 바랐는데 또 희생자가 생겨 버린 듯했다.
“나 때문에…….”
“진정하세요. 성주님. 성주님 때문이 아니에요. 저희는 지도를 작성하며 최대한 천천히 땅을 넓혀서 갔고 언데드 몬스터의 출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성주님 잘못이 아니에요. 성주님이 같이 계셨다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 거예요.”
“오빠 아니에요. 그러니 제발 진정하세요.”
죄책감과 자책감으로 인해 내가 또 폭주할 기미가 보이자 수정이가 다가와 날 꼭 껴안았다.
“안쪽 숲에 아직 헌터 협회 소속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을 구해야 해요.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 알았어.”
후우.
지윤미와 박민정, 권수정의 위로로 겨우 진정을 한 난 깊게 심호흡을 하며 용의 계곡을 바라봤다.
이어진과 김종관.
내 죄는 나중에 청하고 일단 헌터들을 먼저 구해야 했다.
“제가 길을 열 테니 따라오세요.”
“네, 알겠어요.”
‘노움!’
-이제 한 번밖에…….
‘난 죽어도 좋으니까 일단 길부터 열어 줘. 사람들부터 찾아야 해.’
-어휴. 알았어.
우우우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우우웅.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일단 내 모든 힘을 개방해 레이드 하러 나와 흩어진 헌터들을 찾아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