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헌터의 도시 (2)
“해용이 형, 빨리 나와 보세요. 선착장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내리고 있어요.”
이어진과 화랑 연합 헌터들이 돌아간 지 삼 일이 지난 아침 이부성이 호들갑을 떨며 내 숙소를 찾아왔다.
“얼마나 많기에 엄청나게 많다는 거야?”
“얼핏 보긴 했지만 천 명은 가뿐히 넘는 것 같아요.”
“그렇게나 많이? 일단 가 보자.”
“네. 형.”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어진이가 나이가 어리긴 해도 나름 헌터들 사이에서 영향이 있거든.’
김종관 마스터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기대해도 좋을 거라고 했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많은 인원이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라는 겁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성주님한테 연락하러 갔으니 곧 도착하실 거예요.”
선착장에 도착하니 발키리 길드 헌터들과 방문객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무장한 천여 명의 헌터들이 갑자기 방문해 혹여나 사고가 생길 것이 염려됐는지 입장을 막고 대기를 시키고 있었다.
터벅터벅.
“여기 책임자가 누구죠?”
난 선착장 밑으로 내려가 헌터들을 쭉 살펴봤다.
그리고 그때서야,
“성주님이 직접 나오셨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부랴부랴 오느라 연락도 없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뒤쪽에 있던 김용규 본부장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김용규를 노려봤다.
방문자들을 살펴보니 헌터들은 물론이고 정갈한 옷차림을 한 백여 명의 무리가 헌터들 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번엔 전라도와 강원도, 경기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제가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오면 스카이 캐슬에서 곤란해 할 것 같다는 데도 화랑 연합의 말을 듣고 직접 와서 확인해 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김용규가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방문객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어진 마스터가 헌터들에게 이곳 얘기를 좋게 해 줬나 보네요.”
“네. 말도 마세요. 고작 하루 이곳에 묵어 놓고선 성주님과 이곳 마스터들을 어찌나 찬양하던지. 저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김용규가 앓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얼굴만 보면 이어진한테 설득을 당해 이제 우리한테 협조하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처럼 보였다.
“좋아요. 일단 헌터들은 안으로 들여보내죠. 근데 저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헌터들처럼 보이지 않는데 뭐 하는 사람들이죠? 본부장님 수행원들인가요?”
“아, 저 사람들은 공무원들입니다. 이어진 마스터한테 들으니 영지 개발을 하는데도 인력이 부족하고 이제 여기도 헌터들이 방문하면 이래저래 전문 인력이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제가 손 좀 썼습니다. 하하.”
“공무원들이라고요?”
“네. 일단 백 명 정도 발령을 내서 데리고 왔지만, 이곳 상황을 살펴보고 필요하다면 더 인원을 보낼 수 있게 추진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도착한 인원은 1차 인원이고 아직 항구에 절반 정도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헌터 협회의 공문을 받은 길드들이 계속 방문 의향을 밝히고 있고요.”
김용규 본부장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공무원들이라…….”
“네. 다들 베테랑들이니 이곳 영지를 개발하는 데 큰 보탬이 될 겁니다. 하하.”
“흠…….”
난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김용규와 공무원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어진 아니 화랑 연합 한군데 마음을 바뀌었다고 김용규가 이렇게 한순간에 태도를 달리한다고?’
난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선뜻 김용규를 믿기가 불안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특히 신념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이어진은 같이 목숨을 걸고 토벌을 하고 또 퇴각하며 나름 전우애 비슷한 게 싹트고 내가 대한민국에 그리 적대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표현해서 그러려니 했지만, 이 자는 아니었다.
화랑 연합 한군데의 변심으로 인해 우리한테 협조할 정도로 의지가 약했다면 그의 경계심은 진즉에 허물어졌어야 했다.
“몬스터의 위협 때문에 헌터도 필요하시겠지만, 내정을 소홀히 하면…….”
“발령이라 하면 이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소속되어 있는 거겠죠?”
“네. 혹시 임금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들의 월급은 대한민국에서 다 부담할 테니까요.”
“월급까지 부담한다고요?”
“네. 물론입니다. 인천에 출몰했던 데스나이트도 해결해 주시고 버팔로 길드 일로 큰 은혜를 받았는데 저희가 이 정도는 당연히 해 드려야죠. 하하.”
김용규가 하늘을 보며 크게 함박웃음을 지웠다.
표정도 그렇고 말하는 것만 들어 보면 제법 그럴싸했다.
근데 이상하게 왠지 계속 싸한 마음이 들었다.
“성주님, 안 그래도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도 부족하고 이래저래 전문 인력이 필요하긴 했습니다.”“역시 그랬군요. 그럴 줄 알고 제가 이렇게 데리고 온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제가 누누이 표현했지만 전 스카이 캐슬과 또 성주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요. 이참에 저도 성주님한테 점수 좀 딸 수 있겠네요. 하하.”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박민정이 기대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와 공무원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김용규는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고.
박민정은 내가 이들의 입장을 허락해 주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길을 열어주세요. 이렇게 먼저 호의를 베푸는데 거절을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네, 알겠어요.”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헌터들과 공무원들의 길을 열어 주었다.
뭔가 미심쩍었지만 당장은 헌터는 물론이고 전문 인력들 역시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 * *
“사람들 몰아닥쳐서 난리인데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숙소에 들어와 잠시 생각할 시간을 보내는데 이세훈이 찾아왔다.
“이상해서. 내가 겪은 김용규 본부장은 이렇게 쉽게 변할 사람이 아니거든.”
“뭐야? 고작 그것 때문에 그러고 있었던 거야?”
“고작?”
“넌 사회생활을 그렇게 오래 해 놓고선 김용규 그 양반 머리 굴리는 게 안 보여?”
“보여서 이러는 거잖아. 근데 분명 머리를 굴리는 것 같은데 뭘 노리고 저러는 건지 그걸 모르겠으니까 답답한 거지.”
“쯧쯧. 그거야 뻔한 거 아니겠어?”
난 의문어린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얼굴을 표정을 보아하니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죽을 때가 되지 않는 이상 사람은 갑자기 변하기 힘들거든. 내가 보기엔 아직 죽을 때는 되지 않은 것 같고 방법을 바꿨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
“방법을 바꿨다고?”
“보아하니 이어진이 마스터가 나가서 우리 편을 든 모양인데 김용규 본부장도 고민이 많았겠지. 이대로 계속 견제하면 우리랑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고 기껏 동맹을 맺은 길드들도 우리한테 계속 넘어올 수도 있으니까.”
“흠…….”
난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의 말을 경청했다.
오랜 시간 아웃소싱 팀장 일을 해서 이런 쪽으로 문외한일 수도 있지만, 인생을 살다 보니 정치나 사업이나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가 이런 식으로 확신하고 얘기를 하는 걸 보면 충분히 참조할 만한 가치가 있을 듯했다.
“보아하니 김용규 그 양반은 이곳에 헌터들이 몰려 대한민국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는 거랑 혹시 우리가 대한민국에 반기를 들까 염려를 하나 본데 통제를 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니까.”
“효과적이라고? 지금 뭘 하는 건데?”
“원래 칼과 총 보다 사람의 입과 펜이 더 무섭다고 하잖아. 굳이 우리랑 신경전을 벌이며 견제할 필요 없이 지금처럼 대한민국의 인력을 투입해 이곳의 체계를 잡는 걸 도와주며 ‘우리는 하나다.’라는 걸 각인시키고 세뇌하면 비록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하나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마음은 항상 대한민국에 가 있지 않겠어?”
씨익.
이세훈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국어를 쓰면서 한국의 교육을 받은 공무원들이 체계를 만들고, 또 한국의 교육을 받은 선생들이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난 손을 들어 이세훈의 말을 멈춰 세웠다. 더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언어와 문화. 교육, 생활…….
내가 은연중에 계속 대립각을 세우니 이세훈의 말처럼 김용규가 진짜 방법을 바꾼 듯했다.
‘……어제는 차라리 대한민국에 귀속시키고 적당히 편하게 살까 싶다가도 오늘은 또 하루라도 빨리 영지를 개발시켜 그 누구도 함부로 도발하지 못할 강한 곳으로 키워보고 싶기도 하고 나도 오락가락한다고.’
난 이어진에게 말했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그래서 그런 듯했다.
김용규는 자신의, 아니 대한민국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흔들리고 있는 마음을 대신 잡아 주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여나 내가 대한민국에 반기를 들게 하는 상황이 생겨도 영지민이 반대를 하면 정에 약한 내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될 테니까.
“재미있네. 재미있어.”
“…….”
난 하늘을 보며 크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세훈의 설명을 들으니 김용규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짐작건대 이세훈이 추론한 이유로 김용규의 태도가 바뀐 게 확실한 듯했다.
“어떻게 할 거야?”
“당장 저들이 없으면 아쉽잖아.”
“그치. 조금 찝찝하기는 해도 헌터들은 둘째치고 전문 인력을 저리 보내주면 영지를 발전시키고 자리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럼 일단 모른 체하고 그냥 두자.”
“그래. 알았어. 그럼 나도 따로 알아보기는 할게. 너도 알다시피 나도 배운 게 없어서 이럴 땐 어떡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이런 일에 지식이 있는 사람을 은밀히 알아봐 볼게.”
이세훈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졸.
그나 나나 배움이 부족해서 이리 복잡하고 어렵게 다가오면 해결책이 없었다.
까딱했다간 진짜 힘들게 영지를 개발시키고 발전시켜서 그대로 대한민국에 바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허나 김용규가 하나 간과하고 있는 게 있으니 우린 대학교에 가지 않았지만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정글과도 같은 사회생활에 끼어들어 눈칫밥을 먹으며 버텨 지금까지 생존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웃음 속에 칼날을 감추고 다가온다 해도 학벌도 인맥도 재물도 없이 맨몸뚱이 하나로 오랜 시간 동안 눈칫밥을 먹어가며 터득한 본능이라는 놈이 그걸 다 캐치해 내었다.
* * *
카프리의 무구를 필두로 하여 이성민이 운영을 하는 무기 상점.
손정모가 만든 이능이 담긴 음식을 필두로 해서 영업을 하는 식당.
동충하초와 엔트 주사를 필두로 영업을 하는 최유라의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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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사람 사는 것 같네.”
스카이 캐슬 중앙광장에 형성된 시장을 돌아다니며 아이템을 장만하고 아이쇼핑을 하는 헌터들을 보며 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서들 오세요. 아이템만 보지 마시고 들어와서 막걸리 한잔하고 가세요. 이곳에서 채취한 쌀로 만든 거라 별미입니다.”
“막걸리요?”
“네. 싸게 드릴 테니 일단 들어와서 한 잔만 마셔보세요. 저도 웬만하면 이렇게 나와서 호객행위 안 하는데 정말 맛이 죽여주거든요.”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본격적으로 첫 영업을 시작한 헬퍼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