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엘프족 (1)
“해용이 형, 해용이 형.”
“부성이?”
“네. 저예요. 형. 식사도 안 하시면서 물질하고 계신다고 해서 제가 누나들 몰래 싸 왔어요.”
바닷속에 들어가 미역을 따고 있는데 희미하게 부성이 목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오니 그가 노란색 냄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제비를 담아서 가져왔다.
“누가 그래? 나 밥 안 먹었다고?”
“식당에서 호출이 와서 가 보니까 성준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다들 밥 먹으러 왔는데 형만 안 오셨다고. 그래서 성준이 형이 갖다주라고 누나들 몰래 싸 주신 거예요.”
“흠…….”
“왜요? 밥 생각이 없으세요?”
“그게 아니라 나 밥 갖다주는데 눈치를 봐야 하는 거야?”
이부성은 나와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피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게 혹여나 형이 성주 그만둔다고 할까 봐 윤미 누나가 당분간 지휘부 사람들은 형한테 접근 금지라고 했거든요.”
“그럼 너도 이렇게 나 찾아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형이 식사를 안 한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그리고 설사 성주를 그만두기로 했기로서니 그런 곤란한 자리를 저한테 만들라고 하지도 않을 거 같아요. 헤헤.”
이부성이 날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윤다영이 했던 말도 있고 이부성마저 이리 눈치를 살피는 걸 보니 지윤미 마스터가 엄포를 놓은 모양인데 그는 그것보다 내 끼니를 먼저 신경 썼다.
“잘 먹을게. 같이 먹자.”
“네. 형. 같이 먹으려고 넉넉하게 가져왔어요. 여기 김치도 있으니까 같이 드세요.”
“그래.”
호로록 짭짭.
호로록 짭짭.
“드실 만하세요?”
“응. 물에 들어갔다 와서 그런지 맛있네.”
수제비를 먹으면서도 계속 내 눈치를 살피는 이부성을 보며 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바닷물을 하도 먹어 입맛이 없었는데 이부성이 이렇게 찾아와 음식을 갖다주니 없던 입맛도 돌았고 바닷물로 인해 체온이 떨어진 상태에서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니 피곤함이 가실 만큼 맛있었다.
“해용이 형, 전 언제나 형 편인 거 알죠?”
“……?”
“솔직히 지휘부 사람들 대부분이 형이 어제 원한다면 성주 자리에서 내려오겠다는 말과 역량이 안 되는 사람들한테 적절한 자리로 이동하라는 말에 모두 서운해하고 있거든요.”
“…….”
“그나마 발키리 쪽은 괜찮은데, 지원이 형은 어제 밤새 술 마시면서 형 욕을 종일 했다고 하더라고요.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형을 지금까지 키워 준 게 누구인데 어떻게 자신을 저격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부성을 쳐다봤다.
그런 뜻으로 얘기를 한 건 아닌데 오해가 있는 모양이었다.
재벌 2세, 3세.
외국 회사에서는 보기 드문데 우리나라에선 능력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회장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사장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레 어린 나이부터 회사 임원이 돼서 경영권을 승계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난 그 부분을 염려한 것이다.
현재 스카이 캐슬은 갑작스레 몰려든 인원으로 인해 영지 전반적으로 난관에 봉착해 있었고 지휘부는 역량 밖의 일까지 하려다 보니 아주 버거워하는 듯했다.
그래서 지금 나처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만 맡아서 했으면 하는 마음에 얘기를 꺼낸 거였는데 그 말이 능력 안 되면 내려오라고 들린 모양이었다.
“근데 걱정하지 마세요. 지원이 형 성격 아시잖아요. 하루 이틀 저러다가 형이 원하는 것처럼 태백산맥 길드 마스터로서 몬스터 레이드에만 전념한다고 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다행이긴 한데…….”
난 이부성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지원은 헌터다. 헌터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직업이었고 그를 저격하고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난 그가 자신의 본분에 전념했으면 한다.
내가 그동안 겪은 장지원은 영지 운영을 하는데 무언가 결정을 할 자리에 있을 깜냥이 되지 못했다.
그도 나처럼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며 스카이 캐슬 창단 멤버로서의 권한은 인재를 찾아 넘기면 좋을 듯싶었다.
“넌 안 섭섭하지?”
“네. 전 형 생각에 동의해요. 저도 어쩌다 보니 지휘부의 일원이 되긴 했지만, 머리가 아프긴 했거든요. 근데 발키리 길드나 최은빈 부대장한테는 강요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옆에서 보니까 누나들은 머리가 아프긴 해도 영지 일을 하는 게 재미있나 보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힘들게 꾸린 스카이 캐슬의 운영을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싶지 않은가 보더라고요.”
“응. 나도 강요까지 할 생각은 없어.”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윤미, 권수정, 박민정, 서지현.
난 그녀들도 나처럼 다 내려놓고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지냈으면 하는데 그녀들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한테도 농사짓지 말고 영지 운영과 레이드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강요를 한 듯싶었다.
“형 식사 드신 거죠?”
“응.”
“그럼 물질은 발키리 길드 헌터들에게 맡기고 오크성에 가면 안 돼요?”
“오크성에?”
“네. 영지민이랑 헬퍼들, 기술자들이 가서 수로 시설도 만들고 땅도 개간하고 있나 본데 다들 오크들이랑 같이 있는 게 불안한가 보더라고요.”
수제비를 다 먹은 이부성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제2 오크성을 쳐다봤다.
메티스와의 맹약으로 인간을 해치지 않은 것도 증명이 됐고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았지만, 아직 사람들은 오크들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아…… 알았어. 그럼 같이 가 보자.”
“네. 헤헤.”
반나절 함께 하며 작업을 하면서 물질하는 법은 충분히 가르쳐주었기에 이곳엔 굳이 내가 있지 않아도 될 듯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제2 오크성으로 걸어갔다.
* * *
“꾸웨웩.”
“꾸웨웨웩!”
“……이런 염병할 놈들이 어디서 이렇게 많이 나타난 거야!”
제2 오크성에 도착하자 영지민과 오크들이 농사는 안 짓고 손에 무기를 들고 들짐승들과 실랑이하는 게 보였다.
“어떻게 된 거죠? 설마 저놈들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건가요?”
“네. 말도 마십쇼. 일단 밭을 일궈 시범 삼아 감자랑 고구마, 무, 배추, 땅콩 모종들을 가져와 심었는데 저것들이 다 먹어 치웠습니다.”
“헐…… 그걸 보고 가만히 있었습니까?”
“당연히 막아 보려고 했죠. 근데 저것들이 너무 빨라서 헌터들도 못 잡겠답니다.”
털썩.
이근학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잔뜩 헝클어진 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들짐승이 빨라 봤자 얼마나 빠르다고…….”
“그냥 들짐승이 아닌 것 같아요. 저놈들 마나를 쓰는 것 같아요. 저희가 쏘는 화살마저 다 피하고 있어요.”
내가 의문스런 표정을 짓자 나현지가 잔뜩 약이 오른 표정으로 다가와 어찌 된 영문인지 설명해 주었다.
“화살까지 피한다고?”
“네. 그것뿐만이 아니라 지능도 상당히 높은 것 같아요. 아주 영악한 놈들이에요. 자기들이 우리보다 빠른 걸 알고 저렇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뒤로 빠지고 다가오길 반복하며 계속 모종들을 훔쳐 먹고 있는데 도무지 막아낼 재간이 없네요.”
“헐…….”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저 멀리 들짐승을 쳐다봤다.
‘토끼 아니 여우인가?’
사람 얼굴만 한 크기에 커다란 귀와 파란 눈과 새하얀 털을 하고 있어 보기엔 아주 귀여운 놈들이었는데 생긴 거와 달리 밉상 짓만 골라 하고 있었다.
“울타리를 치면…….”
“울타리 쳐봤자 소용없다네요. 여기 말고 다른 오크성들에도 저놈들이 나타났는데 사람 키만 한 높이도 뛰어넘는답니다.”
이근학이 하얀 여우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내가 오기 전에 쫓아내고 막아내 보려고 이래저래 다 해 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살랑살랑.
시원하고 청량한 노란색 빛을 머금은 빛들이 여우들을 감쌌다.
-어떻게? 내가 대신 죽여줄까?
성인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실프가 빙그레 웃으며 날 쳐다봤다.
“죽일 수 있어?”
-물론이지.
바람의 정령.
헌터들이 쏘는 화살조차 피할 만큼 빠르다고 했지만, 중급 바람의 정령의 손길을 피하지는 못하는지 실프의 얼굴에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잠시만 기다려 줘. 일단 하는 데까지 해 보고.’
난 실프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심 속에 출몰한 멧돼지.
하얀 여우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산에 먹을 것이 없어 도심 속으로 내려왔던 멧돼지들을 사살했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짐작건대 저 여우들도 언데드 몬스터로 인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여기까지 온 듯했다.
농사를 짓고 또 망치지 않으려면 모종마저 파헤쳐 먹는 저 여우들을 쫓아내고 못 오게 해야 하지만 죽이는 건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근학이 형님은 일단 오크들을 데리고 밭을 일군 땅 주위에 울타리를 쳐 주세요. 부성이 넌 스카이 캐슬에 가서 고기랑 야채랑 해서 저놈들이 먹을 만한 것을 좀 가져오고.”
“먹을 것을요? 혹시 저놈들한테 나누어 주려고요?”
“응. 배고파서 저러나 본데 일단 나눠 줘 보자.”
“……네, 알겠어요. 밖에서 들여온 것들을 가져오면 되죠?”
“어.”
이부성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삥을 뜯기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하지만 지구에서 들여온 것들을 먹고 이곳의 모종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그 정도는 양보를 할 수 있을 듯했다.
농사를 짓겠다고 살생을 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정신건강에도 좋을 듯했고.
* * *
“먹을 것 줄 테니까 여기 넘어오지 마.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계속 넘어오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캬아양!”
지구에서 가져온 그물망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앞에 고기와 감자, 고구마를 놔두었다.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거야. 절대 여기 넘어오면 안 돼.”
“카앙!”
눈과 귀가 커서 그런지 하얀 여우들은 먹을 것을 보고도 경계를 하며 선뜻 다가오지 않았고 난 편히 먹을 수 있게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이내,
킁킁.
킁킁.
오물오물. 냠냠.
오물오물. 냠냠.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하얀 여우들은 고구마와 감자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더니 조심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귀엽네.”
“네. 귀엽긴 엄청 귀엽네요. 제발 주는 것만 먹고 울타리는 안 넘어왔으면 좋겠네요.”
이부성이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하얀 여우들을 쳐다봤다.
네로와 그레이를 만났을 땐 시큰둥하더니 하얀 여우는 그가 보기에도 꽤 귀여워 보이는 모양이다.
기껏 밭을 일구고 모종을 심어놓은 것을 망친 것을 잊고 응원을 할 만큼 하얀 여우들 외형은 너무 귀여웠다.
“한 마리 잡아서 키웠으면 좋겠네요.”
애완동물에 관심이 없던 이부성 마저 눈에 하트가 그려질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