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하프 오크 (2)
‘다른 종족과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 지능이 높았던 건가?’
마치 항복이라도 하러 온 것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오크들을 보자 놀라움과 씁쓸함이 교차했다.
몬스터 아니 괴물.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오크는 그저 인간을 해치고 식인까지 하는 괴물일 뿐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다가오니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워할 필요 없어. 이놈들 순혈이 아니야.
‘순혈이 아니라고?’
-인간의 피가 섞인 것 같아.
‘그게 말이 돼? 어떻게 사람이랑? 오크랑?’
-왜 말이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피가 섞인 게 확실해. 하프 오크라면 전에 살던 차원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어.
‘인간이 왜? 미치지 않은 이상 오크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오크와 연을 맺지는 않지. 보통 오크에게 사로잡혔다가…….
운디네가 형상화되어 나타나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더 말해야 해?
‘아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난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크는 보통 블랙앵거스나 멧돼지. 아니다. 그 정도는 아니고 원숭이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어.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멍청한 종족은 아니야. 근데 거기에 인간의 피까지 섞이고 교육까지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동안 네가 의문스럽게 여겼던 부분들이 해소될 거야.
‘아…….’
난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오크들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매복하고 유인을 해서 기습공격을 했던 오크들.
난 그저 오래 산 오크가 있어 반복된 학습을 통해 조금 똑똑해 진줄 알았는데 단지 그것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휘리릭!
[오키도키 이 개자식! 너 잘 만났다.]
“꾸웩!”
카프리가 도착했고 그는 깃대를 들고 온 오크한테 도끼를 던지고 다짜고짜 주먹질하기 시작했다.
‘운디네.’
-응. 알았어.
따스하고 포근한.
파란색 빛을 머금은 물방울이 오크의 몸을 감쌌다.
말릴 틈도 없이 카프리가 던진 도끼는 오크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고 난 바로 아쿠아 워터를 시전했다.
박민정과 내가 짐작한 대로 오크들은 카프리를 찾은 게 맞고 또 안면이 있는 사이인가 본데,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처음 카프리를 만난 건 온몸에 상처가 나 오크성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짐작건대 그때 카프리를 노예로 부렸던 오크 중에 한 마리일 듯했다.
[카프리 말로 하자! 난 싸우려고 온 게 아니다. 인간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
[닥쳐. 아직도 비가 오면 너한테 맞은 곳들이 쑤시거든? 그러니까 일단 좀 더 맞자!]
“꾸웩.”
[내가 다른 놈은 다 용서해도 너는 용서 못 한다. 넌 때린 데 또 때리고. 때린 데 또 때리고. 내가 그때 말했지 지금 날 살려둔 걸 평생 후회하게 될 거라고.]
“꾸웩.”
카프리는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흥분한 얼굴로 오크의 허벅지를 계속 가격했다.
“꾸웩!”
오직 허벅지만 계속.
“꾸웩!”
그리고 계속 단 한 놈만 팼다.
“꾸웩!”
보아하니 대표로 온 저 오크가 카프리를 유난히 많이 괴롭힌 모양이었다.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뒤에선 언데드 놈들이 몰려오고. 앞에서 인간 놈들이 덤비고.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오크들 전부 다 언데드가 됐을 거다.]
[그래서 넌 더 맞아야 해. 너의 고문에 결국 자긍심 높은 내가 결국 굴복하고 너에게 협조를 했으니까.]
퍽!
“꾸웩.”
[그게 난 제일 열 받아.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오크한테 굴복한 내가 너무 수치스러웠다. 넌 나한테 모독감을 줬다.]
“꾸웩!”
카프리의 계속된 구타에 오크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허나,
‘운디네.’
-응 알았어.
오크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다. 난 그에게 들을 말이 있었고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알아야 했기에 계속해서 아쿠아 워터를 시전했다.
십 분, 이십 분…… 육십 분.
털썩.
카프리는 장장 한 시간 동안 구타를 하고 나서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성주 뭐냐! 왜 자꾸 치료해 주냐?”
“전 저 오크가 왜 절 찾아왔는지 궁금해요.”
“아주 교활하고 음흉한 놈이다. 대화할 필요 없다.”
“그래도 전 이유를 알고 싶은데 통역 좀 해 주면 안 될까요?”
“끙…… 알았다.”
내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자 카프리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한 시간 동안 때리면 분풀이를 해서 그런지 화가 좀 가라앉은 모양이다.
[오키도키. 저 인간이 왜 여기 왔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저 인간이 대장인가?]
[그렇다.]
카프리가 오크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내 오크가 날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인간과 싸우길 원하지 않는다.]
“인간과 싸우길 원하지 않는다고? 당신들은 인간을 해치고 식인을 했습니다. 지금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나의 어머니는 인간이다. 우리 부족은 인간을 해친 적이 없다.]
카프리는 나와 오크가 대화를 할 수 있게 통역해 주었고 정말 운디네의 말처럼 그는 하프 오크였다.
“오키도키 말이 맞다. 오키도키 부족은 식인하지 않는다. 오크 멍청하다. 배고프면 동족도 잡아먹을 만큼 본능에 충실하다. 하지만 지휘관의 말 잘 듣는다.”
오키도키.
보아하니 저 오크의 이름인 듯했다.
그리고 카프리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희 인간이 다 친구가 아닌 것처럼 오크도 마찬가지다.”
“그럼 정말 우리와 싸우고 싶지 않아서 휴전을 제안하려고 온 거라고요?”
[인간은 강하다. 그리고 인간을 해치면 반드시 보복하러 온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인간을 해치지 말라고 했다. 근데 일부 부족들이 내 통제를 따르지 않은 거다.]
오키도키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오크성들이 자리 잡은 숲을 쳐다봤다.
[헌데 지금처럼 계속 고립되어 있다면 결국 오크들은 인간을 공격할 거다. 먹을 것이 필요하다. 먹을 것만 있다면 인간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
“그럼 당신들은 결국 죽게 될 거예요. 아니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저 눈앞에 있는 오크성 하나는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어요.”
[알고 있다. 너희가 만든 무기 대단하다. 우리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항복하러 왔다. 먹을 것만 준다면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다. 강한 자가 모든 것을 다 갖는다. 그것이 인간의 법칙 아닌가.]
“흠…….”
난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오키도키를 쳐다봤다.
식인도 하지 않고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다는데 굳이 죽일 필요 있나 싶었다. 아니 이렇게 대화가 통하는 이성체를 죽이자니 그것도 그것대로 찝찝함이 몰려왔다.
[순혈 오크는 지능이 낮다. 그래서 본능에 충실하다. 허나 우리 하프 오크들의 말 잘 듣는다. 근데 배고프면 말 듣지 않는다.]
오키도키는 계속 한 가지 말만 강조했다.
식량.
오로지 그것만을 원했다.
오크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는 우리보다 수십 배는 더 넓었지만 언데드 몬스터로 인해 사냥을 나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좋아요. 무기를 버리고 모두 성 밖으로 데리고 나오세요. 그럼 식량을 주죠. 그 대신 인간을 해친 부족들은 모두 섬멸해야겠어요. 동의하나요?”
[동의한다. 나의 어머니도 인간이다. 식량만 준다면 우리도 돕겠다.]
“돕기까지 하겠다고요?”
[굶지 않아도 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어차피 오크들 배고프면 눈에 보이는 것 없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낫다.]
오키도키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만히 보니 진짜 오키도키의 얼굴은 제법 사람과 많이 가까운 듯했다.
“좋아요. 그럼 식량을 줄 테니 모두 데리고 나오세요.”
[동족들을 데리고 나와도 해치지 않고 먹을 것을 주겠다고 너의 이름을 걸고 메티스께 맹세해라. 그럼 데리고 나오겠다.]
“메티스?”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오키도키를 쳐다봤다.
-이곳 대륙을 관장하는 신중에 한 명인 것 같아. 너의 진명을 대고 신에게 맹세한 것을 어기면 마나를 사용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심하면 그에 그치지 않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고.
운디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약속을 지키면 되는 거잖아?’
-그치.
끄덕끄덕.
난 솔직히 신을 믿지 않는다. 헌데 정령도 있고 마나도 있고 지구의 현대 과학으로는 입증하지 못하는 존재와 이능이 가득한 세상인데 신이 있다고 해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나 안해용은 오크들이 무장을 버리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을 한다면 해치지 않고 먹을 것을 주겠다고 메티스께 맹세합니다.”
[고맙다. 동족들 데리고 나오겠다.]
무릎을 꿇고 내 맹세를 가만히 지켜본 오키도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으로 걸어갔다.
[아, 깜빡했다. 거기 있는 상자는 선물이다. 드레이크의 날개로 만든 거다.]
“드레이크?”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오키도키가 내려놓은 상자를 열어봤다.
“엥?”
상자 안에는 멧돼지 꼬치같이 양념이 된 고기가 나무 막대기에 꽂혀 있었다.
“마법 방어력에 좋은 음식이다. 오크들 배고프면 동족이고 뭐고 눈앞에 있는 거 다 잡아먹는다. 오우거는 물론이고 배고프면 드레이크한테도 덤빈다.”
카프리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드레이크면 용이라는 건가? 오크가 용도 이긴다고?’
-네가 생각하는 그 용은 아니고 그 아류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근데 드레이크도 꽤 강한 놈이기는 해.
‘얼마나?’
-S급이랑 A급 헌터 중간 정도?
“헐…….”
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오키도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배고픔이란 건 정말 무서운 듯했다.
F급으로 분류된 오크가 S급에 육박하는 몬스터를 사냥해 잡아먹으니 말이다.
‘이거 사람이 먹어도 되는 거야?’
-어. 먹어도 될 것 같아. 일단 내가 아는 독은 느껴지지 않아.
‘네가 모르는 독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럴 가능성은 꽤 희박하지. 선택은 너한테 맡길게.
따스하고 포근한.
파란색 빛을 머금은 물방울이 내 머리를 감싸왔다.
3,480,343,242개.
일단 운디네가 알고 있는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들어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일단 지금은 안 먹는 거로.”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운디네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몬스터로 만든 음식이라 그런지 왠지 거부감이 생겼다. 지금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고.
“성주님, 저기 오크들이 나오는데, 음식을 가져오라고 할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나와 한 약속대로 정말 오크들이 무장을 벗고 모두 성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얼핏 봐도 이만여 마리는 되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