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쾌속선 (3)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
나이도 젊고 각성까지 한 나도 힘들어 아버지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었더니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손을 저으셨다.
표정을 보아하니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부터 챙기라고 일부러 괜찮은 척을 하는 것 같았다.
“오빠, 오징어 드실래요?”
“응? 웬 오징어야?”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들어오기 전에 좀 챙겨 왔어요.”
질겅질겅.
힘들어하는 아버지랑 통장 아주머니와 달리 은솔이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오징어까지 씹어대며 살짝 신마저 나 있는 듯했다.
이래서 나이엔 장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신체적으로 분명 내가 더 강하고 튼튼할 텐데도 텐션 자체가 달랐다.
“안 힘들어?”
“네. 안 힘들어요. 깜깜해서 쪼금 무섭긴 하지만 재미있어요.”
“재미있다고?”
“네. 예전부터 이렇게 가족들이랑 다 같이 놀러 가고 싶었거든요. TV에서 보면 여름에 강원도 가려면 몇 시간씩 이렇게 차가 서행을 한다는데 한 번도 못 해 봤거든요.”
은솔이가 날 보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진짜 애는 애인가보다.
이런 상황에서 여름휴가 가는 것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질겅질겅.
‘좋네.’
은솔이가 건네준 오징어 다리를 하나 씹으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나도 살짝 지루함과 피곤함이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언니도 하나 드세요.”
“어, 고마워. 맛있네.”
질겅질겅.
은솔이에게 오징어 다리를 건네받은 수정이의 얼굴에도 어느새 살짝 미소가 가라앉았다.
“은솔아.”
“네?”
“딱 3개월만 참아. 처음에 가면 많이 힘들고 답답하겠지만 3개월 안에 오빠가 컴퓨터도 할 수 있고 핸드폰도 할 수 있게 해 줄게.”
“진짜요? 저 정말 그게 제일 걱정됐는데. 오빠만 믿고 꾹 잘 참아 볼게요.”
은솔이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파이팅하는 자세를 취했다.
“오빠, 도착한 것 같아요.”
은솔이와 대화를 하다 보니 시간이 물처럼 흘러가 어느새 오크성 인근에 도착했다.
저 멀리서 빛이 들어왔고 지윤미 마스터와 영지민이 모여 서 있는 게 보였다.
“발키리의 제자들이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태백산맥의 제자들이 스카이 캐슬이 주인을 뵙습니다.”
“흑기사 부대가…….”
“마녀 부대가…….”
땅굴에서 나오자 군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내게 인사를 해 왔다.
영지민은 허리를 깊게 숙이며 최대한의 존경심을 표현했고.
‘거참, 이거 하지 말라니까.’
일전에 분명 이런 인사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에 격식을 차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모두 제가 없는 동안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윤미, 장지원, 유거성, 김성준, 카프리…….
난 영지민을 보며 두 팔을 벌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한 열흘 헤어져 있었는데 일 년은 못 본 것처럼 다들 반가웠다.
“오! 퀸즈다! 퀸즈! 대박! 말로만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진짜 여신들을 이렇게 모시고 올 줄 이야.”
“꺄악! 포텐 오빠! 이쪽으로 오세요. 오시느라 힘들었죠. 제가 숙소로 안내해 드릴게요.”
“오! 십칠 년산. 카프리. 일로 와 봐. 이게 바로 양주라는 거야.”
“양주 며칠 전에 먹었다. 맥주는 없냐. 멍청이? 맥주를 찾아라. 난 맥주가 입맛에 더 맞는다.”
“……?!”
당황스럽다.
오랜만에 만나 감격의 포옹이라도 해 줄지 알았는데 영지민이 다 나를 지나쳐 연예인들과 우리가 가져온 물품으로 달려갔다.
“형 저라도 안아 드릴까요?”
“그럴래?”
“네.”
꼭.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이부성과 포옹을 했다.
“우와! 춘장이네. 대박 빨리 가서 짜장면부터 만들어야겠다.”
“형님, 여기 피자 토핑 재료도 있습니다. 전 피자를 만들겠습니다.”
“오! 전기 톱날!”
오랜 시간 바깥 물품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영지민은 성주님을 보고서도 짧은 인사를 끝으로 거들떠보지 않았다.
밖에서는 국민 영웅이자 S급 헌터로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지만, 이곳에선 춘장과 피자 토핑에게 조차 밀리는 존재였다.
“우린 찬밥이네. 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숙소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
“어머니랑 은솔이는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난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아버지를 모시고 숙소로 걸어갔다.
* * *
“해용이 형, 같이 가서 씻으시죠. 다른 분들도 나와서 다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막사에 들어와 짐을 풀고 누워있던 것도 잠시 난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아버지와 이세훈이 세면도구를 손에 들고 광장에서 줄을 서 있는 게 보였다.
다들 열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경운기를 타고 땅굴을 넘어오느라 온몸 가득 흙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야 운디네와 카샤가 있어 굳이 계곡까지 가서 씻을 필요가 없었지만 오랜만에 아버지와 친구와 함께 씻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아 따라가기로 했다.
“바나나 우유가 있으려나.”
“하하, 안 그래도 형이 찾을 것 같아서 제가 챙겨왔지요.”
이부성이 손에 바나나 우유를 잔뜩 들고 날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
“세훈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형 어렸을 때 아버지랑 목욕탕 가면 꼭 바나나 우유를 먹었다고.”
“응.”
끄덕끄덕.
초등학교 시절. 가끔 주말에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같이 목욕탕에 가서 꼭 바나나 우유를 사주셨다.
목욕탕에 가서 목욕하고 나면 탈수 증세 때문인지 시원하고 달콤한 바나나 우유 하나를 먹으면 그렇게 맛이 있었다.
그래서 이세훈과 술을 먹다 보면 가끔 그때가 생각나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난 뜨거운 물도 없어서 찬물에 씻어야 하는지 알았는데.”
30분 정도 기다리고 나서야 뜨거운 물을 받은 이세훈이 만족한다는 표정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어지간한 추위가 아니면 찬물에 몸을 씻었는데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위해 나름 신경을 쓴 모양이다.
“이 정도면 살 만하겠어?”
“어. 재미있네. 다시 군대 온 기분이야. 이럴 때 아니면 내가 언제 너랑 아버지랑 이렇게 같이 씻어 보겠냐. 저 봐. 아버지도 말은 안 하시지만 좋아하시잖아.”
“그러게.”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사람들이 힘들어할까 걱정을 했는데 다들 얼굴에 미소가 서려 있었다.
밖으로 나갔던 덕분에 생활 물품 역시 들여올 수 있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나름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씻는 게 재미는 있는 듯했다.
“아버지. 제가 등 밀어 드릴게요.”
“……그래.”
때 수건을 손에 들고 아버지에게 다가가자 아버지가 군말 없이 내게 등을 맡기셨다.
아버지 성격상 내심 됐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다린 모양이었다.
“때가 많을 거야. 다른 사람들 보면 창피하니까 물 뿌리면서 해.”
“네, 알겠어요.”
“돈 내고 밀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한테 밀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몇 년 동안 못 밀어서 그래.”
“……네.”
등을 밀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변명부터 늘어놓으셨고 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계속 물을 뿌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아버지의 등에선 진짜 때가 많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등을 마지막으로 밀어준 게 언젠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세훈아, 일로 와. 놀면 뭐 해. 아버지가 등 밀어줄게.”
“네. 감사합니다. 부성아, 너도 컴 온! 앞에 서. 넌 내가 밀어줄게.”
“네.”
나, 아버지, 이세훈, 이부성.
우린 마치 기차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란히 서서 서로의 등을 밀어주었다.
“다 밀었다. 부성아, 거기 옆에 비누 좀 줄래.”
“네? 비누요?”
“어. 형이 급하게 오느라 안 가져와서.”
“네.”
조금 환경이 열악하긴 하지만 영지에 돌아오니 밖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정을 자연스레 나눌 수 있게 되었다.
* * *
첫날 밤이 지나고 새로운 해가 뜨자 이른 아침부터 이세훈이 섭외한 기술자들과 인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이 새벽부터 일을 시키고 그래.”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화장실은 빨리 어떻게 해야겠더라고. 어젯밤에 볼일 보러 나왔다가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아침 6시.
너무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에게 일을 시켜 내가 나무라니 이세훈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왜 뱀이라도 나왔냐?”
“헉! 어떻게 알았냐?”
“뭐 뻔하지. 볼일 보다가 까무러칠 만한 게 그것밖에 더 있나. 흐흐.”
난 이세훈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볼일을 보다가 그가 뛰쳐나올 것을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기술자들이라 뭐가 달라도 다르네.”
이세훈을 잠시 골려준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 공사하는 것을 지켜봤다.
발전기, 타일, 좌변기, 벽돌, 시멘트…….
보아하니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기술자들은 순식간에 공중화장실의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짐작건대 이대로만 진행되면 오늘 저녁쯤에 환하고 밝은 곳에서 앉아서 볼일을 볼 수 있을 듯했다.
“상수도와 하수시설은 좀 걸릴 거야. 미리 준비하고 오긴 했는데 만만치가 않은가 봐.”
“그렇겠지. 천천히 해도 되니까 너무 서두르지 마. 사고가 생기는 것보다는 조금 늦어도 안전하게 하는 게 나으니까.”
“걱정하지 마. 다들 베테랑들이라 알아서 조절들 할 테니. 근데 집을 짓는 게 문제야.”
이세훈이 임시로 지어진 숙소들을 쳐다보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집이 왜?”
“지금처럼 단독 가옥으로 지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지켜야 할 범위가 넓어지잖아.”
“흠…….”
“기술자들이랑 상의해 봤는데 당분간은 좀 불편하더라도 지금 있는 임시 숙소에서 지내고 장소를 정해 주면 차라리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
끄덕끄덕.
이세훈의 설명을 들은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마음 같아선 가구당 한 채씩 집을 지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몬스터로부터 영지민을 보호하기도 까다로울 것 같긴 했다.
게다가 무분별하게 나무를 자르고 숲을 훼손하며 마을을 형성했다가 홍수와 산사태와 같은 자연의 복수를 당하는 것도 염려스러웠다.
지금까지야 기껏해야 천 명 정도 기거하고 있어서 티도 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사람이 들어오고 숲을 개간하다 보면 세계수도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난 이세훈과 기술자들을 데리고 동충하초 밭 옆으로 데리고 갔다.
“이쯤에다 아파트를 지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좋네요. 여기다가 아파트를 지으면 바닷가도 보이고 혹시 성벽이 무너져도 후방에 있어 도망갈 시간이 있으니 딱 안성맞춤일 것 같습니다.”
주위를 살펴본 기술자들이 날 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 처음 바닷가로 왔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였다.
이곳을 부산 해운대처럼 휴양지이자 주거 지역으로 개발하면 참 좋을 것 같다고.
경치도 경치지만 기술자가 했던 말처럼 배만 확보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와도 배를 타고 다 도망가면 되기에.
게다가 배만 확보가 된다며 배로 물자와 사람을 이동시킬 것이기에 물자를 나르는 번거로움도 최소한으로 한정시킬 수 있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