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03화 (103/255)

103화. 포도, 늑대, 무지개…… (1)

“포도밭에서 만났으니까 네 이름은 ‘포도’라고 하면 되겠다.”

“포도요? 예쁜 이름이긴 한데 이놈이랑은 왠지 안 어울리는데요. 그럴 거면 차라리 그레이프(Grape)가 낫지 않을까요?”

“그레이?”

“그레이 말고 그레이프요. 포도가 영어로 그레이프잖아요. 이게 더 있어 보이지 않나요?”

“그래. 그레이-프”

“네?”

“프는 묵음 아닌가? 외국 사람들 보니까 그레이-프 이렇게 발음하던데?”

“오! 형 영어도 잘하시네요?”

이부성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이게 놀랄 일인가?’

가끔 드는 생각인데 이부성은 날 진짜 어떻게 보는 건지 궁금했다.

“진짜 더 잘 어울리긴 하네.”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리어카에 올라타 새끼들을 감싸고 있는 그레이를 쳐다봤다.

무분별하게 영어 이름을 짓는 걸 그리 지향하지는 않지만 이부성의 말대로 이놈에게는 ‘그레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린 듯했다.

포도는 왠지 귀엽고 깜찍한 느낌인데 그레이의 외향은 좀 거리가 멀었다.

샤프하고 날렵한 한 외향이 그레이가 딱 이었다.

“방금 한 말은 취소야. 이제 네 이름은 그레이야. 알았지? 그레이!”

“컹컹! 컹컹!”

내가 이름을 정해 주자 그레이도 자신한테 말을 걸고 있는 걸 아는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형, 눈에서 꿀 떨어지겠어요. 그렇게 좋으세요?”

“어, 엄청 좋아. 흐흐.”

쓰담쓰담.

난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그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렸을 때부터 난 강아지를 키워 보는 게 내 로망 중의 하나였다.

허나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나이를 먹어서도 월세방을 전전했던 난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도 키울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집주인이 강아지를 키우는 걸 그리 탐탁지 않아 했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고 귀찮은데 어찌 다른 생명체를 거둘 수 있겠는가.

그래서 TV에서 한 번씩 귀여운 강아지와 함께 출연한 견주들을 볼 때면 큰마음 먹고 한번 키워볼까 하다가도 매번 포기를 해야 했었다.

허나 이제는 하늘 목장이 있으니 부담 없이 그레이와 새끼들을 데리고 가 키워도 될 듯했다.

양몰이 전문 견종 보더콜리처럼 잘 훈련해 목장 일을 돕게 한다면 그레이도 안전한 곳에서 원 없이 뛰어다니며 생활할 수 있고 다른 사람한테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을 테니까.

“형, 도착했어요. 저기 앞에 보이는 곳이 베이스캠프에요.”

십 분 정도 걷자 처음 오크의 숲 베이스캠프에서 봤던 것처럼 수십 개의 천막이 쳐진 곳에 나무울타리가 둘러싸여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엔 검은색 갑주를 차려입은 천여 명의 헌터들이 줄과 열을 맞춰 도열해 있었다.

“뭐야? 설마 나 왔다고 저렇게 다들 모여 있는 거야?”

“형이 와서 저렇게 도열해 있는 건 맞는데 일부러 모인 건 아니에요. 아레스 길드 내부 행사가 있어서 원래부터 모여 있었더라고요.”

“그래? 흠…….”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베이스캠프로 안으로 걸어갔다.

“반가…….”

쿵! 쿵! 쿵!

“아레스의 제자들이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아레스의 제자들이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에이씨.’

이럴 줄 알았다.

어째 서 있는 본새가 불안하다더니 천여 명의 헌터들이 들고 있던 창으로 박자를 맞추더니 모두 내게 무릎을 꿇었다.

일전에 분위기상 그냥 못이기는 척하고 받아줬더니 또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받아주세요. 아레스의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인사드리는 거래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늘 해단식을 하려고 모였는데 마침 성주님과 우리가 도착한 모양이에요.”

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자 지윤미 마스터가 슬며시 걸어와 내게 귓속말을 해 왔다.

“해단식이면 단체를 해산할 때 하는 의식 아닌가요?”

“네. 맞아요. 방금 성주님께 한 인사를 끝으로 아레스 길드를 해산하기로 했어요.”

“엥?”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지윤미 마스터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조성태와 흑기사 부대 그리고 아레스 길드원들을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조성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걸어왔다.

“방금 한 인사를 끝으로 아레스를 길드를 해산하고 스카이 캐슬의 기사단으로 들어가길 청합니다.”

“네? 기사단이요? 기껏 정리하라고 시간을 줬더니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아니 동료들 모두가 원한 일입니다. 이대로 길드를 유지하고 명맥을 유지하면 저희는 돈 때문에 동료를 해치고 나라를 배반한 자가 초대 마스터 길드라는 오명 아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자의 발자취, 채취 하나까지 다 없애기 위해서 저흰 아레스의 이름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좋아요. 그건 이해를 하겠는데 기사단으로 들어오겠다는 말은 뭐죠?”

“성주님께도 약속했지만, 저희 스스로 동료들이 잠들어 있는 하늘 공원을 지키고 스카이 캐슬을 지키기로 다짐했습니다. 아레스의 이름을 버린 마당에 저희가 계속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습니다. 저희를 거둬 주십쇼.”

“거둬 주십쇼.”

“거둬 주십쇼.”

조성태의 선창을 시작으로 베이스캠프 가득 아레스 길드 헌터들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나!

“귀띔 좀 해 주지?”

“대충 상황은 들었지만, 저도 이렇게 나올지는 몰랐어요. 죄송해요.”

당황스러운 상황에 난 이부성을 노려봤고 그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일단 일어나세요. 안 그래도 여기 베이스캠프 때문에 상의할 일이 있었으니 우리 조용한 데로 가서…….”

“허락해 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거둬 주십쇼.”

“거둬 주십쇼.”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지윤미와 박민정, 장지원, 최은빈을 번갈아 쳐다봤다.

난 이곳을 개발시키고 싶다는 뜻을 이들에게 내비쳤고 그러기 위해선 아레스 길드는 계속 이곳에서 상주해야 했다.

“일단 알았다고 하시고 개발 일은 추후에 다시 상의 하는 걸로 해요. 성태가 저리 나오면 저희도 못 말려요.”

“그러세요. 오빠. 하루 이틀 고민해서 내린 결정은 아닌 듯해요. 슬쩍 들어보니 우리가 안 왔으면 오늘 해단식하고 전부 지구로 나가서 스카이 캐슬로 들어오려고 했대요.”

지윤미와 수정이가 말리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나를 부추겼다.

“거둬 주십쇼.”

“거둬 주십쇼.”

무슨 건달도 아니고 거두긴 뭘 거두냐.

흑기사 부대가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면서까지 스카이 캐슬에 도우러 왔을 때부터 이들과 난 이미 한편이었다.

왠지 저 거둬 달라는 말이 단순히 동맹을 맺어 함께 하자는 의미는 아닌 듯했다.

그런데,

“성주님.”

“오빠.”

“해용아,”

“해용이 형.”

지윤미, 권수정, 장지원, 이부성…….

그동안 함께 힘을 합쳐 사람들을 이끌고 있던 지휘관들이 날 보며 다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표정이 빨리 허락하고 이들을 일으키라고 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허락할 테니 일어들 나세요. 그러고 있으면 관절 나가요. 젊었을 때 잘 관리해야죠.”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두 명도 아니고 천 명이 넘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저러고 있으니 창, 칼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것보다 더 부담스러웠다.

“감사합니다. 성주님. 새로운 이름을 정해 주시면 그때 일어나겠습니다.”

“네? 이름이요?”

“기사단의 이름을 정해 주십쇼.”

“제가요? 지금이요?”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정해 주셔도 됩니다.”

“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고…….”

“저흰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끙……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는 건가요?”

난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조성태와 아레스 길드 헌터들을 바라봤다.

사춘기는 지난 것 같고 갱년기가 될 나이는 안 된 것 같은데 다들 지나치게 너무 감성적이었다.

그리고 그때,

“컹컹! 컹컹!”

리어카에 타고 있던 그레이가 조성태를 보며 짖어 댔다.

“흠…….”

“에이. 형 그건 아니에요.”

“그래. 그건 진짜 아니다.”

내가 고민 어린 표정을 짓자 이세훈과 이부성이 날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 암말도 안 했는데?”

“저희가 생각하는 그 이름 말하려는 거 아니에요?”

“너희가 생각하는 게 뭔데?”

“그…… 레이.”

“오!”

난 이부성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내가 무슨 작명가도 아니고 다짜고짜 저리 버팅 기며 이름을 정해 달라는데 재간이 있는가.

“그레이 기사단으로 하죠. 그리고 그레이 기사단의 문양은 여기 있는 개고요.”

“감사합니다. 성주님.”

조성태와 아레스, 아니 그레이 기사단 헌터들은 그때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내,

쿵! 쿵! 쿵!

“그레이 기사단 단장 조성태 그레이의 주인을 뵙습니다.”

“그레이 기사단 부단장 최우람 그레이의 주인을 뵙습니다.”

“그레이의 제자들이 주인을 뵙습니다.”

“그레이의 제자들이 주인을 뵙습니다.”

“컹컹, 컹컹!”

새로운 이름을 받은 그들은 그레이와 함께 내게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해 왔다.

* * *

“……그럼 저흰 일단 오크항으로 갈 테니 당분간 이곳은 그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그레이 기사단에서 맡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해변에서 보았던 유골.

헌터 아카데미.

영지 개발.

조성태에게 이곳에 오며 보았던 것들과 앞으로 해야 할 내용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고 우린 다시 해안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성태는 기사단 전부를 데리고 스카이 캐슬로 들어와 함께 하길 원했지만, 미래를 위해서 여기를 지키고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계속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해용아.”

“네. 형님.”

“너 딱 말해. 태백산맥, 발키리, 그레이, 마녀 부대 중에 누가 원픽이야?”

“……?!”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장지원이 슬며시 다가와 뚱딴지같은 질문해 왔다.

“원픽이라는 말은 또 어디서 배웠대요?”

“말 돌리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어휴.”

난 한숨을 내쉬며 장지원을 쳐다봤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도 아니고 그는 초등학생한테도 하지 않을 질문을 하고 내게 대답을 강요했다.

이글이글.

헌데 그는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되레 눈이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얼굴 가득 서운함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스터, 우리 주제 것 살죠.”

이부성이 다가와 장지원에게 핀잔을 주었다.

“뭐 이 새끼야?”

“마스터 지금 늑대인간 숲 그레이 기사단에 맡겨서 그러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그래! 맞다. 근데 그게 어때서? 연륜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당연히 내가 저길 맡아야 하는 거 아니냐?”

“네. 아니에요.”

이부성이 장지원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보니 그는 이곳이 탐이 났던 모양이다.

사람이 늙으면 명예욕이 강해진다더니 되지도 않는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No. 1 아레스, 아니 이제 그레이 기사단으로 이름 바꾼 조성태와 그의 동료들은 지난 3년 동안 이곳을 지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그에 반해 장지원과 태백산맥 헌터들은 등급도 낮고 길드의 구십 프로 이상이 얼마 전에 가입한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만약 태백산맥에게 여길 맡기면 난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형님.”

“그래. 해용아.”

“저 형님 여기 보내 놓으면 불안해서 잠 못 잡니다. 그러니 제 옆에 계세요.”

“왜 불안한데?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형님이 제 옆에 계셔서 제가 두 발 뻗고 자는 건데 형님이 이리로 오시려고 하면 전 어떡하라고요? 그리고 카프리도 말로는 틱틱거려도 형님이 간다고 하면 따라간다고 하지 않을까요?”

“흠……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성태가 옆에 있는 것보다 내가 옆에 있는 게 더 든든하다는 거지? 그 거짓말 믿어도 되는 거지?”

“……네.”

난 장지원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버지가 그랬다.

거짓말이 다 나쁜 건 아니라고.

“와아. 저 사람들 아직도 저러고 있네.”

네 시간.

이래저래 일이 있어 예상했던 것보다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는데도 김용규와 재난 관리 본부 소속 헌터들이 선착장에 서서 여전히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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