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헌터의 도시 (5)
윙윙윙윙윙윙.
윙윙윙윙윙윙.
십여 대의 트랙터가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땅을 갈기 시작하자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백여 명의 영지민이 갈퀴를 들고 자갈을 골라내고 수평화 작업을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오늘 안에 끝낼 수 있겠는데?”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축축이 젖은 흙을 들어내며 뒤집히는 땅을 쳐다봤다.
만여 평정도 되려나?
혼자서 했으면 몇 날 며칠은 걸렸을 텐데 많은 사람과 함께 하니 황무지였던 거친 땅이 순식간에 논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농협에서 온 사람들인가?”
자세히 살펴보니 영지민 사이에 녹색 모자를 쓴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농기계 작동법과 땅을 일구는 법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내,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 내가 젊었을 때 안 해 본 일이 사람이 없는 사람이야. 이까짓 거는 일도 아니야.”
십여 분 정도 짧은 설명을 들은 아버지와 영지민이 트랙터에 올라가서 땅을 갈기 시작했다.
“뭐야? 아버지도 하잖아?”
“우리 아버지도 소싯적에 농사 좀 지어봤나 보지.”
아버지가 트랙터를 운전하자 이세훈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고 난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세훈에게 살짝 잘난 척을 했지만 사실 농기계는 생긴 거만 우락부락할 뿐 운전을 하는 건 초등학생도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을 만큼 조작이 쉬웠다.
과수원에 일할 때 옆에서 논농사를 지던 영감님이 그러셨다.
논에 모내기하고 수확할 때까지 여든여덟 번의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농사는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기보다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하는 거였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안성에서 온 이근학이라고 합니다.”
녹색 모자를 눌러 쓰고 영지민에게 농기계 다루는 법과 땅을 일구는 법을 설명해 주던 사내 한 명이 내게 인사를 해 왔다.
40대 초반의 풍채가 좋은 사내였다.
보아하니 이 사람이 농협 직원들의 인솔자인 듯했다.
“반갑습니다. 전 안해용이라고 합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먼 발걸음해 주셔서 감사해요.”
난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이근학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까무잡잡한 피부.
까칠까칠한 손바닥.
보아하니 그는 사무직원이 아니라 지금도 현업에 종사하는 농사꾼인 듯했다.
김용규 본부장은 목적이 있어 이들을 데리고 왔겠지만, 이근학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는 순수하게 농사짓는 법을 알려 주기 위해 온 사람인 듯했다.
“이쪽 논은 이대로 작업이 진행되면 내일쯤 물을 대고 바로 모내기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근학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 멀리 있는 저수지를 쳐다봤다.
이세훈이 데리고 온 기술자들이 상하수도 공사를 하며 알아서 여기에도 물길을 열어 놓은 모양이었다.
“아, 이런 제가 또 설명을 안 했네요. 모내기가 뭐냐 하면…….”
“이앙법은 저도 알고 있어요. 설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난 이근학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모내기를 다른 말로 이앙법이라고 하는데 모판을 만들어 볍씨를 촘촘하게 뿌리고 싹을 틔워 일정하게 자랄 때까지 키운 다음 물을 댄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이었다.
아주 먼 옛날에는 가뭄이 오면 논에 물을 될 기술력이 없어 볍씨를 뿌려 그 자리에서 계속 길렀지만, 저수지 같은 수리 시설이 갖춰져 있다면 모내기를 하는 게 김매기도 쉽고 일손도 줄이고 나쁜 모를 골라낼 수까지 있어 수확량이 두 배 이상 좋았다.
“……저도 옥천에서 잠시나마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근데 가능하다면 원래 이곳에서 자랐던 야생 벼를 심어보고 싶은데 모판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네.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여기는 야생 벼로 이앙법을 한다 치고 밭농사랑 하우스 농사도 하실 거죠?”
“네. 그래야겠죠.”
난 이근학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해 두신 게 있나요? 말씀하시면 제가 내일 모종을 갖고 들어오겠습니다.”
“전 이곳의 작물들을 키워 보려고요. 그러니 전 신경 쓰지 말고 영지민 것만 물어봐서 갖다주시면 될 것 같아요.”
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땅을 일구고 있는 영지민을 쳐다봤다.
논농사야 이렇게 한 번에 대규모로 하는 게 작업 속도도 빠르고 관리하기도 편하지만 밭농사는 굳이 내가 통제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고추, 토마토, 배추, 상추, 오이, 호박 등등 모종만 있고 적당한 크기의 땅만 있으면 특별한 설비가 필요 없어 알아서들 잘 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더 재미나기도 했고.
농사는 물론이고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누가 시켜서 정해진 일을 하면 금세 흥미가 떨어질 수 있으니 자율적으로 하고 싶은 농사를 하게 하는 게 나을 듯했다.
땅 농사뿐만이 아니라 가축 농사를 원하면 하늘 농장에서 키우는 가축들을 지원해 주면 되었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영지민과 면담을 해서 모종을 선택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용무를 마치고 영지민에게 다시 돌아가는 이근학에게 난 깊이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땅을 일구고 벗 삼아 사는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심을 표출했다.
그런데 그때,
덜덜덜덜덜덜덜.
덜덜덜덜덜덜덜.
“새참 드시고 하세요.”
“오!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새참까지 배달해 주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어르신들이 이 뙤약볕 아래 고생을 하는데 당연히 갖다 드려야죠.”
김성준과 요리팀 헬퍼들이 십여 대의 경운기에 가마솥을 잔뜩 싣고 찾아왔고 영지민이 힘들어했던 것도 잠시 금세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닭백숙.
가마솥 안에는 하얀 속살을 드러낸 닭들이 다리를 꼬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짱이네요.”
“마음에 드십니까. 성주님?”
“바쁘실 텐데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다니 역시 요리팀 헬퍼들 밖에 없네요.”
난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농사를 지으며 먹는 새참은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기에.
“크으! 좋다.”
근래 버팔로와 아레스 길드 마스터를 처단하고 일본에 아이템을 판매하고 데스나이트를 처치하고 김용규와 이래저래 신경전을 벌이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드넓은 대지에서 흙을 매만지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땀을 흘리고 닭백숙 국물을 한 모금 쭈욱 들이키니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이렇게 농사나 지으면서 살면 좋겠다.”
“끙…….”
내가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고 국물 맛을 음미하자 옆에서 있던 이세훈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게 아니라고는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짜 또 역마살이 도진 모양이다.
‘월급도 제법 많았는데.’
사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리울 만큼 과수원 일은 제법 내 적성에 맞았다.
근데 그때 내가 그만둔 건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 평균 연령이 50대 이상이다 보니 정 붙일 때가 없었기에.
허나 여기엔 수정이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바로 옆에 영지민과 동료들이 있어서 이렇게 농사를 지으며 지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졌네. 도졌어.”
“아니라고.”
“진짜 아니야?”
“그래. 인마.”
이세훈은 계속 의심스런 눈길로 날 쳐다봤고 난 그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직히 지금 마음 같아선 다 내려놓고 흙과 바다를 벗 삼아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번엔 그러면 안 되었으니까.
그동안에야 돈을 받고 고용을 당한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그런데,
“정 힘들면 잠깐이라도 좀 내려놓고 쉬든가.”
“……?”
속으로 애써 다 잡으며 참아내고 있는데 이세훈이 유혹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웃는 거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
“아버지가 그러더라. 평생을 없이 살다가 지킬 것이 많아져서 그런지 요즘 네 얼굴을 보면 누군가한테 쫓기는 사람같이 불안해 보인다고.”
“아…….”
이세훈이 가여운 표정을 지으며 날 그윽하게 쳐다봤다.
“쩝.”
안 그래도 나도 인지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가진 게 없었을 땐 어차피 잃을 게 없어서 속은 편했는데 지킬 것이 많아지니 난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의심이 많아지고 경계심도 심해지고 계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엔 무서웠다.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찾아낸 이곳의 광산들을 다른 누군가에게 뺏길까 봐.
근데 지금은 욕심 때문이었다.
지금 가진 것만 해도 충분해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데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김용규를 경계했고 또 배척하고 있었으니까.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아서?’
처음엔 그것 때문에 서운했을지 몰라도 그건 핑계였다.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세뇌를 시켰다는 게 맞을 것이다.
재난 관리 본부와 헌터 협회에서 우리를 포기한 건 맞지만 그들은 대한민국의 국민과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를 구해 줬으니까.
오크들에게 갇힌 우리를 포기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세훈아, 가서 김용규 본부장 좀 오라고 해.”
“같이 먹게?”
“……어.”
난 멀찌감치 떨어져서 쭈뼛거리고 있는 김용규를 쳐다봤다.
미국, 일본의 헌터들과 전문 인력들이 들어와 있는 게 불안한지 농사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계속 내 주위를 배회했고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해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인생 뭐 있냐.”
난 빙그레 웃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나와 발키리. 그리고 이곳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 저리 노력을 하는데 나도 좀 마음을 여는 게 맞을 듯했다.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이는 봄바람을 맞으며 땅을 일구고 나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백숙 하나만 먹어도 이리 행복한 것을.
나이를 먹으면 명예욕만 생긴다더니 내가 언제부터 성주고 언제부터 부자였다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사인데 백 년도 못 살 거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뭔 욕심이 생겨 그리 안절부절못하며 지냈는지 모르겠다.
“부르셨습니까? 성주님.”
“네. 같이 먹자고요.”
“…….”
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자리를 내주며 김용규에게 닭 다리 하나를 건네줬다.
닭 다리는 2개고 사람은 세 명이다.
그가 눈치챌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 크게 마음을 연 것이다.
“둘이서 그러고 있으니까 영지민도 기분이 좋은가 보네요.”
“…….”
“…….”
우리의 다정한 모습 때문일까.
은연중에 눈치를 살피던 영지민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난 나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과 영지민의 편안한 삶을 위해 사고하고 행동했다고 여겼는데 정작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듯했다.
한국인.
비록 고향을 떠나 이곳에 들어오긴 했지만 다들 내가 김용규와 가깝게 지내길 원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분명 영지민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환청이 들려왔다.
짐작건대 저들의 마음속에 있는 말이 내게 전해지는 듯했다.
때론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는데 눈만 마주치고 있어도 의사소통이 되는 것처럼.
그런데 그때,
휘이익.
휘이익.
우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웅.
“지진인가?”
“…….”
“…….”
별안간 땅이 진동하고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흡수해서 이러는 거야. 빨리 사람들 피하라고 해. 또 진화하려고 하는 것 같아!
몸이 탈 것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세훈아, 빠, 빨리 도망쳐. 나한테 최대한 멀리 떨어져.”
“왜? 무슨 일인데?”
“어서!”
몸이 뜨거워지면 뜨거워질수록 정신이 몽롱해졌고 난 희미해지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으며 이세훈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이내,
“성주님, 설마?”
“어서, 제발.”
“모두 절 따라오세요. 빨리요.”
내게 몰려들고 있는 기운을 느꼈는지 박민정이 부랴부랴 달려와 사람들을 데리고 피신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