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용의 계곡(2)
“지윤미 마스터님, 창고에 있는 장비들과 소모성 아이템들 전부 가져와서 풀 세팅해 주세요.”
“전부요?”
“비상용으로 열 개 정도만 남겨놓고 전부 분배해 주세요. 이번 레이드에서 단 한 사람의 사상자도 생겨선 안 됩니다.”
“네, 알겠어요.”
석궁과 체인 메일.
아만티움 화살.
미스릴 화살.
동충하초 포션.
옐로 아이.
그린 피쉬.
바이올렛 피쉬.
블랙앵거스 안심 스테이크
닭꼬치 구이
옐로아이 찜.
잔치국수.
그린 피쉬 찜.
바이올렛 피쉬 찜.
.
.
.
내 지시를 받은 헌터와 헬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아이템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해용아, 잠깐 얘기 좀…….”
한참 전투 세팅을 하고 있는데 이세훈이 슬며시 다가와 내 팔목을 잡아당겼다.
“왜 무슨 일인데?”
“그게 보니까 저 사람들 다 플로라 길드랑 직접적으로 동맹을 맺은 게 아닌 것 같아.”
“그게 왜? 그럼 뭐가 좀 달라지는 건가?”
“그렇지. 조금 더 확인해 봐야겠지만 화랑 길드는 플로라 길드와 뭔가 뜻이 맞아 직접 동맹을 맺은 것 같은데 다른 길드들은 지역에서 화랑 길드가 가장 크고 세니까 어영부영 함께 하는 것 같더라고.”
청풍 길드.
해미 길드.
수암 길드.
청남 길드.
무창 길드.
이세훈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이어진과 대화를 나누는 헌터들을 쳐다봤다.
“화랑 길드는 몰라도 다른 길드들은 회유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아.”
“흠…….”
난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이세훈과 화랑 연합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첫 번째는 안전…… 두 번째는 역시 아이템인가?’
이세훈의 얘기를 들은 난 가만히 화랑 연합 사람들을 쳐다봤다.
“형도 처음에 태백산맥 길드에 소속되어 헬퍼 생활을 해봐서 아시겠지만, 중소 길드들은 단독으로 사냥을 하는 게 여의치 않아요. 그래서 예전 태백산맥 길드처럼 대형 길드가 관리하는 게이트에 더부살이하며 운영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판단하기에도 저들은 플로라 길드의 이념 같은 걸 따르는 게 아닐 가능성이 클 것 같아요.”
“더부살이라…….”
“형도 같이 봤잖아요. 제가 그때 어떻게 생활했는지…….”
이부성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화랑 연합 마스터들을 쳐다봤다.
과거 오십 명밖에 되지 않았던 시절의 태백산맥 길드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그때 좀 서럽기는 했었지.’
난 빙그레 웃으며 화랑 연합 마스터들을 쳐다봤다.
과부 설움은 홀아비가 잘 안다고 지금 이부성이 얘기했던 이유로 동맹을 맺고 있는 거라면 회유를 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을 듯했다.
그들은 지금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눈빛으로 아주 강력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화랑 연합 마스터들은 이어진과 얘기를 하면서도 다들 석궁과 체인 메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같이 가신다고 하면 여러분들에게도 지급할 겁니다.”
“지급이라 하면…….”
“동! 맹!을 맺은 게 아니니 판매하거나 드리진 못하고 대여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것들이 좀 투박해 보이긴 해도 다 카프리가 만든 무구들이거든요. 크로스보우는 일반인들도 바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조작이 용이하고 체인 메일은 다 아만티움으로 만들어진 것들이거든요.”
“와…….”
내 설명을 들은 화랑 연합 마스터들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만약 같이 가시게 되면 들고 있는 검은 넣어두시고 멀리서 석궁만 쏘아도 될 겁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버프 음식은 공급해 드릴 거고요.”
“그건?”
“당연히 그냥 드리는 거죠. 먹으면 없어지는 걸 다시 받아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오!”
“저희 영지의 안전을 위해 나서주시는 건데 저도 당연히 여러분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해 드려야죠. 이 사슬갑옷을 입으면 어지간한 좀비와 해골들의 손톱과 발톱은 휘두르는 족족 다 아작 날 거예요.”
난 화랑 연합 마스터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끙…….”
내 얘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어진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내,
“……가겠습니다.”
이어진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맙다. 김용규 본부장도 헌터들이 이곳에 오래 머무는 걸 우려했던 거지. 레이드를 못 하게 하려 한 건 아니었잖아. 만약 그렇게까지 하려 한다면 나도 웨이브고 자시고 도와줄 필요가 없는 거고.”
“네, 저도 무슨 말인지 압니다. 성주님께서 인천에 출몰했던 데스나이트를 무찔러 준 것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그래. 그러니까 너무 견제 좀 하지 마. 우린 적이 아니잖아.”
“네, 알겠습니다.”
이어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아하니 밖에서 김용규와 이래저래 입을 맞춰 놓고 들어온 것 같은데 자신의 예상 밖으로 일이 흘러가니 많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진짜 잘만 꼬시면 넘어 올 것 같기도 한데?’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화랑 연합 마스터들을 쳐다봤다.
다들 우리 가지고 있는 무구와 버프 음식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아영과 이어진이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유별나서 그런 거지. 길드는 기본적으로 이윤의 획득을 목적으로 운용하는 조직이다.
길드의 운용은 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최영식을 가까이하고 최병용과도 함께 하려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선 일본과 미국과 아이템 거래를 하며 교류를 하는 게 영지 발전에 도움도 되고 김용규 본부장마저 압박할 수 있으니까.
‘……한번 해 봐!’
난 저 멀리 서 있는 이세훈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 꼬시는 건 그가 전문이었기에.
내가 보기엔 일단 아이템 좀 건네주고 맡은 지역의 안전을 보장해 주면 넘어 올 것 같긴 한데 그가 나서면 조금 더 합리적인 조건으로 조율을 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그때,
후다다다다다닥.
후다다다다다닥.
“뭐야? 저거 던전 말이잖아?”
“헐! 던전 말까지 길들였다니…….”
저 멀리 수십 마리의 말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게 보였고 화랑 연합 마스터들이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다.
그리고 나 역시,
“뭐야? 왜 사람이 타고 있어?”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사람의 손길 자체를 거부했던 놈들인데 말들의 등에 사람들이 올라타고 있었다.
‘벌써 새끼를 낳았을 리는 없고?’
게다가 말들의 마릿수도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제가 안 늦었나 보네요. 언데드의 숲을 토벌한다고 해서 부랴부랴 달려왔습니다.”
190cm가 넘는 키에 족히 백 킬로그램 이상 나가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말에서 뛰어 내려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변지섭 헬퍼 맞죠? 하늘 목장을 관리하는?”
“네. 맞습니다.”
변지섭 헬퍼.
목장 하나 갖는 게 소원이라며 목장에 하늘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사내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지난겨울 동안 없는 살림에 먹이고 재워 줬더니 이놈들도 염치가 없는지 안장과 등자를 놓는 걸 허락해 주었습니다.”
“아…… 그랬군요. 정말 고생했습니다. 쉽지 않을지 알았는데. 근데 마릿수는…….”
“저놈이 다 데리고 왔습니다. 겨울이 꽤 혹독하다 보니 동료들이 배고픔에 지쳐 얼어 죽을까 봐 알아서 찾아 데리고 오더라고요.”
변지섭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루카스!”
달그락달그락.
달그락달그락.
그곳엔 다른 말보다 1.5배 정도 큰 하얀색 백마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히이잉!”
할짝할짝.
할짝할짝.
“오랜만이네. 형이 바빠서 그동안 신경을 못 썼어. 미안해.”
“안장과 등자를 채우긴 했지만, 저놈만 아직 아무한테도 등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변지섭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루카스를 쳐다봤다.
보아하니 루카스를 타보고 싶었던 모양인데 실패를 한 모양이었다.
“루카스, 엉아 올라가도 되지?”
“히이잉.”
“성주님. 그렇게 막 올라가시면…….”
달그락달그락.
달그락달그락.
“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 루카스는 성주님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요.”
내가 루카스의 등에 올라 주위를 돌자 변지섭이 세상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조만간 들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와 줘서.”
“아닙니다. 루카스가 밤마다 하도 구슬프게 울기에 내려온 건데 역시 성주님이 보고 싶어서 운 게 맞았네요. 근데 성주님께서 승마까지 하실 줄 아는지는 몰랐네요. 보아하니 한두 번 탄 솜씨가 아닌 것 같은데…….”
“한 일 년 정도 타 봤어요.”
“아 역시.”
변지섭이 날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승마장 영감님 술친구를 해 주고 잔심부름을 하며 배워뒀던 승마 기술이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쓰담쓰담.
‘역시 명마는 다르구나.’
“히이잉.”
루카스가 내가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게 해 주는 기분마저 들었다.
“다른 말들은 다시 데리고 가세요.”
“네? 레이드에 데리고 가면 큰 힘이 될 텐데요. 아시다시피 이놈들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헌터라고 다 말까지 잘 탈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난 빙그레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리 이능을 각성했어도 연습도 없이 말을 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설사 탄다 해도 승마를 할 줄 모르면 그냥 자기 발로 걷고 뛰는 게 더 빠르고 편했다.
“쩝.”
“쩝.”
내 예상이 맞는지 발키리 길드 헌터들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실 뿐 선뜻 나서는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아, 거성이 형한테는 조만간 곧 안장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살짝 얘기했는데 아직 전달이 안 됐나 보네요. 지금은 이놈들뿐이지만 나머지 백여 마리도 머지않아 안장과 등자를 놓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슬슬 연습하셔야 할 것 같네요. 그럼.”
“네? 백 마리요?”
“그것도 전달이 안 됐나요?”
“네.”
끄덕끄덕.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부성과 박민정을 쳐다봤다.
“죄송해요. 농장 일까지 일일이 확인을 하기엔 너무 챙겨 할 것이 많아서…….”
“저도요. 농장은 그냥 지섭이 형이 알아서 잘하시니…….”
“하긴. 계속 들여다보기엔 너무 멀긴 하지.”
난 이해한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 일이 없는 사람들도 아니고 일, 이십 분 거리도 아니고 왕복 몇 시간은 걸리니 관리를 하는데 좀 소홀했던 모양이다.
뭐 그래도 보아하니 변지섭이 알아서 잘 챙기고 있는 것 같아 안심되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그레이도 잘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루카스를 인계해 준 변지섭과 헬퍼들이 다시 말을 타고 목장으로 달려갔다.
이글이글.
이글이글.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발키리, 태백산맥, 마녀 부대…… 화랑 연합 사람들의 눈까지 활화산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다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듯했다.
“형 저…….”
“응. 토벌 끝나면 올라가서 마음에 맞는 놈 찾아봐.”
난 이부성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는 루카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랑 같이 수박을 나눠 주며 교감을 나눴기에 말과 친구가 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