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04화 (104/255)

104화. 포도, 늑대, 무지개…… (2)

후다다다다다닥!

“오셨습니까! 성주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덥석.

선착장에 배를 데고 내리자 김용규가 내게 달려와 포옹을 하고 악수를 하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랜 친구라도 만난 걸로 착각을 할 만큼 오버 액션을 취했다.

“저 우리가 이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네? 아니었습니까? 전 성주님을 다시 봬서 너무 좋고 반가운데 이거 서운하네요. 저 혼자 짝사랑을 했던 거군요.”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김용규가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날 그윽하게 쳐다봤다.

안 본 사이에 많이 능글능글해져 있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데 연이은 웨이브로 긴장을 해서 경직되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죄지은 게 있어 미안한 마음에 오버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잠시만요.”

“……?”

난 김용규를 뒤로 하고 저 멀리 뒤편에 서 있는 최영식에게 걸어갔다.

“영식아.”

“…….”

“영식아!”

“네. 성주님!”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선착장 뒤에 외롭게 서 있던 최영식이 내가 부르자 그때서야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달려왔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형이 왔는데 인사도 안 하냐?”

“그게 아니라……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인사도 안 하냐고. 이놈아.”

“아니 그전에.”

“형이?”

“헐…… 지금 형이라고 한 게 맞습니까?”

“왜? 너 나보다 나이 많아?”

“아닙니다. 저 올해 서른 살입니다. 당연히 제가 동생이죠. 그럼 앞으로 제가 형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요?”

“어. 그렇게 해. 성주님이라고 하면 너무 안 친해 보이잖아.”

“흑흑. 감사합니다. 형님.”

덥석.

내가 호형호제를 허락하자 최영식이 눈물마저 글썽거리며 내 품에 안겨 왔다.

뭐 어느 정도 오버하는 거긴 하겠지만 그래도 꽤 감동한 듯했다.

“수고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하게 만들었네.”

그리고 나 역시 선착장을 보고 꽤 감동했다.

화장실. 휴게실, 식당, 편의점, 낚시 상점…….

이렇게 내려서 직접 훑어보니 선착장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사했고 벌써 편의 시설마저 들어차 있었다.

뭐 이미 일본과의 거래일로 살기마저 내뿜으며 이놈, 저놈까지 한 사이인데 이제 와 서로 성주님, 마스터님 하는 것도 웃기니 차라리 그냥 형, 동생을 하는 게 나을 듯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두 번은 실망하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아서 정말 최선을 다해 만들었습니다.”

“그래. 고맙다. 근데 왜 이 좋은 선착장을 만들어 놓고 쭈구리처럼 구석에서 그러고 있냐? A급 헌터씩이나 돼서.”

“그게 일본 길드랑 동맹을 맺고 있어서 저희 길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사람 많은 데서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게 편하더라고요. 가만히 있어야 중간이라도 가니깐요.”

“하긴.”

쓰담쓰담.

나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최영식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이제 일본과는 문화개방도 하고 나름대로 교류가 활발해졌지만,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아직 일본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독도를 비롯하여 이래저래 일본이 여전히 계속 빡치게 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찌릿찌릿.

“친구야, 웬만하면 뒤돌아보지 마라. 다들 눈빛 장난 아니다.”

“……그래.”

난 등 뒤에서 엄청난 살기를 감지했다.

지윤미, 박민정, 최은빈.

짐작건대 그녀들이 내게 살기를 내뿜고 있는 듯했다.

“형님…….”

“나도 느꼈어. 그냥 모른 체해.”

“……네.”

그녀들과 얼굴을 마주 보는 최영식이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를 내며 몸을 잘게 떨었다.

짐작건대 그녀들은 지금 질투하는 듯했다.

최영식과 내가 호형호제를 하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다.

그녀들은 감히 최영식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같이 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더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도 서로 아직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헌데, 이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저들은 물론이고 조성태까지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최영식보다 더 친하지만 편하게 지내자고 하기엔 다들 너무 어려웠다.

같이 역경을 이겨낸 동료들이 더 소중하긴 하지만 솔직히 막 해도 되는 최영식이 더 편하긴 했다.

그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분명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제법 친해진 것 같은데 말을 놓기엔 왠지 어색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난 그녀들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편의 시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지금은 그렇고 나중에 기회가 되어 자리가 마련되면 그때 설명하는 게 나을 듯했다.

“저 식당이랑 편의점은 누가 운영하는 거지?”

“일단은 저희 길드 소속 헌터 지인들을 불러서 운영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형님한테 허락을 받고 시작했어야 하는데 재난 관리 본부장이 얼레벌레 자꾸 이곳을 차지하려고 들어서 일단 자리부터 잡아 놓느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재난 관리 본부장이 이곳을 차지하려 들었다고?”

“네. 제가 분명 형님한테 이곳에 선착장을 만들고 개발을 해 놓으라고 지시를 받았다 했는데도 제 말을 안 믿고 자기네가 하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리더라고요.”

“헛험. 최영식 마스터님. 그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네요. 전 그저 전달받은 사항이 없어서 확인하려 했던 거고요. 이곳을 차지하려 했던 게 아니라 보시다시피 계속 압수품이 들어오고 이곳에 있는 인원들이 대부분 우리 사람들이니 직접 먹을 것과 휴게실 같은 곳을 설치하려 했던 거예요.”

최영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김용규가 다가와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열변을 토했다.

나름 왜 그랬는지 이유는 되고 있었지만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김용규 본부장님.”

“네. 성주님.”

“이곳은 누구의 것이죠?”

“네?”

“이곳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대한민국에 소속…….”

찌릿.

진짜 해보자는 건가?

“되어 있긴 하지만 이제는 스카이 캐슬의 것이죠. 하하.”

“확실합니까? 스카이 캐슬의 것이 맞는 게?”

“네 물론이죠. 하하. 안 그래도 제가 관련 법규를 통과시키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믿어보죠. 그럼 앞으론 이곳 땅을 사용한 만큼 이용료를 받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이용료를 받겠다고요?”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많이 받지는 못하겠고 컨테이너 하나당 하루에 천 원씩 정도만 받았으면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끙…… 네, 알겠습니다.”

김용규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이곳을 스카이 캐슬의 것이라 했지만 대한민국 소속이라 했다.

별말 아닌 것 같지만 지금 저 말은 스카이 캐슬 역시 대한민국 산하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걸 인정했고.

그나 나나 적이 되면 서로 골치 아픈 것이 많으니 오늘은 이 정도로 타협을 하는 게 나을 듯했다.

“일전에 약속했던…….”

“네. 안 그래도 연락해 두었습니다. 마침 저기 오네요.”

김용규가 나랑 말을 하다 말고 게이트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대전 지역 게이트를 관리하는 화랑 길드를 선두로 수백여 명의 헌터들이 그 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한 달 내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뭉그적거리더니 내가 배를 만들고 나오자 바로 헌터들을 소집한 모양이다.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진 노란색 팔찌.

헌터들의 길드 문양은 제각각이었지만 다들 똑같은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다.

짐작건대 플로라 길드와 동맹을 맺은 길드를 상징하는 징표 같았다.

내가 원한 건 헌터들이 자유롭게 이곳에 와서 영지를 방문하는 것인데 김용규가 밖에서 컨트롤을 하는 듯했다.

“어서 오세요. 이어진 마스터. 이쪽은 스카이 캐슬의 성주님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어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안해용이라고 합니다.”

화랑 길드 마스터이자 A급 헌터 이어진.

생긴 건 꽃미남인데 악수를 하는 손에서 거친 굳은살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이분들이 저희 영지로 가실 분들입니까?”

“네. 제가 이런 기회가 없다고 그렇게 보챘는데도 다들 맡은 게이트를 지켜야 하다 보니 이제야 시간이 났다고 하네요. 하하.”

“그렇군요.”

난 김용규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피쉬와 무구들을 싸게 팔면서까지 헌터들을 방문하게 하려 하는 건 헌터들을 최대한 영지에 오랜 시간 상주시켜 사냥도 하게 하고 살만하면 아예 쭉 눌러앉게 하기 위함이었다.

헌데 김용규가 이미 손을 쓴 것이다.

플로라 길드와 동맹을 맺었으니 이들은 아마 아이템을 구매하면 바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김용규는 나를 바보로 아는 듯했다.

‘참자! 참아!’

차라리 버팔로처럼 나쁜 놈이었으면 그냥 확 엎어 버렸을 텐데 나름 나라를 위해 견제를 하는 것 같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더 오실 분 없으면 출발하죠.”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어진과 헌터들을 배로 안내했다.

‘한번 보죠. 과연 뜻대로 될지.’

딴에는 머리를 굴린 것 같은데 김용규가 하나 모르는 게 있었다.

사람 꼬시는 데는 나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이세훈.

그런 나조차도 혼을 빼놓는 사람이 내 옆에 있었고.

게다가 그가 이렇게까지 견제를 한다면 나도 따로 생각해둔 방법이 있었다.

“영식아!”

“네?”

“너도 타!”

“저도요?”

“얼른 타. 너도 우리 영지 구경해야지.”

“저 아직 공사가 안 끝나서…….”

“타라면 타. 한 시간이면 다시 나올 수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부우우우우우웅!

부우우우우우웅!

함박웃음을 지으며 배에 오른 최영식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모두 올라탔고 우린 다시 영지로 뱃머리를 돌렸다.

* * *

“부르셨습니까? 형님.”

“어. 일로 앉아.”

배에 올라탄 난 최영식을 따로 선실로 불렀다.

“영식아.”

“네. 형님.”

“일본 놈들은 우리 영지에 오고 싶다고 안하디?”

“…….”

“설마 얘기 안 한 거야?”

“……했습니다. 안 그래도 자기네한테는 비싸게 팔아 놓고선 한국 헌터들에게는 싸게 판다며 항의를 하고 있긴 합니다.”

“어휴.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타라고 한 거야 인마.”

“…….”

“너랑 친한 길드만 연락해서 한번 놀러 오라고 해. 한국 헌터들이랑 같은 가격에 준다고.”

“진심이십니까? 정말 그래 줄 수 있나요?”

“너 곤란하다며?”

“네.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그러는 거면…….”

“너도 너지만 김용규가 방해해서 일본 애들한테도 팔 만큼 넉넉하게 준비가 되어 있어. 앞으로도 계속 생산할 수 있고. 물론 앞으로 울프 길드한테는 필요한 만큼 제한 없이 공급해 줄 거야. 그러니까 선착장을 만들어 준 것처럼 외부 일은 앞으로 네가 좀 살펴줬으면 해.”

“감사합니다. 형님! 형님의 믿음에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래.”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최영식의 등을 토닥였다.

“근데 형님. 혹시 미국 쪽에도 연락해도 될까요?”

“미국?”

“네. 그게 사실 레인보우 최병용 마스터도 저한테 넌지시 물어보더라고요. 혹시 가능하다면 자기네도 좀 싸게 구할 수 있는지.”

“최병용이랑 친한가?”

“네. 친구입니다.”

“그래. 오케이. 최병용 마스터도 한번 오라고 해봐. 얘기 좀 해 보게.”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린 지금 헌터가 필요했고 그게 꼭 한국 사람일 필요는 없었다.

“영식아, 한 번만 더 얘기할게. 일본과 미국이랑 거래하는 건 좋아. 하지만 거래에 있어 절대 대한민국이나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있어선 안 돼. 그들에게 끌려다녀서도 안 되고.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형님. 명심하겠습니다.”

최영식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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