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17화 (117/255)

117화. 헌터의 도시 (3)

“우리도 한잔할까?”

“지금?”

“지금요?”

“이런 날 한잔해야지. 그럼 언제 마셔.”

씨익.

난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헌터들이 잔뜩 모여 있는 호프집 앞 파라솔에 이세훈, 이부성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김용규의 저의가 좀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영지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니 기분이 좋아졌다.

주유소.

PC방.

당구장.

커피숍.

호텔 주방.

백화점.

할인 마트.

.

.

.

방황했던 시절 난 숱하게 많은 직업을 바꿨지만, 그중에 대부분은 고객들과 직접 부딪히며 일하는 서비스 직종이 많았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사람들이 영지에 방문해 상점을 이용하는 것을 보니 그동안 마음고생 했던 것이 한순간에 사그라질 만큼 얼굴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오셨어요. 성주님.”

“네. 저희도 막걸리 한잔하려고요.”

“네. 알겠습니다. 따끈따끈하게 파전도 하나 만들어서 같이 갖다 드릴게요.”

“막걸리만 주셔도 되는데. 손님도 많은 것 같은데 괜히 와서 방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방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동안 하루가 멀다고 천여 명에 가까운 헌터들이랑 헬퍼들의 식사를 하다 보니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수십 개의 파라솔 그늘에 헌터들이 삼삼오오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걱정했는데 김성준은 능숙하게 호프집을 운영했다.

“우리 성준 씨도 고생 참 많이 했는데 이렇게 장사만 되면 금방 부자 되겠네.”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는 김성준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이곳에 고립됐던 헌터와 헬퍼들 모두 고생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김성준이 있어서 그나마 퀄리티 높은 음식을 먹으며 굶주리지 않을 수 있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백화점이랑 호텔이 완성되면 그에게 푸드 코트와 식당을 책임지게 해서 위치도 더 올려주고 안정적인 수입을 갖게 해줘도 될 듯했다.

“백화점이랑 호텔은 얼마나 걸려야 완성된대?”

“이제 배가 생겨서 좀 수월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1년은 걸릴 거야.”

“1년이나? 예전에 들어보니까 6개월이면 마트 건물 하나 짓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2층짜리잖아. 층수가 있어서 1년도 오래 걸리는 건 아니야.”

“아…….”

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광장 옆에 지어지고 있는 호텔과 백화점을 쳐다봤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으라고 했다고 이렇게 사람들이 막 몰아치기 시작할 때 건물이 완성되면 좋을 것 같은데 그게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당장은 이 사람들을 더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물게 할 이벤트를 더 기획해야 할 것 같아.”

“이벤트?”

“어. 당장은 카프리의 무구들과 버프 아이템으로 인해 사람들이 몰려들겠지만, 그것들만으로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사람들이 찾아오리란 법은 없으니까. 너도 백화점에서 일해 봐서 알잖아. 새로 백화점이 오픈하면 파격가 할인과 사은품 증정 행사 같은 걸로 손님들을 유치해 봤자 오픈빨이 끝나면 그 많던 사람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기 일쑤거든.”

이세훈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헌터들을 쳐다봤다.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랜 시간 유통업계에 종사해서 그런지 그는 눈에 보이는 것 말고도 그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치. 그래서 뭐부터 했으면 좋겠는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까 말을 꺼냈을 거 아니야?”

씨익.

난 빙그레 웃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이부성과 헬퍼들은 간혹 이래저래 해서 힘들고 고단하다며 애로사항만 얘기할 뿐 어떻게 해 주길 원하는지 말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나이가 어리고 직장 생활을 오래 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었다.

허나 이세훈은 달랐다.

그는 무려 이십 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했고 직장 상사에게 문제점만 얘기하면 중간도 가지 못한다는 걸 몸소 겪었을 테니까.

사업을 할 때도 그렇고 장사를 할 때도 그렇고 문제점이나 애로사항을 발견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직장 상사들은 해결책도 없이 문제점만 제기하는 부하 직원들을 그리 탐탁지 않게 본다.

아니 가만히 입 다물고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괜한 말을 꺼내 욕까지 얻어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현명한 직장인은 문제점만 제기하는 게 아니라 해결책도 함께 제시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럼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감안해서 들어.”

“그래.”

끄덕끄덕.

난 자세를 바로잡고 이세훈의 말을 경청했다.

“말과 고양이.”

“말과 고양이?”

“헌터들이 얘기하는 걸 대충 엿들어보니까 카프리의 무구도 무구지만 다들 야생마와 고양이한테 관심이 많더라고.”

“흠…… 아무래도 그렇겠지. 둘 중의 하나만 친구가 되어도 레이드에 나가서 위험에 빠져도 살 확률이 급격하게 올라갈 테니까.”

“맞아. 근데 그것도 그거지만 희소성까지 더 해서 사람들의 소유욕을 더 자극하는 것 같더라고.”

“그렇겠지. 근데 너도 알다시피 둘 다 돈을 받고 판매를 할 만큼 개체 수도 많지 않고 동물을 사고판다는 게 좀 그래서…….”

난 이세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별로 탐탁지 않았다.

1억. 아니 만약에 야생마를 팔게 된다면 적어도 십억은 받아야 했다.

상급 헌터들에게조차 쉽게 뒤를 주지 않는 예민함과 기동력. 게다가 오크 같은 하위 몬스터는 뒷발차기 한 방으로 날려 보내는 파괴력까지.

만약에 야생마에게 가치를 매긴다면 십억도 부족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돈을 받고 팔아선 영지에 도움도 안 돼. 그리고 지금도 돈을 받고 팔 아이템들은 차고 넘치기도 하고. 게다가 돈을 주고 입양한 펫들을 잘 관리할 거라는 장담도 할 수 없고. 너도 알다시피 반려견, 반려묘를 입양하면서 돈부터 계산하는 사람들치고 끝까지 책임지는 놈들은 드물잖아.”

“……그렇지.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포인트. 돈을 받고 파는 게 아니라 이곳 영지의 상점을 이용하고 또 오크와 해골을 사냥한 걸 포인트로 책정해서 하늘 목장에 대한 출입권을 주고 또 거기서 일정 포인트가 넘으면 친구가 될 기회도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상점 이용 금액의 1% 포인트로 적립.

오크&해골 한 마리 사냥 시 포인트 1P 적립.

오우거 한 마리 사냥 시 10P 적립.

5000P 획득 시 하늘 목장 출입권 획득.

거기서 추가로 5000P 획득 시 말과의 교감권 획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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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우리가 싸게 팔고 아무리 돈 잘 버는 헌터들이라 해도 지금 영지 내에서 판매하고 있는 아이템과 음식들은 너무 비싸. 처음엔 그냥 신기하고 경험 삼아 사용하더라도 나중엔 호구 잡힌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생길 거야.”

“호구라…….”

“낚시 다니면서 많이 겪어봤잖아.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생수를 이천 원에 파는데도 바가지인 걸 뻔히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사 먹었잖아. 헌터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될 수 있다고.”

“흠…….”

“근데 그렇다고 지금보다 가격을 더 낮출 수 없으니 포인트로 보답해 주자는 거야. 그럼 조금 비싸도 언젠간 보상을 받을 수 있고 남들은 갖지 못하는 야생마를 얻을 기회와 우월감까지 생겨서 충성심까지 유발할 수 있을 거야.”

“백화점 VVIP룸처럼?”

“그렇지!”

이세훈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도 알다시피 물건이 됐든 펫이 됐든 돈으로 쉽게 산 물건은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오랜 시간과 애정을 쏟아서 구한 것들은 더 소중하게 다루는 법이지. 이곳에서 일만 포인트나 모을 만큼 사냥을 하고 또 상점을 이용할 만큼 의지와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믿고 야생마를 입양시켜줘도 되지 않을까?”

“일만 포인트라…….”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헌터들을 쳐다봤다.

말이 일만 포인트지. 오크를 잡아서 그 포인트를 모으려면 무려 만 마리를 잡아야 했다.

어지간한 길드 단위로 포인트를 모아도 최하 이곳에서 몇 년은 상주해야 할 것이다.

그 시간이면 충분히 야생마들이 새끼를 치고 지금 보다 훨씬 더 개체 수가 늘어나 있을 듯했다.

“우와! 세훈이 형 짱인 것 같아요. 언제 이런 생각까지 하신 거예요? 헌터들 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가만히 이세훈의 설명을 들은 이부성이 호들갑을 떨며 양쪽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괜찮은 것 같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죠. 일본에 비싸게 아이템을 팔아서 당장 돈보다는 사람들과 또 그들의 마음이 중요한데 두 개 다 붙잡을 수 있잖아요.”

“그치.”

끄덕끄덕.

난 이부성과 시선을 마주치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헌터들의 충성심과 애정.

다른 건 둘째치고 그걸 잡을 수 있다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백화점 VVIP 고객들을 봤을 때 이세훈의 제안은 이미 어느 정도 증명이 된 시스템이었다.

“세훈이 네가 사람 꾸려서 추진해 봐. 좋은 생각인 것 같네.”

“오케이. 알았어.”

이세훈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의 의견에 나와 이부성의 반응이 좋으니 그도 흐뭇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백화점이 완성되면 세훈이한테 점장을 맡기면 되려나?’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영지 상점이 아니라 백화점 운영을 한다고 생각하면 이세훈만 한 사람이 없을 듯했다.

경험도 경험이지만 오랜 시간 관련 업종에서 일했기에 인맥도 꽤 넓었기에.

부족한 부분은 인재들을 영입해서 보충하면 될 듯했다.

“그럼 포인트 시스템은 이번에 들어온 공무원들 도움을 받아서 내가 진행해 볼게. 근데 영지민은 언제까지 저렇게 둘 거야?”

“흠…….”

“다들 공짜로 먹고 자는 게 미안해서 그런지 부역에 나가곤 있지만 계속 저렇게 둘 수는 없잖아.”

이세훈이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그치.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겠네.”

야생 벼와 동충하초가 자랐던 풀밭을 보며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3월.

농사를 지을 거면 지금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농사는 지어야지. 힘들고 돈이 안 된다고 아무도 농사를 안 지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이 나라에 생산되는 농산물은 없을 테니까.’

힘만 들고 그다지 돈도 되지 않았기에 농사를 직접 짓는 거에 회의적이었지만 김종관과의 대화이후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돈이 안 된다고 해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그의 말처럼 아무도 농사를 짓지 않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랄 아이들은 외국산 음식만을 먹게 될 수도 있으니까.

“김용규 본부장한테 얘기해서 농기계 좀 싸게 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해 봐.”

“김용규한테?”

“응. 농협에 얘기해서 싸게 좀 달라고 해. 그냥 우리가 개인적으로 알아보면 많이 비쌀 테니까.”

“……그래.”

이세훈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용규한테 신세를 지는 게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싸.”

“어?”

“농기계들 말이야. 제대로 된 콤바인 하나만 사려고 해도 외제 차 한 대 값이야.”

“외제 차 한 대 값이라고? 그렇게 비싸?”

“어. 콤바인이야 당장 필요 없긴 하지만 그래도 농사를 지으면 추수 때 꼭 필요하니 사 놓아야 하는데 고장 날 것도 감안하고 작업속도를 빨리하려면 몇 대씩은 있어야 해. 그리고 트랙터랑 이앙기랑 두둑기랑 이래저래 농기계들이 수없이 많이 필요하고.”

“아…….”

이세훈이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옛날처럼 허리가 ㄱ자 모양이 될 만큼 허리를 숙이고 손으로 하는 일은 많이 줄었지만, 그 대신 필요한 기계들이 많았다. 그것도 억 소리가 날 만큼 비싼 농기계들이.

‘특수 작물들도 키워야 하니까.’

아예 시작하지 않으면 모를까. 이왕 하는 거면 제대로 한번 해 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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