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S급 헌터 (2)
던전에 들어가서 첫 낚시에 성공하고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던 이부성.
경호한다고 따라와서 낚시하는 재미에 빠져 마치 강아지처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미끼를 껴 달라고 했던 나현지와 윤다영.
갑작스런 오크들의 대규모 침공으로 절망에 빠졌다가 되레 투석기로 오크들을 몰아낸 기쁨으로 처음 내게 미소를 보여줬던 수정이.
.
.
.
지금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은 한 명, 한 명 모두가 내 가족과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무서웠다.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혹여라도 이들 중에 한 명이라도 다칠 사람이 생길까 봐.
그 때문인 듯했다.
지난 9개월 동안 던전에서 함께 고생하고 웃고 경험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오빠, 오빠, 정신 차리세요.”
“성주님, 멈추세요. 이러다 모두 죽겠어요.”
“해용이 형, 해용이 형.”
“으음?”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내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린 것뿐인데 재난 관리 본부와 플로라 길드 소속 헌터들이 모두 피를 뿜고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뭐가 그리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하마터면 폭주할 뻔했잖아.
‘내가 이런 거야?’
-그래. 멍청아. 하마터면 너까지 위험할 뻔했어.
운디네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저 사람들은 괜찮은 거야?’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 거야? 걱정하지 마. 죽지는 않았으니까.
“휴우.”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쿨럭! 진짜 S급 헌터였다니…….”
바닥에 쓰러진 이아영이 피를 토하며 날 쳐다봤다.
그런데,
씨익.
“하늘이 아직 우릴 버리진 않았나 보네요.”
“……!”
“……!”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라앉아 있었다.
‘괜찮다며?’
-죽지는 않았다고 했지. 괜찮다고 한 적은 없어.
‘설마 정신이 나간 건가?’
짐작건대 내가 저렇게 만든 모양인데 나를 보며 피까지 토하며 웃고 있으니, 마치 호러 영화에 나오는 사이코처럼 느껴졌다.
“모두 무기 내려놔!”
제법 큰 충격을 받았는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이아영이 자신의 일행들을 보며 날 선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마스터님…….”
“내려놔.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턱. 턱.
다들 훈련이 잘 되어 있는지 피를 토하며 쓰러져 놓고도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고 이제야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성주님, 아직 기회가 있다면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이아영 마스터 그게 무슨…….”
“저분 S급 헌터가 분명해요. 제가 느낀 게 맞는다면 지금 저희가 이렇게 된 건 S급 헌터가 구사하는 마나 필드라는 기술이에요.”
“마나 필드요?”
“네. 일본의 겐지가 사용하는 걸 봤어요.”
이아영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김용규와 설왕설래를 펼쳤다.
‘마나 필드?’
-마스터들이 쓰는 그거와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이기는 해.
‘마스터?’
-소드 마스터나 보우 마스터를 말하는 거야. 너희 세계에서 S급이라 불리는 단계와 비슷해. 마스터가 되면 자신의 주변에 있는 마나를 혼자 소유하고 컨트롤할 수 있거든.
‘내가 지금 그걸 한 거라고?’
-아니 넌 소유하고 컨트롤했다기 보다는 그냥 겁먹고 무서워서 힘으로 찍어 누른 거지.
운디네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가진 힘조차 컨트롤하지 못하는 내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본부장님도 아시잖아요.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다는 걸…….”
“네, 알았어요. 마스터의 뜻대로 하세요.”
한참 이아영과 얘기를 주고받던 김용규과 체념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의외였다.
두 사람 모두 절대 자신들이 가진 신념을 굽히지 않을지 알았는데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요?”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아영을 쳐다봤다.
내가 느낀 그녀는 설사 목숨을 담보로 해도 절대 신념을 굽히지 않을 사람이었다.
짐작건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듯했다.
“네. 성주님이 시키는 대로 할게요. 아니 저희가 필요하다면 저들을 던전 안으로 보내는데도 협조를 할게요.”
“협조까지 한다고요?”
“네. 근데 저희한테 제안한 것 중의 한 가지만 더 추가시켰으면 해요.”
“……들어보죠.”
난 호기심 깃든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내 뜻에 따르겠다고 하면 나도 어느 정도까지는 양보할 의향이 있었다.
재난 관리 본부와 헌터 협회하고 지금처럼 적대적인 관계로 지내는 것보다는 같은 편으로 지내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테니까.
“대한민국에 7티어급 이상의 웨이브가 생기면 도와주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럼 성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이고 저희의 여력이 되는 만큼 협조할게요.”
“하아…….”
나도 모르게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내심 미스릴의 양을 늘려 달라거나 다른 금전적인 이익을 조건으로 내걸 줄 알았는데 그녀의 입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끝까지 멋있는 척은 혼자 다 하고 있었다.
그녀와 얘기를 하면 할수록 어째 내가 점점 나쁜 놈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콱 죽여 버릴까?’
-죽이라고?
‘아니 진짜 죽인다는 게 아니잖아. 내가 그 정도로 짜증이 난다는 거지.’
난 부랴부랴 손을 들어 절레절레 흔들었다.
털썩!
“도와주세요. 그럼 설사 법의 테두리 밖의 일을 지시한다 해도 시키는 건 다 할게요.”
운디네한테 손짓을 한 건데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줄 알고 이아영이 무릎마저 꿇으며 내게 사정을 해 왔다.
“법의 테두리 밖의 일을 시켜도 따른다고? 재미있네. 아영이 언니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지는 상상도 못 했는걸?”
“그건 제가 설명하죠.”
박민정이 의외라는 얼굴로 이아영을 쳐다보자 김용규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일본에서 데스나이트를 처치하기 위해서 자국의 땅에 미사일까지 쏘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렇게 됐네요.”
“처치하지 못했습니다.”
“네?”
“미사일까지 쏟아부었는데 부활을 했다는군요.”
“이런…….”
“그나마 S급 헌터인 겐지가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데스나이트와 상대하다 부상을 당해 지금 요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마리까지는 어떻게 상대할 수 있다고 하는데 두 마리 이상부터는 그도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발견된 데스나이트는 모두 세 마리고요. 그래서 일본 정부에서도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인데 헌터의 마나 공격이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하더군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언제, 어떻게 또 웨이브가 생길지 모릅니다.”
“끙…….”
김용규가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이어가더니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고 난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듣기론 도쿄에서 수십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거나 좀비화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야 이들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었다.
‘오크랑 싸우는 것도 무서워서 뒤에만 있었는데 나한테 데스나이트랑 싸우라고?’
이능이 생겼다 하지만 난 심리적으로 아주 약한 사람이었다.
S급 헌터가 되면 뭐 하는가.
데스나이트랑 싸우러 갔다가 재수 없으면 한 번에 골로 가는 수가 있는데.
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아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쯧쯧. 이미 순리를 거스른 존재들인데 무식하게 후려 팬다고 처치가 되나.
운디네가 혀를 차며 김용규를 쳐다봤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는 거야?’
-언데드 몬스터들은 신성력에 취약해. 미스릴로 만든 무기나 힐 계열 마법으로 공격을 해야 해.
‘힐? 그건 치료 마법이잖아?’
-대부분 종족에게는 그렇지. 근데 마족과 언데드 몬스터에게는 상극이야. 그 미사일인가 뭔가로 열 번 공격하는 것보다 힐 한방이 데스나이트에는 더 치명적일 거야.
‘그럼 우린 막을 수 있다는 거야?’
-그치. 남는 게 미스릴이고. 보아하니 플로라 아이들이 제법 치료 능력이 뛰어난 것 같으니 어렵지 않게 막아 낼 수 있을 거야.
운디네가 발키리와 플로라 헌터들을 둘러보더니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길 수 있다고 하면 이길 수 있는 것이었다.
운디네는 나와 달리 아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존재였으니까.
“언데드 웨이브가 생기면 막아 드리죠.”
“저희는 7티어 이상에 웨이브를…….”
“그건 제가 너무 손해를 보는 제안 같네요. 일단 이번 일을 돕는 대가로 그 정도로 약속을 하고 앞으로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더 도울지 말지 결정을 하는 방향으로 하죠.”
“끙! 네.”
“네, 알겠습니다.”
김용규와 이아영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길이 아니면 절대 가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왜 이제야 만났는지 아쉬운 마음이 들 만큼.
20년, 아니 10년만 일찍 만났다면 지금처럼 내가 이 나라에 크게 불신을 갖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기에.
* * *
내 제안에 수긍한 재난 관리 본부와 플로라 길드 소속헌터들은 일사불란하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곳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아영이 언니, 닭 집에 전화 좀 해 줘.”
“안 그래도 지금 불렀어. 30분 이내로 닭장 도착할 거야.”
“닭집이요?”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박민정을 쳐다봤다.
“간혹 헌터 길드끼리 분쟁이 생기면 뒷수습을 하는 업체에요. 닭집은 저희끼리 쓰는 은어고요.”
“흠…… 주로 어떤 뒷수습을 하는 거죠?”
“성주님이 예상하는 일을 하는 업체에요. 지금처럼 던전 밖에서 사상자가 생기면 그들이 와서 시체를 갖고 던전 안으로 들고 가요.”
“끙…….”
“아마 성주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이들은 전부 다 몬스터 밥이 됐을 거예요.”
박민정이 포박당한 버팔로 길드원들을 보며 스산한 눈빛을 보냈다. 아니 왠지 죽이지 못해 아쉬워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저 사람은 아까 세훈이가 불렀던 사람인데…….’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승제를 쳐다봤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했던 사람이었다.
허나 지금은 다른 버팔로 길드원과 함께 묶여 닭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법으로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선 이승제의 증언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라리 이제 속이 편하네요. 하하.”
나와 눈이 마주친 이승제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김용규 본부장님.”
“네?”
“혹시 법조계에 아는 사람 있으십니까?”
“법조계요?”
“네. 이들에게 합리적인 벌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네요.”
“그 말은 지금 이들을 저희에게 넘겨주시겠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이들을 던전 안으로 데리고 가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곳에서 머물 시간을 합리적으로 정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네요.”
“아…….”
내 설명을 들은 김용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이해를 한 듯했다.
이승제처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물론이고 어쩌면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른 채 시켜서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이들 모두를 전부 50년 동안 광산에 가둬두고 일을 시키는 건 아닌 듯했다.
게다가 앞으로 영지에 계속 사람이 늘어나면 분명 범죄가 일어날 테니 형량을 정해 줄 사람이 필요할 듯했다.
“아까도 얘기 드렸지만 수백억의 돈을 횡령한 사람은 무죄, 수십만 원의 돈을 훔친 사람은 징역을 사는 이 나라의 법을 저는 믿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성주님이 마음에 들 만한 사람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김용규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부우웅.
부우웅.
“닭장 왔네. 지현아, 넌 이들 데리고 영지로 먼저 들어가 있어. 우린 버팔로랑 아레스 좀 정리하고 곧 따라갈 테니까.”
“네. 알겠어요.”
마치 의무 경찰이 타고 다니는 버스와 같은 생김새를 한 차 수십 대가 도착해 죄인들을 태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