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SSS급 정령사 (1)
몸이 뜨거워져서일까.
눈꺼풀에 돌이라도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휴우.”
사람들이 저 멀리 떨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애써 들어 올리고 있던 눈꺼풀에 힘을 뺐다.
에메랄드빛을 뽐내며 넘실거리는 파도.
코끝을 간질이며 살랑살랑 부는 바람.
새로운 새싹을 기다리며 지렁이가 꿈틀대는 대지.
천여 마리에 이르는 닭을 삶기 위해 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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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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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는데도 주위에 있는 모든 움직임이 느껴졌고 마치 그 기운들이 내게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자고 싶어.’
먹고 살기 위해 내리 이틀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일만 하다가 침대에 누운 것처럼 점점 정신이 희미해졌다.
* * *
[장군, 빨리 피해야 합니다. 이렇게 있다간 전멸입니다.]
[우린 이곳을 사수한다. 우리가 후퇴하면 저 많은 몬스터들이 게이트를 넘어올 테니까. 어떡해서든 이곳에서 막아내야 해.]
어깨에 네 개의 별 문양이 새겨진 견장을 찬 백인 사내와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견장을 찬 사내가 실랑이를 하는 게 보인다.
그들의 뒤엔 수천, 아니 만여 명이 넘는 군인들과 헌터들이 있었고 앞에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탕! 탕! 탕탕!
다다다다다다다!
우르르 쾅쾅!
우르르 쾅쾅!
스르륵!
스르륵!
해 질 녁 노을처럼 붉은빛을 발하고 있는 게이트를 사수하기 위해 서양인들이 현대식 무기까지 사용하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허나,
“크하아아아아.”
“샤아아아악.”
“구오오오오.”
몬스터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밑 듯이 계속 몰려왔고 사람들을 해치며 진군했다.
거미형 몬스터 타란툴라.
뱀의 하체를 가진 라미아.
거대 거북이 터틀 드래곤.
커다란 눈동자의 모양을 한 비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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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언데드 몬스터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덩치와 스피드를 갖고 있었고 독을 뿜어 대고 비홀더는 사람을 굳게 하는 마법까지 사용했다.
‘저대로 놔두면 다 죽을 텐데…….’
난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몬스터들이 몰려들고 있는 근원지를 쳐다봤다.
몬스터의 뒤쪽엔 에메랄드빛을 뿜어 대는 바다가 보였고, 그 사이에 있는 바닥에 카프리가 그리는 마법진과 같은 특이한 모양의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몬스터들을 해치워 줘.’
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리키고 마치 마우스로 드래그를 하는 것처럼 그대로 몬스터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내,
“크하아아아아.”
“샤아아아악.”
“구오오오오.”
잔잔했던 바다는 커다란 파도를 일으키며 해변을 넘어 육지까지 다다르며 조금씩 몬스터를 삼키기 시작했다.
“쿠과가가가가.”
“콰르르륵.”
수많은 몬스터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대자연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빠르게 바다로 빨려 들어갔다.
-멈춰. 이러다 저 사람들까지 위험해지겠어. 그건 너도 원하는 게 아니잖아?
운디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작아졌네?’
사람의 형체만큼이나 커졌던 운디네가 다시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더 작아져 손바닥만 해져 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얼른 정신 차려. 지금 이건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라고? 그럼 여긴 어딘데? 그리고 내 몸은 왜 안 보이는 거고?’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운디네를 쳐다봤다.
난 분명 스카이 캐슬에서 농사를 짓다가 기억을 잃었는데 지금 이곳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곳이었다. 저 사람들 역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고.
게다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환적인 기분이 들었고 내 몸도 보이지 않았다.
-스카이 캐슬에서 대륙 동쪽으로 일만 킬로미터 정도 지점인 것 같아. 네 몸은 지금 헌터들이 막사로 옮겨 놨어. 그러니까 얼른 정신 차려. 넌 지금 여기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느끼고 있는 걸 공유하고 있는 거야.
‘이게 지금 너의 시야라고?’
-상급, 아니 대정령이 되면서 공감 능력이 확장됐어. 빨리 끊어내야 해. 계속 이렇게 있다간 인간의 정신력으론 버텨내기 힘들 거야.
‘후우…….’
운디네의 절박함과 불안함이 내게 전해졌고 난 가만히 심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고통도 없고 편안했지만, 그녀가 저러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여긴 또 어디지?’
이번엔 사막이 보였다.
“마스터 빨리 피해야 해요. 해골들이 너무 많아요.”
“뱀파이어는 어쩔 수 없다 쳐도 해골들이라도 막아야 해! 이대로 있으면 또 웨이브야!”
꽃문양이 새겨진 하얀색 로브를 입은 수백 명의 헌터들.
‘어라? 이아영 마스터랑 이슬비 헌터네?’
자세히 살펴보니 이번엔 아는 얼굴마저 보였다.
그리고,
[젠장, 좀비 웨이브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괴물들은 뭐야!]
[일단 모두 후퇴한다.]
사막 오른쪽 끝에는 일본 자위대와 헌터들이 또 다른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거대 도마뱀 바실리스크.
거대 스콜피온.
거대 개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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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봐도 사막은 TV에서 본 사하라 사막처럼 끝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고 넓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난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는 것처럼. 양쪽 모두 동시에 보였다.
사막 중간에 바닥에 전에 보았던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고 거기서 몬스터들이 뛰쳐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플로라부터!’
난 플로라 길드를 괴롭히고 있는 수천의 해골들이 있는 발밑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쩌저저적.
쩌저저적.
땅이 갈라지며 해골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여기도.’
쩌저저적.
쩌저저적.
플로라 길드가 안전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난 일본 사람들이 있는 곳에 몬스터도 모두 땅 밑으로 떨어뜨렸다.
아무래도 난 지금 꿈을 꾸는 게 맞는 듯했다.
그저 손을 뻗고 의지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홍해의 물이 갈린 것처럼 땅이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
-빨리 정신 차려야 해. 너 이러다 진짜 죽어. 힘도 그만 쓰고.
‘노움?’
이번엔 할아버지의 형상을 한 노움이 나타나 내게 경고를 했다.
운디네와 마찬가지로 그도 손바닥만큼 작아져 있었다.
‘진짜 이게 꿈이 아니라고? 해일을 만들고 땅을 갈랐는데?’
-거의 다 왔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집중해.
노움은 아무런 설명 없이 계속 날 다그쳤다.
두려움, 불안함, 걱정…….
헌데 그의 감정만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후우!’
난 심호흡을 하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마치 자각몽을 꿀 때처럼 어떡해서든 내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려 애를 썼다.
그런데,
‘여긴 또 어디지?’
이번엔 마치 파리에 있는 성당처럼 아름답고 기품 있어 보이는 건축물이 보였다.
[어이. 거기 조심해. 성수 오염되면 너 하나 죽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다행히 이번엔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인가? 저 복장은 북한 병사 옷 같은데?’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그들을 쳐다봤다.
말하는 것을 듣자 하니 중국말 같은데 복장은 북한 군인 옷을 입고 있었다.
‘늑대인간의 숲 베이스캠프 위쪽인가?’
처음 보는 곳이었지만 난 막연하게나마 이곳의 위치가 가늠되었다.
-어. 맞아.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집중해.
끄덕끄덕.
난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오빠, 제발 정신 차리세요. 흑흑.”
“해용아. 아버지다. 아버지. 아버지 말 안 들리니?”
“해용이 형, 정신 차리세요. 저 부성이에요. 부성이.”
.
.
.
수정이, 아버지, 이부성, 이세훈, 장지원…….
소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어디? 어디에 있는 거예요?”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들의 체취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현실의 몸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려야 하나?’
난 다시 눈을 뜨고 계곡을 찾았다.
가끔 자각몽을 꿀 때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꿈에서 깨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빨리, 빨리 만들라고 이 짐승 같은 놈들아!]
[하고 있다. 우리도 쉬고 싶다. 먹을 것은 바라지도 않을 테니 잠이라도 좀 자게 해줘!]
“이 새끼들이!”
이번엔 청방 길드의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은 헌터들이 보였다.
그들은 수십 명의 드워프에게 목줄과 수갑을 채워 놓고서는 무언가를 만들게 해 놓고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참아. 너 이번에도 힘쓰면 그땐 정말 소멸이야.
끄덕끄덕.
운디네, 노움, 실프에 이어 카사가 나타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고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카이 캐슬 위쪽 얼음 지대를 지나 왼쪽 용암 지대.
‘아니 배가 있으니 바로 11시 방향으로 쭉 올라가면 되려나?’
난 눈을 감고 드워프들이 고통받는 곳의 위치를 가늠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저들은 카프리의 동족들일 테고 반드시 구해내야 했다.
카프리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텨내지 못했을 테니까.
카프리는 이미 우리와 가족이었고 그의 동료일지도 모르는 이들을 핍박하고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미국과 일본, 북한, 중국, 얼음 지대의 러시아까지.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지구에 생긴 게이트는 모두 이곳 대륙과 연결이 되어 있었고 다들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데 중국의 청방놈들만 드워프를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며 무기를 만들고 있었다.
짐작건대 중국의 청방 길드는 우리만큼이나 아니 우리보다 이곳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이미 개척해 발전을 시키고 있는 듯했다.
청방놈들이 머무는 성은 우리보다 더 높았고 또 견고해 보였다.
“오빠, 오빠 저 보이세요?”
“……!”
“해용아, 아버지다. 아버지.”
“형, 저 부성이요.”
“……어떻게 된 거예요? 다들 얼굴이 왜 이래요?”
“해용아, 이거 몇 개냐?”
“세 개잖아.”
“오빠. 흑흑.”
“아들…….”
“해용이 형…….”
“휴우. 다행이다. 무사히 깨어나서.”
시간의 흐름조차 가늠이 안 되는 긴긴 여행을 하고 일어나자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다 서러운 눈물을 토해내며 날 끌어안았다.
처음 운디네를 만나고 각성을 하고 기억을 잃었을 땐 내 곁에 이부성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과분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 * *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드래곤을 제외하고 4대 정령 모두와 계약을 한 인간은 네가 처음이야. 게다가 넌 반신인 세계수의 축복까지 받았고. 그래서 우리도 왜 갑자기 진화했는지는 가늠이 안 돼. 다만 원래 대 정령까지 진화할 만큼의 정령력이 있었는데 이번에 네가 깨달음을 얻으며 이제야 각성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야.
“대정령?”
-자연일체. 이제 능력을 사용하는데 정령력은 필요 없어. 그냥 자연의 힘 그대로를 갖다 쓰면 되니까. 근데 함부로 남용하지는 마. 아직 너의 정신력으론 감당이 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번에야 운이 좋아서 넘겼지만, 인간이 함부로 다룰 힘이 아니야.
‘알았어.’
끄덕끄덕.
잠깐 잠을 잔 것 같은데 어느새 일주일이 흘러 있었고 다시 하루 동안 몸을 추스르고 나서야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용이 형, 일어나셨네요. 근데 어떻게 아신 거예요?”
막사 밖으로 나오니 이부성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달려온 것도 잠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뭘?”
“아니 형이 얘기한 것처럼 미국과 일본에 뭔 일이 있나 알아봤는데 둘 다 웨이브가 일어날 정도로 몬스터가 몰려와서 해일과 지진이 발생했지만, 사람들은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몬스터만 몰살을 했대요.”
“아…….”
“그리고 부산 게이트로 들어간 플로라도 지진으로 인해 몬스터들이 몰살되어 웨이브가 생기지 않았고요.”
“역시 꿈이 아니었구나.”
“네?”
“믿기 힘들겠지만, 그것들 내가 한 것 같아.”
“네?”
“몸은 잠들어 있었지만 나 정신은 멀쩡했거든. 내가 직접 한 건 아니지만 운디네랑 노움의 도움을 받아서…….”
덥석.
“……?”
“열은 없는데?”
한참 진지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부성이 내 이마와 턱 그리고 자신의 이마를 만지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형, 잠시만 여기 계세요. 혹시 모르니까 제가 최유라 팀장 불러올게요.”
“…….”
후다다다닥.
병원이 있는 곳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