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용의 계곡 (5)
“형, 뭐 캐고 계시는 거예요? 또 먹을 만한 거라도 발견하신 거예요?”
한참 펑거스를 채취하고 있는데 이부성이 기대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버섯. 노움이 그러는데 이능이 담겨 있는 놈 같데.”
“와우! 대박이네요. 저도 도울게요.”
“여기 있는 게 다인 것 같아.”
“에이. 제가 한발 늦었네요.”
이부성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펑거스 백여 개.
넓게 포진해 풀밭 가득 자라고 있던 동충하초와 달리 펑거스는 양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직접 심어야 하나?”
“오! 그러면 되겠네요. 안 그래도 이번에 들어온 영지민이 왜 땅을 주지 않냐고 계속 문의하긴 했거든요.”
“그래?”
“지휘부에 정식으로 건의를 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계속 어필을 하고 있나 보더라고요. 농사라도 지어야 먹고 살지 않겠냐고.”
“그래서 내가 땅을 내 주지 않는 거야.”
“네?”
“농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농사라도 지어야.’
한 번이라도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이라면 절대 저런 식으로 말을 하지 않을 테니까.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막연하게 농사를 짓고 살면 세상 한가롭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과수원에서 일했던 내 경험을 비추어 봤을 때 농사꾼의 하루는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바쁘고 치열했으니까.
새벽 5시만 되면 소와 염소, 양들이 밥 달라고 아우성을 해 대고 오후가 되면 해가 너무 뜨거워져 일할 수 없으니 이른 새벽부터 일과가 시작한다.
그래서 어렸을 적 명절에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른 초저녁에 다 주무시는 거였다.
근데 도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한창 활동 시간인 네다섯 시에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여유로운 삶으로 비치는 거였다.
게다가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농사를 지어도 요즘은 돈이 되지 않았다.
과수원에 일할 때 논농사를 짓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논 한 마지기 200평을 지어 풍년이 들어도 60만 원밖에 남지 않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뿐인가.
진인사대천명.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
듣기 좋고 의미도 있을 것 같은 이 명언이 농사꾼 입장이 되면 최고의 악언으로 바뀐다.
힘들게 땅 갈고 물 뿌리고 모종을 심어 키워봤자 여름 장마철에 폭풍 한번 제대로 맞으면 싸그리 박살을 내 버리니까.
“……이런 걸 다 알고 농사를 지으려고 하는 걸까?”
“아…….”
“괜히 농촌에 할아버지, 할머니들 밖에 남아 있는 게 아니야. 힘은 힘대로 열나게 들고 돈은 안 되고 그마저도 하늘의 변덕에 따라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거든. 게다가 요즘은 구제역이니 콜레라니 하면서 몇 년 동안 키웠던 가축들마저도 한순간에 도살시키는 경우도 많고.”
“아…….”
내 설명을 들은 이부성이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농촌 생활을 경험해 보지 않아서 그런지 이런 사정까지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래도 농사는 지어야지. 힘들고 돈이 안 된다고 아무도 농사를 안 지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이 나라에 생산되는 농산물은 없을 테니까.”
김종관이 터벅터벅 걸어와 내 얘기에 이의를 제기했다.
“들어보니 내 친구 농사도 지었나 봐. 그런 얘기들은 직접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인데?”
“너도?”
“나야. 뭐. 지역이 지역이라 보니까.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는 아직도 농사를 짓고 계시기도 하고.”
김종관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봤다.
고양이에 이어 또 다른 공감대가 형성된 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네 말처럼 쌀농사나 가축 농사가 크게 돈이 되진 않지만, 요즘은 밭에다가 특수 작물을 키워서 제법 성과를 거두는 영농인들이 많아.”
“흠…….”
“쌀이나 채소, 가축 농사는 그냥 기본 베이스로 하고 수익은 특수 작물로 보는 거지.”
“아…….”
난 김종관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특수 작물!’
나 역시 요즘 젊은 영농후계자들이 최첨단 농기계들을 들이고 연구를 통해 농업을 발전시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특수 작물’이라는 말이 유난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동충하초.
펑거스.
암염.
지금이야 이능 창출하는 재료가 몇 가지밖에 증명되지 않았지만,
블랙 앵거스 안심 스테이크.
멧돼지 꼬치구이.
잔치국수.
손정모가 개발한 레시피가 이능을 발휘하는 것을 보니 조금 더 디테일하게 연구하고 찾아보면 새로운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지렁이도 많고, 지력도 좋은 것 같긴 한데…….”
“일반인들이 와서 농사를 짓기는 너무 위험하지.”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노움에 이어 김종관도 지력이 좋다고 다시 한번 확인을 시켜줬지만 언데드 몬스터가 문제였다.
멧돼지, 노루, 참새 같은 야생 동물만 있어도 농작물을 망가뜨리기 일쑤인데 이곳은 농사를 짓는 사람의 안위마저 걱정해야 했다.
그렇다고 스카이 캐슬처럼 이 넓은 숲을 다 성벽으로 둘러쌓을 수도 없었고.
우리가 자리 잡은 곳은 산맥과 산맥이 연결되어 있어 좁아지는 구역이 많아 특정 지역만 사수하면 방어를 할 수 있었는데 이곳은 그레이 기사단이 맡은 늑대인간의 숲처럼 넓은 평야 지대로 되어 있었다.
이곳을 제대로 막으려면 아마 만리장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천리장성은 쌓아야 할 듯했다.
“종관아…….”
초롱초롱.
난 두 손을 가지런히 가슴에 모으고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김종관을 그윽하게 쳐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헌터들 밖에 없었다.
논밭에 아무리 허수아비를 많이 세워 둬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성벽을 쌓는 것보다 지금처럼 이곳에 천 명, 이천 명에 이르는 헌터들이 상주해서 사냥을 하는 게 농작물과 농부들을 지키는데 더 용이할 것 같았다.
“왜 이래?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하지 않았어?”
“어. 그랬지. 그래서 이러는 거야. 네가 긍정적으로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에. 헤헤.”
난 김종관을 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긍정적으로 고민하고 있으니까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 줄래? 좀 많이 부담스럽거든?”
“응. 알았어. 네가 싫다면 안 할게.”
“그 말투도 안 했으면 좋겠어.”
“……그래.”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름 애교부려 본 것인데 김종관이 보기엔 그리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친구야.’
내일 모래면 마흔인데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겠는가.
사람은 부족한데 김용규는 계속 훼방을 놓고.
농촌에 가을이 되면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을 만큼 바빠지는 것처럼 우리도 지금 해야 할 일은 태산이고 사람은 없어서 그보다 인력이 더 절실히 필요했다.
그것도 이왕이면 계약 관계가 아닌 자발적으로 와서 영지에 애착을 가진 사람이면 더 좋았고.
“그럼 난 이만 일행들한테 가 볼게.”
“그래. 토벌 끝나고 막걸리 한잔하자.”
“응.”
끄덕끄덕.
김종관이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 일행들에게 걸어갔다.
“해용이 형, 조금만 더 들이대면 넘어 올 것 같은데요?”
“그래 보여?”
“네. 제가 당해봐서 잘 알아요. 형이 그렇게 저돌적으로 덤비면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라고요. 둘 다 고양이 좋아하지. 중소 길드를 운영하는 서러움도 공감하고 농사까지. 저분도 곧 형한테 넘어오게 될 것 같네요.”
“그러면 좋긴 한데…….”
왜 기분이 별로지?
난 화랑 연합 헌터들이 필요해서 접근한 것도 있지만 인간적으로도 김종관이 마음에 들어서 친구를 하자고 한 거였다.
‘제가 당해 봐서…….’
‘……넘어 올 것 같아요.’
근데 왠지 이부성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감이 좀 그랬다.
‘기분 탓이겠지?’
그에게 원하는 게 있긴 하지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아니었다.
진짜 고양이 때문에 우연히 말을 걸다 보니 친해진 거지.
“어떻게 다들 식사 마무리된 것 같은데 출발하라고 할까요?”
“……그래.”
왠지 따지고 들면 그게 더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아서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자! 여기서부터 화랑 연합 분들은 아만티움 화살통으로 바꿔 주세요.”
“저희만요?”
“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언데드 몬스터들은 저희가 미스릴 화살을 사용해 사냥할 테니 오우거들은 여러분들이 맡아 주세요.”
지윤미 마스터가 방긋 웃으며 화랑 연합에게 화살통 교체를 지시했다.
No. 9 발키리 길드.
지금은 어쩌다 보니 스카이 캐슬의 산하에 있지만, 그녀도 이전까지는 무려 3년 동안이나 대형 길드를 운영한 지휘관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윤미 마스터는 대화를 주고받은 적도 없는데 알아서 먼저 오우거를 화랑 연합에게 밀어주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오우거의 부산물보다 화랑 연합의 마음을 얻는 데 주력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난,
‘흠! 너무 노골적인데…….’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돈으로 꼬실 수 있으면 나도 진즉에 꼬셨을 테니까.
아니 단지 돈 때문에 넘어오는 사람들은 온다 해도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이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요. 오우거를 넘겨주면 야 좋긴 한데 좀 부담스럽네요.”
화살통을 바꾼 김종관과 화랑 연합 마스터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저러니 좋아할 수밖에.’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아버지가 그러셨다.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싶으면 계속 호의를 베풀어 보라고.
그럼 머지않아 그 사람의 인성을 볼 수 있게 된다고 하셨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고 누리며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
호의를 받으면 받은 만큼 다시 갚아 주려는 사람.
보통 사람들은 대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는데 김종관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인 듯했다.
“저흰 그냥 이걸로 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이어진 마스터는 아예 그 호의를 사전에 차단하였다.
그리고 이내,
“여러분들은 아만티움 화살을 사용하세요. 그리고 이곳이 마음에 들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일은 없을 테니.”
화랑 연합 마스터들을 보며 뜻밖의 말을 꺼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마스터님…….”
“마스터님…….”
“토벌하다 보니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도 사냥을 하는데 그리 위험할 것 같지도 않고 오우거를 잡아서 파워 글러브랑 오우거의 벨트를 제작하면 큰돈까지 벌 수 있을 것 같네요. 근데 어찌 제가 여러분들을 계속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어진이 빙그레 웃으며 화랑 연합 마스터들을 쳐다봤다.
그런데,
“저도 마음 같아선 여러분들과 함께하고 싶지만 이미 플로라 길드랑 뜻을 함께하기로 해서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네요.”
“아닙니다. 그깟 돈이 뭐 대수라고. 저흰 끝까지 마스터님이랑 함께 할 겁니다.”
“맞습니다. 저희가 아이템에 잠시 눈이 멀어 표정 관리를 못 했습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계속 함께하게 해 주세요.”
털썩털썩.
털썩털썩.
화랑 연합마스터들은 아만티움 화살통을 내려놓으며 반대로 행동했다.
지윤미의 호의는 우리에게 되레 역효과를 일으켰다.
‘멋있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어진 마스터는 더 좋은 지휘관인 듯했고, 화랑 연합에 소속된 길드 헌터들과도 더 끈끈하게 정으로 엮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