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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영주님-89화 (89/255)

89화. 데스나이트 (1)

부들부들.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 조성태의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분노와 슬픔…….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의 복잡한 심경과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우린 이만 내려가죠.”

“네.”

“네.”

난 조성태만 남기고 일행들과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성주님.”

“성주님.”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도착하자 최우람과 김봉준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한 명, 두 명, 세 명…… 열여덟 명.

부대장들의 뒤쪽에 강태훈의 친위대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여기도 알아서 정리된 모양이다.

“길드원들이 다행히 저희 말을 다 믿어 주었습니다.”

끄덕끄덕.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레스 길드원들을 쳐다봤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길드를 떠나 있었음에도 부대장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 신뢰와 믿음이 가득했다.

No.1 아레스.

비록 생긴 지 몇 년 안 됐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길드로서 저력이 있었다.

계속 정상이 오염되면 밑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구정물이 튀기 마련인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성이 바른 사람들인 듯했다.

“우린 먼저 용산에 가 있을 테니 천천히 정리하세요.”

“이대로 가시겠다고요?”

“제가 더 머물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상황의 여의치 않아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 아레스의 문제는 아레스 사람들끼리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난 최우람의 등을 토닥거린 후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더 이상 관여를 하는 건 아레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의심을 했지만, 조성태와 흑기사 부대를 믿고 뒷정리는 알아서 하라고 맡겨도 될 것 같았다.

“태백산맥도 인성을 보고 뽑았어야 했는데…….”

아레스 길드원을 보고 있자니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미꾸라지 한 마리가 날뛰면 흙탕물이 되듯이 조금 더 유의하고 길드원을 모집하지 않은 게 이제 와 후회가 되었다.

헌터 등급과 길드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레스 길드원들처럼 인성만 바르다면 오십 명의 단출한 길드라 하더라도 그 어떤 모진 풍파와 비바람 속에서도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 테니까.

“저 성주님…….”

“네?”

“싫어하시는 거 알지만 길드원들이 성주님한테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인사요?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그리 힘들게 얘기를 하나요? 누구랑 먼저 하면 될까요?”

인사는 차차 정리되고 나서 나중에 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먼저 하고 싶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아레스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

쿵! 쿵! 쿵!

“아레스의 제자들이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아레스의 제자들이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아레스 길드 헌터들이 별안간 창을 바닥에 찍으며 박자를 맞추는가 싶더니 별안간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내게 기사의 예를 갖췄다.

‘아…….’

깜빡했다.

내가 성주로 취임 됐을 때 받았던 인사가 아레스의 인사 방식이었다는 것을.

난 얼굴이 잔뜩 붉어져 아레스 헌터들이 만들어 놓은 예도 길을 걸었다.

처음 받아 봤을 땐 손발이 없어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이 오그라들었지만 한번 받아 봐서 지금은 살짝 적응된 듯했다.

게다가,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 고마움이 가득해 정색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 * *

서울 용산.

밤의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붉은빛을 내는 게이트 인근에 도착하자 백여 명의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놓고 길을 통제하고 있었다.

“잠시 검문…….”

“이아영이에요.”

“충성! 근무 중 이상 무!”

잔뜩 각을 잡고 위압감 있는 모습으로 다가왔던 군인이 이아영 마스터를 보자마자 경례를 하며 바로 길을 열어주었다.

‘에스 마트?’

게이트 입구 쪽으로 다가가니 에스 마트 로고가 새겨진 수십 대의 배송 차량들이 오고 가는 게 보였다.

전부 기본 3톤 차량은 되어 보였다.

“오셨어요. 형. 어떻게 가신 일은 잘 해결되셨어요?”

“응. 성태 씨가 아레스의 마스터가 될 것 같아.”

“이야. 잘 됐네요.”

게이트 입구에 도착하자 이부성이 헐레벌떡 다가와 날 반겨줬다.

“생각보다 조용하네?”

“혹시 몰라서 바로바로 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형도 얼른 들어가 보세요. 버팔로 길드한테 뺏어온 게 어마어마해요.”

“그래?”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이내 이부성이 내 팔을 잡고 반강제로 안으로 끌고 갔다.

“저게 다 돈은 아니지?”

“돈 맞아요. 형.”

“헐…….”

던전 안으로 들어온 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던전 안 광장에는 어느새 수백여 개의 컨테이너 박스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중에 서너 개가 오만 원짜리가 든 박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장난 아니죠? 지금까지 압수한 현금이랑 귀금속만 족히 천억 원은 될 것 같아요.”

“천억 원이나 된다고? 버팔로 애들 은행도 하고 있었데?”

“다들 비밀 금고에 현금이랑 금이랑 귀금속이 장난 아니게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놈들도 그놈들이지만 버팔로 길드한테 뇌물 받아먹은 놈들 집에는 더 많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부성이 잔뜩 신이 났는지 어깨까지 들썩이며 입을 쉼 없이 움직였다.

“형 이리 와서 이것도 좀 보세요.”

“여기엔 또 뭐가 들어있는데?”

“술이요.”

“술?”

“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양주에요. 그것도 다 열일곱 살 이상 먹은 것들이에요.”

“술까지 다 뺏어 온 거야?”

“네. 카프리 갖다 주면 좋아할 것 같다고 박민정 부마스터가 깡그리 압수해서 다 보내 주고 있어요.”

“헐…….”

“가게도 가게지만 다들 집도 엄청나게 잘해 놓고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있는 것들도 먼지까지 다 털어 오고 있어요.”

“…….”

장롱, 소파, 침대, 냉장고, 세탁기, 식탁…….

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광장 안에 있는 컨테이너를 살펴봤다.

현금과 술뿐만이 아니라 컨테이너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박민정이 제대로 필이 받아 아예 버팔로의 뿌리 기둥까지 뽑아 오고 있는 듯했다.

한창 컨테이너 박스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저 멀리 장부로 보이는 종이 사이에 파묻혀 있는 김용규 본부장이 보였다.

“바쁘십니까?”

“앗! 성주님.”

“뭘 그렇게 놀라세요.”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시니…….”

내가 아는 체를 하자 김용규 본부장은 혼자 곶감이라도 훔쳐 먹다가 걸린 거처럼 깜짝 놀라 했다.

“이것들은 뭔가요?”

“버팔로 길드원들이 소유하고 있던 집과 땅문서 그리고 매장에서 뺏어온 장부들입니다.”

“뭐 재밌는 거라도 있나요? 꽤 심취해 있던 것 같은데?”

“너무 재미있어서 탈입니다. 제가 조사했던 것보다 버팔로에게 용돈을 받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더군요. 아마 이대로 몇 년만 더 놔뒀으면 윗선은 물론이고 전국에 있는 동네 파출소 말단 순경까지 전부다 버팔로의 검은 손이 닿았을 겁니다.”

김용규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컨테이너 서너 개에 가득 차 있는 장부들을 쳐다봤다.

“어마어마하네요. 이것들 정리하면 얼마나 될까요?”

“현금과 현물을 합쳐 지금까지 압수한 물품이 대략 삼천억 원쯤 되고 죄인들은 천여 명쯤 잡아들였습니다. 아마 이대로 이, 삼 일만 더 진행되면 조 단위의 금액이 압수될 것 같습니다.”

“조요? 게다가 이, 삼 일을 더 하시겠다고요?”

“네.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눈치를 채고 도망간 놈들도 있고 장부를 살피면 살필수록 새로운 것들이 계속 나타납니다.”

김용규가 세상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불과 몇 시간 전에만 해도 공무원 드립을 치면서 내게 반기를 들더니 지금은 어째 이부성보다 더 신이 난 사람 같았다.

“괜찮겠습니까? 지금보다 더 일을 키우면 아무리 본부장님이라도 뒤처리하는 게 만만치 않을 텐데요?”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삼 일이 아니라 한 달을 진행해도 여기 있는 장부들이 저희의 훌륭한 방패가 되어 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미 저를 견제했던 대부분 사람이 죽거나 이곳에 잡혀 와 있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얘기를 하신다면 저야 상관이 없긴 한데…….”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삼 일을 하든 한 달을 하든 난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래 하면 할수록 더 좋았다.

이 상황이 유지될수록 광산에서 일할 인력과 재물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쌓일 테니까.

“이런 캐릭터 아니지 않았나요?”

“돈 때문이 아닙니다. 사태가 이렇게 심각한지도 모르고 눈치를 봤던 저를 죽이고 싶을 정도입니다. 만약 미리 알았으면 웨이브를 막는데 골머리를 썩일 게 아니라 그 전에 쿠데타라도 먼저 일으켜서 다 뒤집어 엎어버렸을 겁니다.”

날 바라보는 김용규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가뜩이나 게이트와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그걸 기회 삼아 나쁜 놈들까지 더 활개를 치고 다닌 모양이다.

“저보다 한참 선배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때론 무식한 게 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네. 그렇더군요.”

김용규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군사 정권 시절.

근현대사에 있어 우리 민족의 최대 암흑기이기도 했지만, 누구도 부인 못 할 잘한 일도 하나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국에 있는 깡패들과 연결된 자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잡았다는 것이다.

만약 김용규의 뜻대로 뒤처리했다면 이런 쾌거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건국된 지 이제 갓 백 년이 된 나라에서 뭐 그렇게 얽히고 섞여 있는지 아마 법대로 처리를 했으면 이 중에 절반도 처벌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 상실증 드립을 치면서 그마저도 안 될 가능성이 컸다.

돈 있고 빽만 있으면 우리나라 법은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관대했으니까.

다만,

‘괜찮으려나?’

적이 너무 많이 생길까 봐 염려되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정치인과 재벌들이랑 계속 배척하는 건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쯤 되면 차라리 진짜 쿠데타라도 일으켜서 정권을 잡는 게 더 안전할 듯싶었다.

몬스터 웨이브를 대비하기 위해 김용규 본부장이 군인들을 자유롭게 이동시킬 수 있고 우리가 헌터 협회도 장악하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그런데 그때,

“보, 본부장님, 큰일 났습니다. 인천에, 인천에…….”

“이 사람아, 인천이 뭐?”

“인천에 있는 게이트에서 데스나이트가 출몰했습니다!”

“이런 젠장!”

“끙…….”

재난 관리 본부 길드 소속 헌터가 헐레벌떡 뛰어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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