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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영주님-97화 (97/255)

97화. 쾌속선 (6)

“다녀오겠습니다. 성주님.”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광란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자 지윤미 마스터가 2차 인원을 선발해 지구로 출발했다.

“이제 화장실 좀 가 볼까!”

영지민과 플로라 길드원들이 땅굴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걸 끝까지 비켜본 난 휴지를 손에 들고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렇게 좋냐?”

“어. 너무 좋아.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

“쯧쯧. 무슨 변태 새끼도 아니고…….”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세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그는 모를 것이다.

몇 달을 쭈그려 앉아서 볼일을 보다가 앉아서 해결을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돈이 천억이 생기든. 일조가 생기든.

자고로 먹고 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진짜 나이 먹고 투정 부린다고 할까 봐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매일 아침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반짝반짝.

“우와! 불도 들어오네! 대박!”

“누가 보면 조선 시대에서 살다 온 줄 알겠다. 그만 호들갑 떨고 얼른 나와.”

“그래. 브라덜.”

던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편안하게 아침 볼일을 해결한 난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에게 어깨동무했다.

“야, 어떻게 된 거냐?”

“뭘 어떻게 돼. 전기가 있으니까 당연히 불이 들어온 거지.”

이세훈이 빙그레 웃으며 날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 다리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바람개비?”

“바람개비가 맞긴 하는데 정확한 명칭은 풍력 발전기다. 바람이 워낙에 강하게 불어서 저것들만 다 설치되면 이곳에서 사용할 전기들은 충분히 생산시킬 수 있대.”

“와! 대박!”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십여 개의 풍력 발전기를 쳐다봤다.

내가 보기엔 초등학교 시절 수수깡으로 만들었던 바람개비일 뿐인데 저걸로 전기를 생산한다고 하니 절로 입이 벌어졌다.

“상하수도 공사만 끝나면 내일쯤이면 이제 수도도 놓을 수 있을 거야. 배 건조 작업도 더 빨라질 테고.”

“벌써 수도도 놓을 수 있다고?”

“응. 전기가 생겼으니 파이프 설치만 완료되면 지하에서 물을 끌어 올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하더라고.”

“와아! 이쁜 새끼. 왜 이제야 왔냐.”

비비적비비적.

난 이세훈의 얼굴에 내 볼을 맞대고 부비부비를 했다.

필요하다 싶으면 알아서 준비하라고 했더니 하루가 다르게 영지를 변모시켜 갔다.

사람이 애초에 없이 살았으면 모를까. 잘살다가 가난해지면 그렇게 힘들다더니.

잠시 지구로 나가 집 안에 수도도 있고 좌변기는 물론이고 비데까지 있던 환경에서 살다가 돌아오니 죽을 맛이었는데 이세훈이 알아서 척척 삶의 질을 향상해주고 있었다.

“좋은 건 알겠는데 한 번만 더 이러면 뒈진다.”

“저 사람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대답.”

친구끼리 부비부비 좀 할 수 있는 거지 나와 스킨십을 한 것이 불쾌한지 이세훈이 얼굴이 잔뜩 빨개져 날 노려봤다.

“알았어. 이제 안 그럴게.”

난 이세훈을 쳐다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토지 대장 만들려고 관측하는 거야. 이렇게라도 찜을 해 놔야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겨도 우리 땅이라 내세울 명분도 생기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오. 완전 브레인인데!”

난 이세훈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가 없었으면 정말 큰 일 날 뻔했다.

발키리 길드.

태백산맥 길드.

흑기사 부대.

마녀 부대.

나는 물론이고 기존에 있던 사람들 모두 전부 사냥과 전투에 특화되어 있었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아왔기에 이런 쪽엔 영 젬병이었다.

“내가 지시한 거 아니야.”

“응?”

“내가 저런 걸 어떻게 알고 미리 준비해서 챙겨 왔겠냐. 다 선생님이 알아서 물자도 준비하고 사람들도 섭외해 온 거야.”

“선생님?”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엔.

“하아…… 저 영감탱이가 다 준비한 거라고?”

“선생님께 영감탱이가 뭐냐.”

“선생님은 얼어 죽을.”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서 있었다.

김택진.

김미진의 아버지이자 초등학교 시절 주임 선생님이었던 사람이었다.

김택진을 보고 있자니 기뻤던 마음이 한순간에 식을 정도로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김미진을 처음 본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엄친딸.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우리 반의 반장이었다.

남자 25.

여자 25.

그때 당시 한 학급은 오십 명 정도였고 아마 모르긴 모르되 남학생 25명 중의 20명은 다 그녀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날 좋아했었다.

지금이야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마저 사귄다고 하면서 교제도 하고 그러지만,

‘해용이랑 미진이랑 좋아한대요. 좋아한대요.’

그때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자체만으로도 놀림거리가 돼서 사귀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우린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정도로 제법 친하게 지냈었다.

헌데 김택진이 아이들이 놀리는 소리를 듣고 날 상담실로 불러 따귀를 때리며 혼을 냈다.

26년 전. 그때는 뭐 선생님이 학생들한테 손찌검하는 게 너무나 흔한 일이었고 나 역시 잘못한 게 있다면 훈육 차원에서 얼마든지 맞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김택진은 그것 때문에 때린 게 아니었다.

엄마도 없고.

사글세를 내며 사는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는 학생이 자신의 딸과 친하게 지내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난 뒤, 미진이와 짝꿍이었던 난 자리가 옮겨졌고 그녀도 자신의 생일 파티 때 날 초대 하지 않으며 거리를 두었다.

심지어 당시 살고 있던 집주인이 김택진과 친구였고 우린 이사마저 가야 했다.

미진이와 난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와 같이 이성에 대한 마음조차 모를 어린 나이였는데 김택진은 그것마저 보기 싫어 아예 싹을 밟아 버린 것이다.

그때 당시 날 멀리하는 미진이를 보며 난 아버지가 무서워 그러는 것인지 알았는데 고등학교에 올라가 YMCA에 들어가 다시 만나고서야 난 그 아버지와 그 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스타크래프트의 인기에 힘입어 막 활성화되고 있는 인터넷 문화에 편승해서 얼짱 소리마저 들을 만큼 4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더 예뻐졌고 여전히 공부도 잘하고 모든 사람에게 상냥해 많은 인기를 받고 있었다.

헌데 친구들과 지인들을 대하는 그녀의 웃음과 상냥함은 모두 거짓이었다.

워낙에 귀하고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 그녀는 어딜 가나 주인공이 되어야 했고 또 관심받는 걸 즐겼고 자신의 상냥함과 미소를 무기를 사용한 것이었다.

겉은 그 누구보다 사랑스런 존재였지만 속으론 자신의 아버지처럼 사람을 사귈 때 계급을 두고 만나는 괴물이 된 걸 숨기면서.

트러블 메이커.

이미 한번 아픔이 있고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던 난 CA 활동을 하는 삼 년 동안 남몰래 그녀를 지켜봤고 남녀문제나 친구들이 다툼이 있는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 뒤엔 언제나 김미진이 숨어 있었다.

헌데 불행하게도 내 친구 이세훈이 그녀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져 버렸고 이세훈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그나마 좋았던 내 추억까지 암울하게 변해 버린 것이었다.

나와 크게 형편이 다르지 않았던 이세훈이 싫으면 싫다고 그냥 바로 말을 하면 될 것을 워낙에 관심받고 사랑받는 걸 즐겼던 그녀는 허락도 거절도 아닌 말들로 계속 희망 고문을 하며 삼 년간 그를 자신의 어장 속에 가둬 놓고 고문을 했고 결국 그녀는 나는 물론이고 이세훈에게마저 상처만을 남겨놓고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한국대를 입학한 다른 친구와 사귀기 시작하며 우리와의 인연을 끊어 버렸다.

그런데 어찌 내가 김택진과 김미진을 웃으며 마주할 수 있겠는가.

“해용이구나.”

“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그래. 네 덕분에 나도 그렇고 지역 주민들 얼굴에 다시 웃음꽃을 피웠구나. 네가 이곳에 책임자라고 들었는데 맞지?”

“네.”

끄덕끄덕.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김택진에게 인사를 했고 그는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세상 반가운 얼굴을 하며 날 쳐다봤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애틋했던 스승과 제자가 상봉이라도 한 줄 알고 오해를 할 만큼.

“듣자 하니 여기다가 상점들을 열 거라고 하더구나. 근데 내가 살펴보니 지금처럼 로드 숍으로 넓게 퍼트리는 것보다는 백화점을 지으면 어떨까 싶구나.”

“백화점이요?”

“세훈이한테 들어보니 너도 백화점 근무 경력이 있다고 하더구나. 그럼 너도 알다시피 로드 숍으로 개개인에게 관리를 맡기는 것보다 건물을 크게 지어놓고 한곳으로 몰아서 영업하게 만들면 관리하기도 쉽고 고객들도 헤매지 않아서 좋을 듯하구나.”

“흠…….”

난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김택진을 쳐다봤다.

김택진은 싫지만, 그의 의견은 제법 그럴싸했다.

“지휘부들과 상의해 볼게요.”

“그래. 고맙다. 그럼 이왕 상의 하는 김에 호텔이랑 관공서도 옆에다가 짓는 것도 물어봐 주렴.”

“호텔이랑 관공서요?”

“헌터들이 몰려오면 그들이 묵을 숙박 시설도 필요하고 이번에 같이 들어온 사람들을 제대로 정착시키려면 동사무소는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세훈아.”

난 김택진의 말을 끊고 이세훈을 쳐다봤다.

“응? 왜?”

“부성이랑 상의해서 네가 알아서 해 줘. 너도 알다시피 난 지금 이런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난 이세훈에게 지시하고 나서 다시 어깨를 으쓱하며 김택진을 쳐다봤다.

“선생님. 저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 앞으론 여기 있는 세훈이한테 허! 락!이나 결! 제!를 맡고 진행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김택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주.

난 이곳의 총책임자다.

그 말은 즉 나와 이렇게 직접 대면해서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권력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난 김택진에게 그런 힘을 갖게 해 줄 생각이 없었다.

“부마스터님.”

“네. 성주님.”

“저자와 저자의 딸에게 사람을 붙여 주세요. 저자가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지. 무슨 말을 나누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제가 다 알아야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난 용무를 마치고 저 멀리 걸어가는 김택진의 뒷모습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신경을 쓰지 않는 사이 꽤 깊숙이 우리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구청장 생활 12년.

내가 알기론 그는 구청장을 세 번이나 연임하고 나서 물러난 줄 아는데 그걸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군가에 지시를 받고 왔거나 딸까지 데리고 함께 온 걸 보면 스스로 뭔가 야망을 갖고 자처해서 들어 온 듯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고 그는 이렇게 고난까지 자처하며 들어와서 아무런 대가 없이 도울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당장 도움이 되니 놔두기야 하겠지만 경계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시냇물을 흙탕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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