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포도, 늑대, 무지개…… (3)
부우우우우웅.
부우우우우웅.
“성주님, 도착했습니다.”
“네. 지금 나갈게요.”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5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커다란 뿔 나팔 소리와 함께 영지에 도착했다.
선착장에 내리자 유거성과 헬퍼들 그리고 이번에 새로이 건조 작업에 투입됐었던 베트남 기술자들과 인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출항한 지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들 우리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며 노심초사했던 모양인지 왠지 얼굴이 많이 핼쑥해 보였다.
토닥토닥.
“아무 사고 없이 편안하게 잘 다녀왔어요. 이렇게 훌륭한 배를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거성 씨.
“아닙니다. 저희가 뭘 한 게 있나요. 저희야 나무 베서 갖다 놓은 게 전부인데요. 베트남 기술자들과 인부들이 아니었으면 완성하지 못했을 겁니다.”
“베트남 기술자들과 인부들이 와 줘서 큰 힘이 되긴 했지만, 거성 씨와 헬퍼분들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시작할 마음도 갖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 조금 더 자랑스러워하고 뿌듯해해도 됩니다.”
“성주님…….”
글썽글썽.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유거성과 헬퍼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동안 나무를 베고 관리를 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모양이다.
게다가 정령들이 중급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내가 한번 홀라당 부셔 먹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는 겸양을 부렸지만 난 알고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왔는지.
“거성 씨.”
“네. 성주님.”
“괜찮다면 저기 첫 번째 배는 제가 이름을 정했으면 하는데 그래도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유거성호.”
“네?”
“저 배 이름이에요. 유거성호.”
“헐…….”
“…….”
“…….”
내가 빙그레 웃으며 배의 이름을 정하자 유거성과 헬퍼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나머지 세 대는 거성 씨가 정하세요. 이 배를 같이 만든 헬퍼 분들의 이름을 따서.”
“흑흑.”
“이 좋은 날 울긴 왜 웁니까. 이 네 대의 배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정말 많은 수고를 해 주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혹시 이번엔 이름을 새기지 못하더라도 서운해하지 마세요. 배는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서 양을 늘려야 할 테니 기회가 또 있을 테니까요.”
“흑흑.”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기억하게 할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배들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고생했는지를.”
“흑흑.”
검게 그을리고 푸석푸석해진 피부.
온몸 가득 차지하고 있는 상처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건달로 오해를 할 만큼 건장하고 거친 느낌이 나는 사내들의 얼굴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내,
“안해용 만세! 유거성호 만세!”
“안해용 만세! 유거성호 만세!”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유거성의 선창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복명복창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 * *
“와아! 이거 이제 완전 사기꾼이 다 됐네.”
배를 만드느라 고생을 한 사람들을 격려해 주고 스카이 캐슬로 걸어가고 있는데 이세훈이 실소(失笑)를 터트리며 내게 다가왔다.
“다 너한테 배운 거거든.”
“그래? 이제 하산해도 되겠다. 들어보니 저분들 꽤 고생한 것 같은데 포상금도 안 주고 맨입으로 때우는 걸 보니 나보다 낫네.”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나도 마음 같아선 저들에게 뭔가 재물을 나눠 주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물론 이번에 아이템을 판 돈이 있으니 내가 그걸 좀 나눠주라고 하면 지휘부도 군말 없이 따르기야 하겠지만 그건 온전히 내 돈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영지가 자리를 잡게 되면 지휘부와 상의를 한 이후에 기존에 있던 헌터들과 헬퍼들에게 합리적인 분배를 해야 할 듯했다.
“뭘 또 그렇게 고민하는 얼굴을 하냐. 그냥 멋있어서 농담한 거야. 돈도 좋지만 힘들게 만든 배를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 놓으면 저들한테 정말 큰 의미가 될 테니까. 좀 오그라들긴 했지만 멋있었어. 잘했다. 브라더.”
“잘한 거 맞지?”
“그렇대도.”
이세훈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JFK공항. (미국 뉴욕)
샤를 드골 공항. (프랑스 파리)
인디라 간디 공항. (인도 뉴델리)
존 웨인 공항. (미국 캘리포니아)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 (이탈리아 로마)
리버풀 존 레논 공항. (영국 리버풀)
칭기즈칸 공항. (몽골 울란바토르)
예전에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외국 공항에는 실제 사람의 이름을 가져와서 쓴 곳이 많다고.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다들 나와 같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무거운 짐을 나르고 허드렛일을 했던 헬퍼에 불과했지만, 앞으로는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지 못할 만큼 높은 위치로 올라가게 해 주고 싶다.
나중에 저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학교에 가서 아버지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게끔.
헬퍼들 아니 기술자와 인부들.
직접 몸을 움직이고 땀 흘리는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받고 대우를 받는 세상.
그것이 내가 바라는 스카이 캐슬의 모습이었다.
“오그라드는 얘기는 그만하고 너 저놈 어떻게 해 볼 생각이면 접어라.”
“왜 사이즈가 안 나와?”
“생긴 걸 보니 글러 먹었어.”
화랑 길드 마스터 이어진.
이세훈이 저 멀리 앞에서 걷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생긴 게 글러 먹었다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면접 보고 백화점과 마트에 투입한 사람만 수만 명이잖아. 근데 저런 얼굴을 가진 애들은 플로라와 함께 하기로 했으면 어지간한 일론 마음이 바뀌지 않을 거야.”
“뭐야? 그새 관상도 공부한 거냐?”
“공부한 적은 없지만 내 경험상 그래.”
“흠…….”
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까 낮에 인사하며 보았던 이어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진한 눈썹.
똘망똘망한 눈.
오뚝한 코.
올라가 있는 입매.
.
.
.
‘고집이 세게 생기긴 했지.’
뭐 나도 이세훈처럼 딱 확신을 할 순 없지만 그리 쉬운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길드 이름부터 화랑이지 않은가.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신라를 지켰던 화랑이라는 이름은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헌터들한테 물어보니까 김용규랑 이아영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한 사람은 아니래요. 아마 저 사람도 나라를 위해서라면 자기 가족조차 희생시킬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이부성이 슬며시 다가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어진을 쳐다봤다.
“아마 우리한테 아이템을 사면 바로 돌아가려고 할 거예요.”
“그렇겠지. 김용규 그자가 그렇게 뭉그적거리다가 처음으로 보냈으니 당연히 믿을 만한 사람부터 보냈을 거야.”
“나쁜 새끼. 우리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그냥 밥이나 한 끼 먹이고 돌려보낼까요?”
“아니 판다고 했으니 팔아야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부성을 쳐다봤다.
“따로 계획하신 게 있으신 거예요?”
“아니 없어. 근데 약속했으니까 지켜야지.”
“꼭 그럴 필요가 있나요? 분명 우린 우리의 의도를 설명하고 알렸잖아요. 근데 그걸 뻔히 듣고 나서도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건 김용규랑 이아영이 먼저 약속을 어긴 거잖아요. 그럼 우리도 지킬 필요 없는 거 아니에요?”
이부성이 언성을 높이고 얼굴까지 붉어져 내게 열변을 토했다.
이어진을 따라온 헌터들에게 피쉬와 무구를 팔아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부성아, 상대가 약속을 어겼다고 해도 우리까지 그러면 안 돼. 그럼 똑같은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앞으로 내가 하는 말에 신뢰와 힘이 사라져 버리거든.”
“……?”
이부성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내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나 보다.
예전에 에스 마트에 다닐 때 김대진 팀장이라고 동생이자 상사가 있었다.
그는 나보다 경력도 더 오래됐고 씨름까지 해서 덩치도 크고 까칠한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나는 물론이고 대부분 사람이 그를 무시했다.
화장실에서 담배 피지 말라는 대도 남들 다 피는데 왜 못 피게 하냐면서 담배를 피웠고 직영 사원들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매장에서 핸드폰 보지 말라고 하는데도 다른 사람들도 다 보는데 자기한테만 뭐라 하냐면서 되레 화를 냈다.
게다가 백화점의 룰을 지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동료 직원들과의 한 약속도 툭하면 어겼다.
같이 쉬는 날 등산을 하러 간다고 해 놓고도 전날 술을 잔뜩 마셔 쓰러져 놓고 당일 늦은 오후에나 돼서야 아파서 못 나왔다며 미안하다고 연락이 온다던가.
행사 준비로 인해 다 같이 한 시간씩 일찍 와서 일하자고 해 놓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혼자서만 정시에 오곤 했었다.
그래서 팀장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무리 화를 내고 혼을 내도 직원들은 아무도 그를 무서워하거나 어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말과 약속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 뒤바꾸는 사람이었기에 굳이 담아 둘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난 내가 한 말과 약속은 최대한 지키면서 살아왔고 조금 불편하고 힘들어도 백화점의 룰을 따르며 생활을 해서인지 사람들은 팀장인 김대진보다 부팀장이었던 나를 더 어려워했다.
난 화도 내지 않고 언성도 높이지 않는데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린 약속을 지켜야 해. 당장은 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내가 영지민을 대신해 대표로 나서서 하는 말과 행사에 더 힘이 실릴 테니까.”
난 내 지난 삶의 경험을 예로 들며 왜 우리가 약속을 지켜야 하는지 이부성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꼰대질하는 것 같아서 형이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너보다 조금 더 살면서 이래저래 사람들과 부딪혀 보니까 힘 있고 성격 더러운 사람보다 자신이 한 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무섭더라고.”
“흠…… 조금 어렵긴 한데 형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 것 같아요.”
이부성이 대충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세훈이 설명을 보충했다.
“뭘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하냐. 부성아, 나 해용이랑 낚시 가기로 했는데 전날 다리가 부러졌거든. 근데도 같이 낚시 하러 갔어.”
“엥? 정말요? 그 정도로 낚시를…….”
“아무리 낚시가 좋기로서니 다리에 깁스까지 하고서야 가고 싶겠니. 약속했으니까 간 거지. 나도 그때는 정말 가기 싫었는데 해용이 저놈은 장염까지 걸려 놓고 나랑 한 약속 지키겠다고 같이 낚시 가서 좌대에서 혼절까지 했었거든. 근데 네가 어떻게 파투를 내겠냐.”
“아…….”
“나도 나지만 우리 친구들 모두 해용이랑 한 약속은 웬만하면 다 지킨다. 만나자고 해 놓고 어중간한 핑계 대면서 펑크 내면 친구고 뭐고 다신 안 본다고 했거든.”
“에이.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정말 그러기야…….”
“저 새끼 이제 친구 나밖에 없어.”
“네?”
“안 본다고 하면 안 봐. 그래서 이제 나밖에 안 남았어.”
“헐…….”
“무슨 느낌인지 알겠지?”
“네. 이제 정확히 알 것 같아요. 저도 사실 해용이 형이 절 그렇게 잘해 주는데 뭔가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전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그런가 했는데 이제 보니 저도 은연중에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예시가 좀 그렇긴 하지만 이세훈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이부성이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짜증이 나는 건 알겠지만 일단 모셔 온 손님이니 우리는 우리의 본분을 다하자.”
“네, 알겠어요.”
난 이부성과 눈을 마주치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이세훈이 모르는 게 있는데 가끔 나 ‘뻥카’도 친다.
나 역시 내가 뱉은 말과 약속을 지키면서 다 살 수는 없다. 그저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지.
그래서 나도 누군가를 대할 때 어지간히 화가 나지 않는 이상은 엄포를 놓지 않았는데 아주 가끔은 그럴 마음이 없는데도 엄포를 놓을 때가 있었는데 평소 나의 행실 때문에 제법 잘 먹히곤 했다.
가령,
“영식아.”
“네?”
“눈에 안 보인다고 뒤에서 우리 영지에 해가 되는 수작 부리다가 걸리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찾아내 죽일 거야.”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은근슬쩍 다가와서 우리 얘기를 엿듣던 최영식이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 지르듯 대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