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SSS급 정령사 (3)
“카프리, 저 아파요!”
“성주 안 아프다. 거짓말이다.”
“진짜예요. 이거 보세요. 저 지금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예요.”
“멀쩡하다. 성주 나쁘다. 내가 이러려고 해골 세트를 만들어 준다고 한 게 아니다.”
“끙…….”
화가 나서 달려온 듯한데 도끼를 던진 게 미안하지 카프리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날 채근했다.
“오크들도 이렇게까진 일 안 시켰다.”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가만히 카프리를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진짜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한국 천여 명.
일본 천여 명.
미국 천여 명.
나름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예상보다 더 빠르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이세훈이 했던 말처럼 정말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일을 주도했던 날 많이 원망하고 있는 듯했다.
오크까지 비교하며 힘들다고 하는 말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헌데,
‘포션도 빨리 더 많이 만들긴 해야 하는데…….’
나도 단지 권태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것만은 아니었다.
중국의 청방 놈들이 드워프를 노예로 잡아 혹사하고 있었고 그들을 구하려면 회복 포션이 더 많이 필요했으니까.
전쟁.
청방 놈들의 행태를 보아 말로 좋게 하면 절대 드워프를 풀어주지 않을 것 같았고 방법은 딱 하나였다.
만반의 준비를 해 배를 타고 가서 그들을 공격해 구해 오는 거였다.
하지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도 아니고.’
차마 난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당장 구하러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니 구하러 간다 해도 구출을 백 프로 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섣불리 얘기했다가 괜히 그의 걱정만 더 키울 수도 있기에.
그런데 그때,
-저번에도 내가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인간은 다 친구인가?
‘어?’
-같은 드워프라고 해도 다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라고. 지금 너희와 일본, 그리고 미국처럼 같은 인간이라 해도 꼭 사이가 좋고 친한 건 아니잖아.
운디네가 형상화되어 나타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운디네를 보며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한 오지랖과 노파심에 또 생각만 너무 앞섰던 모양이다.
“……노예로 잡혀 있는 드워프를 봤어요. 그래서 그들을 구하려면 포션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하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 부족 드워프 아니다. 우리 부족 드워프들 팔십 년 전에 언데드 몬스터한테 다 죽었다.”
“팔십 년 전에요?”
“대충 그 정도 된다. 나도 어렸을 때라 정확히 기억 안 난다.”
“기억이 안 난다고요? 그 말은 지금 팔십 년 전에 살아있었다는 얘기인가요?”
“……무슨 말인지 어렵다.”
“나이를 묻는 거예요. 직접 본 것처럼 얘기해서.”
“직접 봤다. 나이는 백 살까지 세다가 귀찮아서 안 센지 오래됐다.”
화를 내던 것도 잠시 어느샌가 카프리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변해 있었다.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 했지만 이렇게까지 나이가 많고 부족원들 모두가 죽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자들이 누군지 모른다. 성주랑 멍청이 원, 투, 쓰리 그리고 이성민과 제자들이 지금 내게 더 소중하다. 나 때문이라면 굳이 구하러 갈 필요 없다.”
“흠…….”
난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말로는 신경 안 쓴다고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왠지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그럼 그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 닥친 일부터 해결해 볼게요.”
“믿는다.”
“네.”
하고 싶고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오늘은 이쯤만 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같은 종족이 살아있다는 말에 카프리가 왠지 혼란스러운 듯했다.
“세훈아, 지휘부 좀 소집해 줘.”
“어, 알았어.”
난 이세훈과 함께 지휘 막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 *
“저희도 거의 하루 열여덟 시간씩 낚시만 하고 있어요. 근데도 헌터들이 원하는 만큼 물량을 되지 못하고 있고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계속 요리만 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자고 있는데도 일본인과 미국인들이 와서 깨울 때도 있고요.”
지휘부를 소집하고 회의를 열자 사람들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고충을 토해냈다.
다들 카프리와 공방 헬퍼들만큼이나 고생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난 씁쓸한 표정을 지휘부 인원들을 바라봤다.
카프리만큼이나 부쩍 야윈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드워프에게 목줄을 채우고 노예로 삼았던 오크나 청방놈들과 내가 다를 게 뭐가 있나 싶었다.
“이 정도로 힘들었으면 제가 나서기 전에 지휘부에서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던 거 아닙니까?”
“저희도 뭔가 조치를 취해 보려고 했지만 성주님께서 저들에게 영지에 방문해 토벌을 도우면 아이템을 팔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최대한 그걸 지키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이능 아이템을 제작하고 채취하는 사람만 힘든 게 아니라 영지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다 그와 비슷하게 일을 하고 있고요.”
“하아…….”
난 지휘부 사람들을 둘러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농사지을 때는 세상 편하더니 성주 일을 하려니 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발키리 지윤미, 박민정. 권수정. 김성준, 유거성. 최유라.
태백산맥 장지원, 김현규, 김영균, 이부성. 이세훈.
마녀 부대. 최은빈.
각국에서 공무원들과 내정을 도와줄 전문 인력을 보내주었지만, 지휘부는 이세훈을 제외하고 원년 멤버 그대로였다.
이래서 내가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앞에 있는 사람들이 헌터와 헬퍼로 이곳에 들어온 것처럼 나 역시 처음엔 이곳에 헬퍼로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우리끼리 점점 커지는 영지와 많아지는 사람들을 통제하려 하니 한계에 부딪힌 듯했다.
헌데 당장 외부인들에게 영지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에 올릴 만큼 중책을 맡기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 어느 하나 신뢰를 할 만한 세력이 없었으니까.
“일단 헌터들과 헬퍼들의 근무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제한하겠습니다.”
“하루 여덟 시간이요? 그럼 물고기와 아이템이 지금 나오는 양의 절반도 안 될 텐데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영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 외부인들을 불러들인 건데 정작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이 고단한 시간을 보내면 아무 의미 없으니까요. 각국의 인솔자에게 얘기해서 양해를 구하세요.”
난 지휘부 사람들과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얘기를 했다.
더 이상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초래되면 안 될 듯했다.
그런데,
“흠…….”
“흠…….”
지휘부 사람 그 누구 하나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좋게 얘기로 해선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세훈아, 네가 인사 총괄을 맡아 줘.”
“인사 총괄?”
“원래 이런 일은 네가 전문이잖아. 네가 직접 태백산맥 헌터들로 인원을 꾸려서 하루 여덟 시간 이상씩 근무하는 인원이 보이면 힘으로라도 끌어내서 쉬게 만들어.”
“…….”
“이곳에 애착이 있어 남은 사람도 있겠지만 지구에서의 삶이 고단해서 남기로 한 사람들도 많을 텐데 여기서 더 힘들게 할 순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밖에서 인원 관리를 했던 것처럼 이곳 사람들의 근무환경을 책임져 줘.”
“그래. 알았어.”
이세훈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해용이 형, 큰일 났어요. 상점 거리로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오전 11시.
이부성이 호들갑을 떨며 내게 달려왔다.
“왜? 무슨 일인데?”
“그게 세훈이 형이랑 헌터들이랑 싸움이 난 것 같아요.”
“싸움? 혹시 아이템 때문에 그래?”
“네. 그런 것 같아요. 10시 30분에 상점을 오픈했는데 30분 만에 품절이 됐나 보더라고요.”
“끙…… 알았어. 일단 가 보자.”
난 앓는 소리를 내며 상점 거리로 뛰어갔다.
컴플레인이 걸릴 거라곤 예상을 했지만 이렇게 바로 생기 줄은 몰랐다.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도 상품 제작이 원활하지 못해 이곳에 도착한 지 열흘이 다 되어 가는데도 해골 세트를 받지 못한 헌터들이 수두룩한데 근무 시간까지 줄였다는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저희도 성주님의 지시 때문에 그런 것이니 양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이게 양해를 구하는 겁니까. 일방적으로 결정을 하고 저희는 무조건 따르라는 거 아닙니까?”
상점 거리에 도착하자 이세훈과 일본인 헌터 한 명이 실랑이를 하는 게 보였다.
한국말이 능숙한 걸 보니 통역을 위해 일부러 데리고 온 사람인 듯했다.
통역하는 사람 말고도 뒤에 있는 수십여 명의 일본인들이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열흘이라…….’
카프리와 공방 헬퍼들이 잠자는 시간마저 줄여가며 일을 했는데도 헌터들의 불만이 계속 쌓여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랜 기다림에 장사 없다고 다들 어지간히 화가 난 듯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야 할 듯했다.
난 이세훈과 일본인 사이로 들어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이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오래 기다린 걸 알지만 저희 영지민도 그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을 했습니다. 이대로 두면 과로로 쓰러질 것 같아 내린 결정이니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어디까지 이해를 해야 하는 겁니까? 스카이 캐슬에선 우리가 이곳에 와서 몬스터 토벌을 도우면 아이템을 판매하겠다고 약속했고 그것만 믿고 비행기까지 타고 와 사냥을 하고 있는데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흠…….”
난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일본인을 쳐다봤다.
사정이 있어 양해를 구하고 좋게 잘 타이르는데도 그는 되레 더 언성을 높이고 윽박질렀다.
그나마 미국 쪽 헌터들은 따지고 들진 않았지만, 눈빛은 일본인을 응원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이 하는 말을 일본 헌터 협회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뭐라고요? 지금 절 협박하는 겁니까?”
“협박하는 게 아니라 물어보는 겁니다.”
찌릿.
난 인상을 쓰며 일본인을 노려봤다.
김용규를 견제하고 몬스터 토벌을 위해 불러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아이템을 살 기회를 준 것인데 너무 자기네 쪽 위주로만 얘기했다.
그런데 그때,
{소세키상 큰일 났습니다. 저희 헌터들이 한국 헌터들에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또 다른 일본인이 뛰어왔고,
{썅! 어디야!}
{저쪽입니다.}
줄을 서고 있던 수백여 명의 일본 헌터들이 하늘 다리가 있는 산을 향해 달려갔다.
* * *
일본인들을 따라가자 하늘 목장을 올라가는 길목 앞에서 발키리 길드와 천여 명의 일본인 헌터들이 대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는 십여 명의 일본인 헌터들이 보였다.
“모두 무기 내려놓으세요. 지금 저희랑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전쟁하겠다는 게 아니고 이유를 먼저 들어야겠습니다. 왜 아국의 헌터들을 이렇게 무참히 살해했는지.”
“이들은 금지 구역에 들어왔고 체포를 하려는 저희에게 무기를 들고 반항을 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요?”
지윤미 마스터가 잔뜩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일본 헌터 협회 사무장 시미켄을 노려봤고,
“고작 그런 이유로!”
뿌드득!
시미켄 역시 이까지 갈며 지윤미 마스터를 노려봤다.
일촉즉발.
양쪽의 헌터들 모두 두 지휘관의 지시가 떨어지면 바로 전투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