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24화 (124/255)

124화. SSS급 정령사 (5)

“휴우.”

죽는 줄 알았네.

미국과 일본의 헌터들 얼굴에 서려 있던 전투 의지가 사라진 걸 본 후에야 난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겉으론 태연한 척 했지만 사실 난 정말 놀랐었다.

크리스와 시미켄의 검을 둘러싸고 있던 파란색 아니, 마치 깊은 바닷속 색깔처럼 파랗지만, 어둠을 머금고 있던 검기는 정말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대단한 마나를 품고 있었다.

-검기보다는 검강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아.

‘검강?’

-전에 소환 됐던 차원에선 오러 블레이드라고 불렸었거든. 최상급 익스퍼트, 아니 너희 세계 기준으로 A급 헌터들이 발휘하는 검기보다 한 열 배쯤 마나 농도가 짙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야.

따스하고 포근한.

파란색 빛을 머금은 물방울이 내 머리를 감싸며 운디네가 지식을 공유해 주었다.

소드 마스터의 상징 오러 블레이드.

S급 헌터를 일인 군단이라 부르는 이유가 저 오러 블레이드와 마나 필드 때문이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마나를 혼자 소유하고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과 아만티움제 무구는 물론이고 헌터의 검기 역시 베어버리는 파괴력까지 갖추고 있어 마스터의 마나가 소모될 때까지 같은 마스터가 아니면 상대의 이능을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었다.

-마스터가 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이라 이번엔 피해 없이 막아 냈지만, 다음부턴 조심해. 아무리 우리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는 부담스러우니까.

-노움의 어스 가디언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낭패를 겪을 뻔했어

.

노움, 운디네, 실프가, 카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대지의 수호자.

크리스와 시미켄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난 대처는커녕 그들의 공격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다행히 대정령이 된 노움의 방어 마법을 뚫지는 못했다.

SSS급 정령사.

그들이 소드 마스터라면 대정령이 된 친구들의 힘은 두 단계 위인 그랜드 마스터에 필적했기에.

그런데,

[시미켄상 잠시만 참으세요. 다행히 바로 치료 마법을 해줘서 밖으로 나가면 다시 원래대로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음 상자부터 가져와서 빨리 담아!]

[네, 알겠습니다.]

‘움직여도 된다고 한 적 없는데?’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무기를 내려놓은 미국과 일본의 헌터들이 당연하다는 것같이 크리스와 시미켄에게 다가가 응급조치를 하기 시작했다.

난 너무 어이가 없어 그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살려 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발키리 길드가 땅에 떨어진 무기를 회수해가자 되레 얼굴이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내,

“김용규 본부장님. 지금 바로 치료하지 않으면 시미켄 사무장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일은 스카이 캐슬의 룰에 따르는 거로 할 테니 일단 우리를 나가게 해 주세요.”

소세키라고 했나?

아까 상점에서 내게 따지고 들었던 일본인 헌터가 시미켄을 등에 업고 한국 헌터 협회 사람들이 바리케이드를 서고 있는 곳을 지나가려고까지 했고 김용규 본부장의 얼굴이 마치 똥이라도 씹은 거같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이 사달을 내 놓고 그냥 나가시겠다?”

“안해용 성주의 모독적인 발언에 시미켄 사무장이랑 크리스 사무장이 화를 참지 못해 공격을 한 건 인정하겠소.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추궁한다면 그 죄 역시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일! 본! 헌터 협회를 대표해 부탁하니 일단 시미켄 상의 치료부터 받게 해 주길 바랍니다.”

“모독적인 발언에 화가 나서 공격을 했다? 그러니 죄를 추궁하면 달게 받겠다? 이 새끼가 누굴 빙다리 핫바지로 보나!”

뿌드득!

챙! 챙! 챙챙! 챙챙!

소세키가 낯짝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자 김용규는 이까지 갈며 화를 냈고 그의 옆에 서 있던 재난 관리 본부 소속 헌터들이 소세키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너무 오버하는 것 같은데?’

난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김용규를 쳐다봤다.

우리야 게이트 안에 터를 잡고 있으니 어떻게 비벼 볼 만했지만, 한국 입장에선 미국과 일본과 척을 지게 되면 꽤 골치 아픈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김용규와 한국 헌터 협회 소속 사람들은 더 곤란한 상황이 생기기 전에 빠지는 게 좋을 듯했다.

진정 화가 나서 칼을 들이밀었다 해도 저들을 응징하는 데 한계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역시나,

‘믿는 구석이 있다. 이건가?’

이곳에 있는 미국과 일본의 헌터들 중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되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시미켄상은 아국에 두 명밖에 없는 S급 헌터입니다. 치료할 시기를 놓쳐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소세키는 김용규를 겁박했다.

“우리도 우리지만 크리스 사무장도 바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금지 구역에 들어가 사살된 아국의 헌터들의 행동도 실수를 인정할 테니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마세요.”

“흠…….”

김용규가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소세키 저놈 뻔히 내가 이곳의 책임자인 걸 알 텐데도 나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계속 김용규만 빤히 바라봤다.

‘알아서 하세요.’

난 김용규와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음 같아선 그냥 차라리 다 죽여 버릴 걸 그랬나 싶을 만큼 뒤늦게 후회가 들었지만,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게 맞을 듯했다.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의 편에 서준 김용규에 대한 배려였다.

정황상 시미켄과 크리스는 이곳을 도모하려 한 듯했지만 저런 식으로 오리발을 내밀면 대한민국 정부 관료로선 방법이 없었다.

미국과 일본.

사실 여부를 떠나서 두 거대 강국은 대한민국 정부를 압박해 그것을 진실로 만들 힘이 있었으니까.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니 여기서 일을 키워봤자 스카이 캐슬이나 대한민국 모두 좋을 게 없기에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는 게 나을 듯했다.

그런데 그때,

“임풍훈 팀장.”

한참 동안 굳게 다물어 있던 김용규의 한쪽 입술이 올라가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고 옆에 서 있는 재난 관리 본부 소속 헌터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끄덕끄덕.

휘이익.

“컥!”

털썩.

“이제 다친 사람이 사라졌으니 밖으로 나가도 되지 않겠지요?”

임풍훈의 검이 시미켄의 목을 가르고 지나가 피 분수가 뿜어졌다.

“…….”

“…….”

“…….”

발키리, 미국 헌터 협회, 일본 헌터 협회. 소식을 들고 왔는지 어느새 옆에 자리한 태백산맥 길드 헌터들과 영지민까지.

김용규와 임풍훈의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과 반응에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지 입을 쩍 벌리며 얼빠진 얼굴을 했다.

“김용규 본부장!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긴? 아픈 사람이 있어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해서 그 수고를 덜어 줬잖아?”

김용규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소세키를 쳐다봤고 눈앞에서 시미켄의 죽음을 본 소세키는 바지에 오줌을 지릴 정도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부들부들.

부들부들.

일본의 S급 헌터. 시미켄.

그의 죽음으로 일본인 헌터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고 김용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크리스를 쳐다봤다.

“이쪽은 해결된 것 같은데 그쪽도 밖으로 나가야 할 사람이 있나요?”

하늘 목장 입구 주위로 진득한 살기가 가득했다.

짐작건대 크리스 역시 같은 대답을 하면 죽일 것처럼 보였다.

“크리스 사무장. 다시 물을게요. 소세키의 말처럼 정말 모독적인 발언에 화가 나서 공격을 한 건가요? 이곳을 도모하려 했던 게 아니고?”

[왜 이러는 겁니까? 김용규 본부장 당신도 안해용 성주를 못마땅해하시지 않았습니까?]

“제 질문은 그게 아닙니다.”

김용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크리스를 노려봤다.

“묻는 말에 답하세요.”

[……이곳을 도모하려 했다는 안해용 성주의 말이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순간 화가 났고 경솔하게 행동…….]

끄덕끄덕.

“컥.”

크리스의 대답이 못마땅했는지 김용규는 다시 임풍훈을 쳐다봤고 단칼에 크리스도 목숨을 잃었다.

나의 공격으로 이미 양팔을 잃고 마나마저 뒤엉켜 있던 그는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

“…….”

시미켄에 이어 크리스까지 죽임을 당하자 하늘 목장 앞 입구에 무서운 침묵이 감돌았다.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안해용 성주님을 공격한 것만으로도 당신들은 모두 사형이야!”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김용규가 다시 입을 열며 미국과 일본의 헌터들을 쳐다봤다.

“화가 나서 공격을 했다고 하면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나?”

“우릴 모두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하고도 대한민국이 무사할 것 같습니까?”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두려워했던 것도 잠시 소세키가 비명을 지르며 협박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임 팀장.”

“잠시만. 잠시만!”

털썩!

“살려 주십쇼. 전 다른 뜻으로 말한 게 아니고 저희가 이곳에서 모두 죽으면 본국과 미국에서 오해하고 대한민국에 누를 끼칠까 염려가 되어서 한 말입니다.”

김용규가 다시 임풍훈을 쳐다보자 소세키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을 비볐다.

S급 헌터 두 명이 눈앞에서 죽는 걸 봐서인지 자신감 있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런! 그런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군요. 소세키상 그럼 다시 한 번만 더 물을게요. 상위 헌터들을 숨기고 들어와 금지 구역에 들어가고 또 그걸 핑계로 압박을 하던 것도 모자라 안해용 성주님을 공격한 진짜 이유가 뭐죠?”

“그건 진짜 안…….”

“신중히 생각해 보고 대답하세요. 세 번은 없습니다. 당신 말고도 이곳엔 진실을 말해줄 사람이 너무나 많네요.”

소세키가 또 같은 대답을 하려 하자 김용규가 말을 끊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미국과 일본의 헌터들을 쳐다봤다.

짐작건대 저대로 두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한 명씩 죽이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리고 이내,

“임 팀…….”

“미스릴과 엔트의 줄기가 필요했습니다. 저희는 시미켄이 시키는 대로 한 겁니다. 믿어 주십쇼.”

소세키가 손이 발이 되듯 비비며 결국 진실을 토해냈고,

“…….”

“…….”

미국과 일본 헌터들의 얼굴이 마치 똥이라도 씹은 거처럼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때,

스르륵스르륵!

스르륵스르륵!

“컥.”

“컥.”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죽습니다.”

수십여 명의 헌터들이 소세키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발키리 길드 헌터들이 쏜 수백 발의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가 되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짐작건대 그들은 소세키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죽이려 한 듯했지만 이미 내가 한번 기습을 당해서인지 발키리 길드 헌터들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져 있었고.

스르륵!

스르륵!

“컥!”

“컥!”

“움직이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몸만 꿈틀대도 가차 없이 화살을 날렸다.

“골치 아프게 생겼네.”

머리가 지끈거렸다.

소세키의 입에서 진실이 나온 것은 다행이었지만 김용규와 한국 헌터 협회가 문제였다.

난 당연히 대충 얼버무리고 내보낼 줄 알았는데 김용규의 행보는 너무 파격적이었다.

“성주님, 제가 이리 나선 게 못마땅하십니까?”

“그리 달갑지는 않네요.”

“저도 성주님이 그리 마음에 드는 건 아닙니다. 근데 어쩌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이 아무리 미워도 까도 내가 까야지. 다른 사람이 까면 기분이 나쁜 것을.”

“…….”

“저들이 스카이 캐슬을 도모하기 위해 성주님을 공격했을 때부터 대한민국과도 적이 된 겁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랑 같이 미국과 일본이랑 싸우겠다?”

“싸워야 한다면 싸워야죠. 이아영, 이어진 그리고 헌터 협회에 가입한 길드의 모든 마스터와 이미 얘기가 되어 있던 부분입니다. 그 누군가 스카이 캐슬에 위협을 가한다면 이유 불문하고 같이 돕기로.”

“헌터 협회도요?”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한국 헌터 협회 헌터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끄덕끄덕.

끄덕끄덕.

그들은 망설이는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주님과 이곳 스카이 캐슬의 아이템이 없으면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르는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주님을 해하려 했는데 제가 어찌 참을 수 있었겠습니까? 성주님을 공격하는 건 대한민국을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인데.”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하늘을 쳐다봤다.

솔직히 지금 김용규가 하는 말이 그동안 먹었던 그 어떤 사탕과 초콜릿보다 더 달콤하게 들려왔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짐작건대 잔뜩 붉어져 있을 듯했다.

김용규와 헌터 협회는 내가 SSS급으로 각성한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 편을 들었고 이제는 같이 싸우기까지 한단다.

나를 공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국과 일본을 적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좋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헌데,

‘그런 약속을 했으면 미리 언질 좀 주지.’

차마 난 지금 내 속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리 경계를 하고 신경전을 벌였는데 갑자기 살갑게 대하는 건 왠지 남사스러웠다.

“이들의 마나 홀을 파괴하고 금지 구역에 보내시죠. 일단 미국과 일본에는 용의 계곡에 레이드를 갔다가 전멸한 것으로 알리겠습니다.”

“그걸 믿겠습니까?”

“이 괘씸한 인간들을 그냥 돌려보낼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안 믿어도 할 수 없죠. 아니 저쪽에서도 차라리 그렇게 알리는 걸 원할 겁니다. 어차피 진실을 알려도 자기네들은 몰랐다고 하거나 애초에 아예 인정하지도 않을 테니까.”

“진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쟁이라는 거 그리 쉽게 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건들면 저들도 두 발 뻗고 자지는 못할 테니까.”

“흠…… 좋아요. 그렇게까지 얘기하시니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으앜!”

“으앜!”

마나 홀이 부서지는 고통으로 인해 미국과 일본의 헌터들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