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용의 계곡 (8)
어째 너무 순조롭다 했더니 예상치 못한 반전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퇴각해야겠지요?”
“그래야겠죠. 만 마리보다는 천 마리를 상대하는 게 나을 테니까.”
난 지윤미 마스터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쟁.
이곳에 오는 동안은 언데드 몬스터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어 각개 격파를 하면서 왔는데 아무래도 이번엔 대규모 전투를 해야 할 듯했다.
야행성.
지구에서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그렇고 대낮에도 활동하기에 인지를 못 하고 있었는데 언데드 몬스터들은 주로 밤에 활동하는 듯싶었다.
그런데 그때,
“저희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응?”
“이곳에 왔던 것처럼 원거리 공격을 하면서 천천히 퇴각하면 협곡에서 내려오는 놈들한테 뒤를 붙잡히고 말 겁니다.”
이어진과 김종관이 세상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을 건네 왔다.
이미 자기들끼리 뜻을 정해서 왔는지 화랑 길드와 청풍 길드 소속 헌터들은 들고 있던 활을 내려놓고 원래 사용하던 검을 들고 있었다.
보아하니 백병전을 예상하고 준비한 모양이다.
“……붙잡힐 수도 있겠지.”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진을 쳐다봤다.
처음엔 밉상이더니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내였다.
화랑과 청풍.
짐작건대 위기가 생길 때마다 저렇게 두 길드가 선봉에 서서 위기를 극복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른 연합 마스터들이 이어진을 각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고.
게다가 이곳에 오는 동안 데면데면하게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굴었는데 위기가 생기니 자신의 세력과 우릴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움직이려 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 헌터들이 동요할까 봐 일부러 더 의연한 표정을 지으시다니.”
“엥?”
이어진이 세상 그윽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마음 씀씀이가 기특해 미소를 지었는데 뭔가 또 오해하는 모양이었다.
“믿고 맡겨 주십쇼. 제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언데드 몬스터들이 본진에 다다르지 못하게 할 테니까.”
“너희가 굳이 선봉에 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는데 그 목숨은 안 바치면 안 되나?”
“네?”
“목숨은 바치지 말라고. 네 뜻도 알겠고 용감한 것도 알겠는데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고. 너희 길드 헌터들은 무슨 죄야.”
“…….”
난 이어진 마스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태백산맥 길드처럼 검과 방패를 사용했다면 믿고 맡겨 보겠지만 내 판단에는 발키리 길드가 선두에 서나 저들이 선두에 서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은 고맙게 받을 테니 들고 있는 검은 집어넣고 다시 활 들어.”
“성주님…….”
초롱초롱.
순간 해가 떴나 싶을 정도로 이어진이 눈빛을 반짝 거리며 날 쳐다봤다.
“아닙니다. 저희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저희가 비록 객으로 이곳에 왔으나 발키리 길드가 선봉에 섰다가 백병전이 발발하면 큰 타격을 받을 겁니다. 한 사람의 희생자라도 덜 받게 하려면 저희가 앞장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활을 들기 때문에 붙어서 싸우면 약하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네. 맞습니다. 그리고 너무 어두워서 활의 명중률마저 떨어질 테니 분명 백병전이…….”
“누가 그래? 활이 붙어서 싸우면 약하다고?”
난 이어진을 보며 소리 없이 봉실봉실 미소를 지었다.
“너 그 말 지윤미 마스터 앞에서 하지 마라. 그러다 정말 큰일 난다. 그리고 깜깜한 거야 해결을 하면 되는 거고. 부마스터님!”
“네, 알겠어요.”
나와 눈이 마주친 박민정이 발키리 길드원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라이트 좀 해 줘.”
“……라이트 좀 해 줘.”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밝은 마법의 빛이 우릴 감쌌다.
‘운디네 나도!’
-응, 알았어.
라이트.
중급 정령이라 그런지 발키리 길드와 친구를 맺은 정령들 것보다 운디네의 라이트가 훨씬 더 크고 밝게 빛났다.
“정 위험하면 도와달라고 할 테니 그때 나서 줘. 그때까지는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지윤미 마스터의 지휘에 맞춰 통제에 따라주고.”
“……네.”
이어진과 김종관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찌릿찌릿.
활은 근접전에 약하다는 말을 들은 일부 발키리 헌터들이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헬퍼들한테서 획득한 부산물은 모두 버리고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라고 하세요.”
“네. 이미 지시해서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혹시나 다시 이곳에 오게 되면 찾아갈 수 있게. 바로 출발하시면 될 것 같아요.”
“네. 잘했네요. 그럼 출발하죠.”
부우우우우우웅.
부우우우우우웅.
예상하지 못한 대규모 언데드 출몰로 우린 야밤에 다시 왔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11시 방향 스파토이 확인.”
“확인.”
“확인.”
“셋, 둘, 하나. 고!”
스르륵.
스르륵.
“윤다영! 팀원들 데리고 뒤로 빠져.”
“네!”
“박민정 뒤로 빠져.”
“네.”
“권수정 뒤로 빠져.”
“네.”
이어진이 예상한 것처럼 언데드 몬스터들은 낮보다 더 빠르고 많이 본진에 다다랐고 일렬횡대, 일자진으로 진군하던 헌터들이 지윤미 마스터의 지휘 아래 뒤로 물러나면서 드문드문 반원 형태를 그려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일제 사격!”
스르륵.
스르륵.
학인진 진법.
일전에 능선 전투를 하며 헌터들에게 알려 준 것이었지만 원래 이 진법은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들이 행하는 주요 진형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발키리 헌터들은 그 기병들 못지않게 뛰어난 기동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미 오크들에게 재미를 톡톡히 본 진법이었기에 발키리 길드 헌터들은 계속 연마하고 있었고 오늘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밤이 돼서 그런가.
언데드 몬스터들은 왠지 맷집도 더 좋아지고 몸도 더 가벼워 보였지만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리, 다리가…….”
“최유라 팀장.”
“네. 지금 가고 있어요.”
간혹 일자진에서 반원진으로 바꾸는 와중에 호흡이 맞지 않아 해골들의 검에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더러 있긴 했지만 죽은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동충하초 포션과 물의 정령과 계약한 헌터들이 있어 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살릴 수 있었기에.
다만,
“부상자가 몇 명이죠?”
“지금 칠십 명 정도 생겼어요. 치료하긴 했지만 혼자서 걷기는…….”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치료가 됐다 하나 큰 부상을 당해 바로 완치가 되는 게 아니어서 혼자 걷는 건 힘들었다.
“종관아, 너희 길드 헌터들 뒤로 물려서 부상자들 좀 들게 해 줘. 들것은 헬퍼들이 만들어 놨을 거야.”
“……그래.”
김종관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청풍 길드 헌터들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한 명의 부상자가 생기면 그들을 들기 위해 두 명의 전투 병력이 더 손실됐다.
“성주님, 이대로 가면 곧 협곡에서 내려온 무리한테 따라잡히겠어요. 이제부턴 화살을 회수하지 않고 바로, 바로 진격해야 할 것 같아요.”
“네. 알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난 지윤미 마스터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싼 미스릴 화살을 놔두고 가는 게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성주님, 저희가 남아서 여길 막겠습니다.”
“뭐?”
이어진 마스터가 다가와 또 뚱딴지같은 소리를 해 댔다.
“아직 반의반도 오지 못했는데 이대로 가다간 전멸입니다. 저희가 이곳에 남아 협곡에서 내려오는 언데드들을 상대하며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미친 소리 하고 있네. 그 시간 좀 벌어보겠다고. 길드원들이랑 함께 손잡고 겠다고?”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부상병들을 버리고 갈 수도 없으니.”
이어진이 세상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어떻게 돼도 좋으니 부상병들을 꼭 무사히 영지까지 데려다주세요.”
“어지간히 해라. 지금 그런 분위기 아니야.”
“네?”
“삼십 분. 아니 일이십 분만 더 버티면 돼. 그러니까 가서 얼른 진형 지켜.”
난 못마땅한 표정을 지키며 이어진을 야단쳤다.
스카이 캐슬 연합 식구들과 전투를 하면 이런 일이 없는데 꼭 객들이 내 지휘에 이견을 제시하거나 단독 행동을 하려 했다.
난 부상병들은 물론이고 화랑 길드 헌터들 역시 이곳에서 객사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윤미 마스터님.”
“두 시간 지났어요. 곧 도착할 것 같아요. 아, 마침 저기 오네요.”
우르릉 쾅쾅!
우르릉 쾅쾅!
휘이익!
휘이익!
스르륵.
스르륵.
“우리가 너무 늦은 건 아니지?”
“그레이 기사단장 조성태가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장지원과 조성태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내게 인사해 왔다.
태백산맥 길드 오백 명, 그레이 기사단 천여 명과 함께.
열 개의 붉은 폭죽을 보고 나의 전우이자 가족들이 열 일 제쳐두고 바로 달려 온 것이었다.
“딱 맞게 왔어요. 오는데 다친 사람은 없죠?”
“다친 사람이 있긴 한데 헬퍼들이 영지로 바로바로 데리고 갔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잘하셨어요. 그럼 우리도 빨리 돌아가죠.”
“그래.”
태백산맥과 그레이 기사단이 오면서 언데드들을 정리하고 왔는지 우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해 영지로 복귀했다.
* * *
“쩝. 여기까지 따라오지는 않네요.”
“뭔가 목적이 있어서 협곡 아래로 내려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생명력을 느끼고 막연하게 쫓아온 모양이에요.”
영지 안으로 들어와 성벽 위에 올라온 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지윤미 마스터와 함께 언데드의 숲을 쳐다봤다.
성벽과 해자가 있어 언데드들이 여기까지 쫓아오면 큰 손실 없이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뿔뿔이 흩어졌다.
“일반 길드라면 나름 훌륭한 사냥터가 될 것 같은데 영토를 차지하려는 입장에선 난처하게 됐네요. 후미에 따라온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협곡에서 언데드 몬스터 뿐만이 아니라 오우거와 하피, 코카트리스 같은 상위 몬스터들도 같이 쫓아왔었대요.”
“일반 길드라…….”
난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성내를 쳐다봤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선 조성태를 쳐다보고 있는 이어진 마스터를 찾아서.
지구 또는 늑대인간의 숲에 있을 거로 생각했던 그레이 기사단이 두 시간 만에 그것도 영지도 아닌 언데드의 숲까지 우릴 구하러 와서 많이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터벅터벅.
“궁금해? 우리가 위기에 빠진 줄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그것도 두 시간 만에?”
“……네.”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걸 들으면 우리와 함께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네. 그래도 알고 싶습니다. 아니 이미 전 언데드의 숲에서부터 성주님과 함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김용규 본부장은 성주님을 경계하고 있지만 제가 겪은 성주님은 적어도 대한민국에 해를 끼칠 분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이어진이 또 세상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이내,
끄덕끄덕.
끄덕끄덕.
화랑 연합 마스터들도 이어진의 뜻에 동의한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떻게 된 거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