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귀환 (2)
“슬비야, 좋게 말로 할 때 우리 지팡이부터 치우자.”
“성태 오빠…….”
“딱 셋만 살게. 그때까지도 계속 그러고 있으면 뒷일은 책임 못 진다. 너희가 먼저 무기 들이밀었으니까 원망도 하지 말고. 하나, 둘…….”
“오빠, 잠시만요.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 제 말부터 들어주세요.”
이슬비가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조성태를 쳐다봤다.
그녀와 그녀의 길드원들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수정아, 사정이 있나 본데 가서 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 정말 싸움이라도 나겠는데?”
난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 모습을 쳐다봤다.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우리를 포기하고 버렸던 재난 관리 본부와 헌터 협회.
박민정에게 이미 대충 얘기는 들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적대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화나서 저러는 거 아니에요.”
“응?”
“쟤네 원래 저래요. 아마 오빠 아니었으면 플로라 길드 사람들 이미 다 바닥에 누워 있을 거예요.”
“화난 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데?”
“먼저 무기를 겨누었잖아요. 오빠한테나 고분고분하지. 다 한성격 하거든요.”
수정이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조성태를 쳐다봤다.
“세에엣.”
“모두 무기 내려놔! 어서!”
조성태가 셋을 세는 동시에 이슬비가 비명을 질렀고 모두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지팡이를 내려놨다.
“설명.”
“네?”
“이제 설명해 보라고.”
“……네.”
이슬비가 반쯤 넋이 나가서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들 사이로 숨어든 뱀파이어들 때문에 대한민국은 지금 대 혼란 상태에요.”
“그래서 지금 그 와중에 죽었을 거로 생각했던 우리가 나타나서 뱀파이어인지 의심이 된다. 이 말인가요?”
“죄송해요. 현재로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선 믿을 수가 없어서요. 이해 부탁드려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알았어요. 그 대신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네요. 보시다시피 저희 일행들이 많이 피곤한 상태거든요.”
박민정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휴우. 감사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누구부터 확인하면 될까요?”
“저부터 하죠.”
“네, 알겠어요. 진실한 모습을…….”
“캔슬!”
두우웅.
하얀색 빛의 기둥이 잠시 박민정을 감싸고 사라졌다.
“끝난 건가요?”
“네. 확인되셨어요. 지나가셔도 좋아요. 다음 분.”
박민정을 시작으로 발키리 길드원들도 한 명씩 마법 확인을 받았고 내 차례가 되었다.
“룬 문자? 그 갑옷 어디서 나신 거죠?”
“……?”
내 갑옷에 새겨진 문양을 본 이슬비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어루만졌다.
헌터들을 대할 때 어려워하는 기색이 여력 하더니 내 무구에 손을 댈 때는 스스럼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무례하시네요. 그것도 신분 확인을 하는데 필요한 절차인가요? 왜 함부로 무구에 손을 대는 거죠?”
박민정이 돌아와 이슬비의 팔목을 잡으며 잔뜩 화를 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결례를 했네요.”
“조심하세요. 뱀파이어 때문에 협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 기분이 지금 그리 유쾌하지 않거든요.”
“……네.”
박민정의 포스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서인지 이슬비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좋은 갑옷이네요. 보스급 몬스터라도 잡으신 모양이네요.”
“네. 뭐.”
난 대충 얼버무리며 마법을 기다렸다.
그런데,
“진실한 너의 모습을…… 캔슬!”
“……?”
한창 캐스팅을 하는 것 같았는데 빛의 기둥이 생성되지 않았다.
“마나가 다 소모된 거 아닌가요?”
“아닌데…… 죄송해요. 다시 한번 해 볼게요.”
“네.”
“……?!”
한번, 두 번, 세 번을 했는데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분인데? 설마 각성자셨나요?”
“네. 헬퍼로 들어갔다가 살려고 하다 보니 각성을 하긴 했습니다만…….”
“S급 각성자라니…….”
이슬비가 날 보며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S급 각성이라고요?”
“아닌가요?”
질문은 내가 했는데 그녀가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했다.
-단계를 무슨 기준으로 나누는 건지는 몰라도 저 여자가 A급이라면 넌 S급이 맞아.
‘엥?’
-저 인간 여자가 시전한 마법 우리 때문에 취소된 거거든. 저 인간 여자의 마력보다 우리의 마법 방어력이 더 높아서 그래.
‘내가 저 여자보다 강하다고?’
-그건 모르지. 공격 마법은 또 다른 의미니까. 아무튼 재미있는 인간이네. 룬 문자도 알고. 6 클래스 정도 되려나?’
운디네가 형상화되어 나타나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이슬비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그쪽은 제가 확인을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길드 본부에 가서 확인을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저흰 재난 관리 본부의 도움 요청을 받고 파견을 나온 거예요. 필요하다면…….”
“재난 관리 본부는 얼어 죽을. 내가 허락하지 않는데 감히 누굴 마음대로 데리고 가겠다는 거지? 정말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가자 조성태가 날 보호하듯 앞에 서서 언성을 높이는 것도 모자라 살기마저 내뿜었다.
찌릿.
‘살벌하네.’
왠지 이대로 두면 진짜 이슬비의 목이라도 벨 기세였다.
“성태 씨. 그쯤 하죠.”
“네?”
“다들 그렇게 계속 화를 내시니 제 마음이 너무 불편하네요. 보아하니 모르는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웃으면서 협조해 주세요.”
“죄, 죄송합니다. 성주님.”
조성태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표정을 풀고 뒤로 걸음을 물렸다.
‘운디네.’
-알았어. 다시 해 보라고 해. 이번엔 방해 안 할게.
운디네가 팔짱을 끼고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지금 할 일이 많아 같이 가긴 힘드니 다시 한번 해 보세요. 이번엔 마법 방어력을 봉인해 둘게요.”
“마법 방어력을 봉인한다고요? 그런 것도 가능하세요? 정말 S급으로 각성을 하신 건가요? 누굴 만나신 건가요? 혹시 특별한 존재와 계약을 하신 건가요?”
“뭘 자꾸 꼬치꼬치 캐물으세요? 지금 심문이라도 하는 건가요? 빨리 확인이나 하세요.”
“……네.”
두웅!
박민정이 미간을 찌푸리자 이슬비가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마법을 시전 했고 이번엔 빛의 기둥이 날 감싸는 데 성공했다.
“됐죠? 이제 우리 가 봐도 되는 거죠?”
“네. 그렇긴 한데…… 본부장님은 안 만나 보실 거예요? 귀환하셨다고 하면 좋아하실 텐데.”
“바빠요. 별로 만나고 싶은 사람도 아니고.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하세요.”
“……네.”
박민정 부 마스터.
오늘따라 유난히 까칠하게 굴었다.
허나,
“성주님, 죄송해요. 번거로우셨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미리 조치해둘게요.”
“아, 아니에요.”
나를 대할 때는 또 필요 이상으로 깍듯하고 상냥했다.
* * *
“발키리의 박민정 부마스터가 복귀를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재난 관리 본부 사무실.
본부장 김용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앞에 서 있는 요원을 쳐다봤다.
이미 죽었을 거라 여겼던 사람이 돌아왔기에.
“그것도 S급 각성자랑 함께?”
“네. 플로라의 이슬비 헌터가 그렇게 말했답니다. 자신의 능력으론 그의 힘을 가늠할 수 없었다고.”
“이렇게 기쁠 때가 있나. 하늘이 아직 우릴 버리지 않은 모양이야.”
김용규는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일인 군단이라 불리는 S급 각성자.
보고가 사실이라면 대한민국 최초로 S급 각성자가 탄생한 것이었기에.
“빨리 차 대기시켜.”
“박민정 부 마스터를 찾아가실 생각입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는데 당연히 내가 가서 축하해 줘야지.”
“그게 가실 때 가더라도 상황을 보고 나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재난 관리 본부 1팀장. 임풍훈.
그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김용규를 만류했다.
“일전에 일로 박민정 부 마스터가 저희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팀원들에게 보고 받기론 신분을 확인하려는 플로라 길드와도 트러블이 생길 뻔했다고 하더라고요.”
“끙…….”
김용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제야 자신이 야박하게 굴었던 기억이 생각 난 것이다.
“젠장!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김용규는 하늘을 보며 한탄을 했다.
“확인되진 않았지만, 던전에 들어갔던 사람들 모두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함께 갔던 헬퍼들도 각성을 했거나 그에 육박하는 특별한 힘을 얻은 것 같습니다.”
“헬퍼들이 특별한 힘을 얻은 것 같다고?”
“네. 좀 더 자세히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그들이 입고 있던 무장이 범상치 않아 보였답니다.”
임풍훈은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본부장님께서는 당분간 찾아가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팀원들을 시켜 접촉하여 조사를 먼저 해 보겠습니다. 혹시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저들의 마음을 풀리게 할 방도가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게나. 내가 자칫하면 흥분해서 일을 망칠 뻔했네.”
김용규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 * *
명동 백제 호텔
“여기에 들어가려고요?”
“네. 불편하시겠지만 며칠 이곳에 머물러야 하실 것 같아요.”
“흠…….”
“다시 나올 거란 생각을 못 하고 사택을 다 정리해서…… 죄송해요.”
박민정이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같이 내 눈치를 살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했다.
호텔.
맨날 싸구려 모텔만 가봤지. 태어나 호텔에 와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었다.
“너무 좋네요.”
“네?”
“너무 좋아서 물어본 거예요. 이번 생에 호텔에서 잠을 잘 일은 없을 줄 알았거든요. 하하.”
난 박민정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대리석으로 된 벽.
화려한 인테리어.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이런 곳에 들어오니 진짜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들어가서 잠깐 쉬고 계세요. 전 길드 본부에 가서 현재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고 올게요.”
“저…….”
“네? 무슨 할 말 있으세요?”
“그게…….”
피자랑 치킨이 먹고 싶었다.
콜라도 먹고 싶고, 짜장면도 먹고 싶었다.
근데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려워하지 마시고 얘기해 주세요. 너무 데면데면하게 대하시면 제가 섭섭해요.”
“여기 음식 배달되나요? 피자랑 치킨이랑, 짜장면이 먹고 싶은데…….”
“풉! 그걸 말하는데 그리 뜸을 들이신 거예요?”
“미안해서요. 부 마스터님은 나오자마자 바삐 움직이는데 먹을 것부터 찾는 게…….”
“뭐가 미안해요. 제 것도 남겨 놓으면 되죠. 수정아!”
“왜?”
“네 낭군님 짜장면 드시고 싶으시대. 네가 주문 좀 해 줘. 애들이랑 헬퍼분들도 식사를 해야 할 테니.”
“응. 알겠어. 호텔에 얘기해서 올려 달라고 하거나 없다고 하면 주문시킬게.”
어렵게 얘기를 꺼낸 것도 무색하게 수정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편안하게 대답했다.
나와 달리 그녀들은 호텔에 여러 번 와 본 듯했다.
베이스캠프에선 사람들이 날 많이 의지했는데 밖으로 나오니 입장이 좀 바뀐 기분이다. 아니 애초에 이곳에서의 그녀들이랑 나는 살아 온 삶이 다른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