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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영주님-88화 (88/255)

88화. S급 헌터 (4)

‘젠장! 눈치챈 건가?’

아레스 길드 본부 건물 앞에 도착하니 수백 명의 헌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성태 씨, 판단에 따를게요.”

난 조성태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의 계획은 아레스 길드원들과의 마찰 없이 10층으로 올라가 강태훈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왠지 저들이 우릴 곱게 올려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무턱대고 공격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가서 대화라도 나눠 보고 싶습니다.”

“네, 알겠어요.”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눈에 보이는 헌터들이 이백 명쯤 되어 보였다.

흑기사 부대 24명.

A급 헌터 7명.

명수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전력상으론 우리가 압도적인 우위를 갖고 있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성태 아니냐?”

“잘 지냈어요. 형. 근데 무슨 일 있나요? 이 시간에 애들이 많네요?”

“별일은 무슨. 회식한다고 해서 다들 모인 거야.”

횡단보도를 건너 아레스 건물 앞에 당도하자 검은색 갑주를 차려입은 사내가 나와 함박웃음을 지으며 조성태를 반겨줬다.

“마스터 보러 온 거야?”

“네. 말도 없이 떠나서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잘 왔다. 안 그래도 마스터가 많이 섭섭해했어. 보고도 없이 던전에 들어가서 몇 달 만에 나와 놓고도 한번을 안 찾아온다고. 10층에 있으니 올라가 봐.”

아레스 헌터들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에게 길을 열어줬다.

그런데 그때,

“우람아, 넌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저요?”

“그래. 인마. 마스터 만나러 가는데 그렇게 우르르 몰려갈 필요 뭐 있어.”

“저도 인사는…….”

“마스터 조금 있으면 내려올 거야. 그때 인사해. 형이 너한테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

조성태와 인사를 주고받은 사내가 흑기사 부대장 최우람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반강제로 휴게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이내,

“아, 맞다. 봉준아, 너도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저요?”

“내가 이번에 던전에 들어갔다가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은 액세서리를 하나 구했는데 한번 봐 봐. 마음에 들면 내가 싸게 넘겨 줄게.”

“……?”

또 다른 사내가 나타나 흑기사 부대장 김봉준에게 어깨동무를 하고선 또 반강제로 끌고 갔다.

얼핏 보면 오랜만에 동료를 만나 반가워서 그러는 것 같긴 했지만 뭔가 많이 어색했다.

“마스터 친위대에요.”

“친위대요?”

“보아하니 부대장들과 함께 저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워 일부러 떨어뜨린 것 같네요.”

“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욕심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옛 동료를 해칠 만큼 삐뚤어진 사람들은 아니에요.”

부대장들이 끌려가는 걸 보면서도 조성태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

“대장님.”

“……?”

아레스 길드 헌터 한 명이 슬며시 다가와 조성태에게 말을 건네 왔다.

“올라가시면 안 돼요.”

“……?”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갑자기 회식한다고 부른 것도 그렇고. 제가 알기론 지금 마스터 실에 청방 길드 헌터들이 방문해 있어요.”

“청방 길드 헌터가? 몇 명이나?”

“이십 명 정도 올라가는 걸 봤어요. 혹시 모르니까 기다렸다가 부대장들과 같이 올라가세요.”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온 헌터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찝찝하다 했더니 강태훈이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근데 난 괜찮으니까 부대장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지만 확인해 줄 수 있을까?”

“대장님 실력은 알지만 청방놈들도 꽤 상위 헌터들이었어요. 이대로 올라가시면…….”

“괜찮대도.”

툭. 툭.

조성태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걱정하는 헌터의 등을 쓰다듬은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런데,

삐이이이이!

“열 명 밖에 안 탔는데?”

같이 온 인원의 절반도 타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가 요란하게 소리를 울려 댔다.

“아까 엘리베이터 점검을 하는가 했더니 수리를 한 게 아니라 정원을 바꿔 놓았나 봐요.”

“…….”

“대장님. 지금이라도 빠져나가세요.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길드가 옛날 같지 않아요.”

“맞습니다. 저희가 길을 열어 줄 테니 지금이라도 돌아가세요.”

백여 명의 아레스 길드 헌터들이 야단법석을 치며 다가와 우리에게 계속 도망치라고 부추겼다.

나머지 백여 명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우릴 지켜보고 있었고.

‘조성태의 말이 사실이었네.’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레스 길드 헌터들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다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저 위에서 소집 명령이 떨어지니 영문도 모른 채 불려 온 모양이었다.

‘저놈들은 강태훈 편인가 보네.’

한 명, 두 명, 세 명…… 열여섯 명만 빼놓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열여섯 명만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과 코끝을 찡그리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성태 씨, 우리끼리 올라가죠.”

“네?”

“여긴 괜찮은 것 같네요.”

난 빙그레 웃으며 조성태와 A급 헌터들만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보아하니 타겟이 조성태 하나뿐인 듯했다.

흑기사 부대원들은 남겨 둬도 크게 탈이 없을 듯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아하니 조성태가 올 것을 예견하고 십층에 은밀히 함정을 판 모양인데 우리가 원하던 바였다.

* * *

“우리 성태 왔냐!”

“네. 형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래. 안 오길 바랐는데 결국 왔구나.”

마스터 실에 들어가자 190cm의 거대한 키와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 사내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우릴 맞이했다.

이 자가 아레스 길드의 마스터인 강태훈인 듯했다.

“한잔할래?”

“아닙니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새끼. 성격 급한 거는 여전하네.”

유리잔에 양주를 따르던 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보아하니 제가 버팔로 길드 지부를 친 것을 들은 것 같은데 그쪽과 연관이 있으십니까?”

“다 알고 왔으면서 남사스럽게 뭘 그런 걸 묻고 그래. 나도 어지간하면 거절하려고 했는데 이천억 원이나 준다고 하더라고. 눈 한번 질끈 감으면 그 큰돈이 생기는데 거절한 재간이 없더라고. 크으.”

강태훈이 양주를 들이켜며 이실직고를 했다.

그의 얼굴 어디에도 죄의식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터벅터벅.

터벅터벅.

마스터 실 안으로 이십여 명의 헌터들이 들어왔다.

보아하니 이들이 아까 들었던 청방 길드 헌터들인 모양이었다.

“게이트를 지키고 있던 길드원들이 실종됐다고 하던데 설마 돈 때문에 형제들까지 죽인 겁니까?”

“에휴. 나도 그 일은 정말 속상했어. 근데 두당 십억씩이나 나눠 주겠다는데도 이놈들이 길드를 나가겠다고 협박을 하잖아.”

부들부들.

부들부들.

강태훈의 대답을 들은 조성태의 몸이 급격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개새끼가 고작 돈 때문에…….”

“쯧쯧. 아무리 화가 나도 형한테 개새끼가 뭐냐. 넌 예전부터 그게 문제였어. 그놈의 성질만 조금 죽이면 내가 참 예뻐했을 텐데 말이야. 그럼 이렇게 허무하게 개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강태훈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청방 길드 헌터들을 바라봤다.

챙! 챙! 챙!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무 개의 검이 조성태의 목을 겨누었다.

A급 2명, B급 8명, C급 10명.

밑에 있던 아레스 길드원이 얘기한 것처럼 모두 상위 헌터들이었다.

“그 자신감은 저들 때문인가요?”

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소파에 앉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

“그건 알 거 없고. 그 패악질을 해 놓고도 그리 자신만만하게 저들 때문인지 물었어요.”

“푸하하하. 이거 재미있는 놈이네. 보아하니 성태가 새로 거둔 아이 같은데 죽을 때가 되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네.”

강태훈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그는 이 상황이 진짜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 싸대기라도 날리고 싶은데 난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애써 참아냈다.

지금 내가 손을 대면 저자를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돈 때문에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조한 것도 모자라 비밀을 지키기 위해 동료까지 죽였다는 말을 하면서도 실실 웃는 것을 보고 있자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오늘 처음 봤는데도 사람을 이렇게 열 받게 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가 저지른 만행을 접어 두고도 웃는 표정조차 사람을 빈정 상하고 열 받게 하는 얼굴이었다.

“너도 너지만 너희 아이들도 참 이게 문제야.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넓은데 성태 네가 최고인 줄 알잖아.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똥오줌 못 가리고 기어오르고 말이야. 넌 죽어도 곱게는 못 죽겠다.”

스윽.

강태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부들부들.

얼굴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다.

애써 참고 있었는데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했다.

뭐 이미 그의 입에서 들을 말도 다 들었고.

덥석.

으드득.

“으윽.”

난 강태훈의 팔목을 잡고 그대로 반대쪽으로 꺾어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으윽.”

“으윽.”

“으윽.”

옆에서 서 있던 일행들이 순식간에 청방 길드 헌터들을 바닥에 눕혔다.

다들 등급이 높아서 그런지 칼을 휘두르는데도 마치 책을 넘기는 것처럼 부드러운 소리가 들렸다.

지척에서 A급 헌터 일곱 명의 기습을 받은 청방 길드 헌터들은 칼을 맞고 나서도 바닥에 누워 반쯤 넋이 나가 있다가 피가 솟구치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슥! 슥! 슥!

“으윽.”

“으윽.”

“으윽.”

혹여나 반항할 것이 염려됐는지 동료들이 바닥에 누워 신음 소리를 내는 이들에게 다가가 칼을 쑤셔 넣었다.

“죽이지는 마세요. 물어볼 것이 많으니.”

“네. 그러실 것 같아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하고 있어요.”

“이아영 마스터! 당신이 어떻게…….”

강태훈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제야 일행들의 얼굴을 살폈다.

“반가워요. 강태훈 마스터.”

“……?!”

“어휴, 괜히 긴장했네. 난 뭐 대단한 함정이라도 파고 있을지 알았는데 고작 A급 헌터 두 명이랑 이런 애송이들 데리고 와 놓고 그리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거예요?”

“어떻게 당신들이…….”

이아영, 이슬비, 권수정, 조성태, 최은빈, 최병용, 최영식.

일행들의 존재를 확인한 강태훈의 얼굴이 어느새 하얗게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좀 표정이 마음에 드네요.”

난 빙그레 웃으며 강태훈을 쳐다봤다.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가 놓고도 실실 웃고 있는 모습이 제일 꼴 보기 싫었거든요.”

“성주님…….”

“아, 미안해요. 제가 너무 흥분했나 보네요.”

마음 같아선 몇 대 더 때려주고 싶었지만 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조성태에게 강태훈을 양보했다.

“서, 성태야. 우리 좋았잖아. 이러지 말고 형이랑 얘기를…….”

“잘 가쇼.”

“성태 씨…….”

스으윽.

조성태의 검이 순식간에 강태훈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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