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귀환 (1)
길기만 할 줄 알았던 겨울이 지나가고 어느새 새싹이 피는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봄과 함께 땅굴 작업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하루, 이틀 내로 게이트에 당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스릴 괴 100개
아만티움 괴 100개
동충하초 포션 100개
엔트 주사 1,000개
오크 코어 20,00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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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땅굴 입구 옆 창고에 열심히 물자를 쌓기 시작했다.
이번에 밖으로 나가서 판매할 것들이었다.
“오셨어요. 성주님.”
“고생이 많으시네요.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나요?”
“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여기 있는 것들을 팔고 기존에 각 길드에서 관리했던 자금까지 합치면 천억 원 가까이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마어마하네요.”
“다 미스릴과 아만티움 덕분이죠. 미스릴 괴 하나에 1kg이니 개당 2억씩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작업 지휘를 하던 지윤미가 날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건 이번에 선발대로 나갈 인원 명단이에요.”
지윤미가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태백산맥 길드 이부성 외 99명
발키리 길드 박민정 외 49명
흑기사 부대 조성태 외 24명
마녀 부대 25명. 최은빈 외 24명.
“이부성외 99명?”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선발대 명단을 쳐다봤다.
“지금처럼 개인으로 있으면 관리하기가 힘들어서 용병들 모두 태백산맥 길드에 가입하기로 했어요.”
“아…….”
그렇게 애를 쓰더니 결국 장지원의 뜻대로 됐나 보다.
“마스터님이랑 지원이 형은 남기로 했나 보네요.”
“네. 밖으로 나가면 아이템도 판매해야 하고 헬퍼들도 섭외해야 하는데 그런 쪽은 민정이랑 수정이가 저보다 훨씬 낫거든요. 그래서 태백산맥도 이부성 씨가 나가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쪽도 길드의 실질적인 운영은 동생분이 다하고 계시잖아요.”
“네. 그렇긴 하죠.”
끄덕끄덕.
지윤미의 말에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밖으로 나가면 할 일이 많았다.
들고 간 아이템을 판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곳을 발전시킬 인원을 섭외하고 자제도 사야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무사함을 알리고 돈을 건네줘야 했다.
그리고 하늘 공원에 안치된 사람들의 가족에게도 안타까운 소식과 함께 위로금을 전달해야 했고.
게다가,
맥주, 소주, 콜라, 커피, 피자, 양념치킨, 샴푸, 로션, 치약…….
선발대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이 부탁한 물품마저도 구매해야 했다.
‘빨리 배부터 만들어야지. 또 죽어나겠군.’
밖으로 나가는 건 좋은데 또 저 많은 짐을 메고선 게이트로 오갈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허리가 아파 왔다.
그리고 그 순간,
슈우웅 펑!
슈우웅 펑!
게이트가 있는 하늘 방향에서 파란색 폭죽이 터져 올랐다.
땅굴이 게이트 인근까지 연결이 됐다는 신호였다.
“드디어 완성됐나 보네요.”
“축하드려요. 성주님.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푹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시면 될 것 같네요.”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스카이 캐슬 곳곳에서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이른 아침부터 땅굴 입구에 수백 명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선발대로 지구에 갈 인원들의 무사 귀환을 빌며 인사도 하고 개인적으로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수정이 언니, 포텐 브로마이드랑 테이프 꼭 사 오셔야 해요.”
“응. 알았어. 걱정하지 마.”
“약속했어요. 진짜 꼭 사 오셔야 해요.”
“응. 언니만 믿어.”
수정이가 윤다영을 보며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파이팅 자세를 취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포텐이 내가 아는 그 포텐 말하는 거야?”
“성주님은 참. 이럴 땐 좀 모른 체해 주세요.”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윤다영의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보이 그룹 포텐.
9개월 만에 지구로 귀환을 하는데 연예인의 사진을 사다 달라고 하는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부끄러워할 거 없어. 다른 사람들도 다 너랑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거든.”
“그래요?”
“어. 넌 양호한 편이야.”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부성을 쳐다봤다.
그곳엔 선발대에 포함되지 못한. 장지원을 필두로 한 태백산맥 길드원이 몰려 있었다.
“부성아, 다시 한번 얘기하는데 퀸즈 브로마이드 100장이랑 맥썸 꼭 사 와라.”
“알았다니까요.”
“새끼야. 그렇게 건성건성 대답하지 말고 사명감을 가지고 똑똑히 보란 말이야. 넌 이것 중에 하나라도 안 사 오면 무사히 돌아와도 내 손에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장지원이 눈을 부라리며 이부성을 노려봤다.
걸 그룹 사진과 남성 잡지 구매.
짐작건대 부탁 아니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어디 하나 부러뜨릴 기세였다.
“연예인 섭외해서 축제라도 열어줘야 하나?”
“뭐라고? 연예인을 섭외한다고?”
덥석.
장지원이 야차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내 멱살을 잡았다.
“그 약속 꼭 지켜라. 그럼 그동안 네가 나한테 실수한 것들 다 용서해 줄 테니까.”
“제가 형님한테 실수한 게 있었나요? 그리고 전 약속한 게 아니고 혼자 한 말인데…….”
“그럼 약속해줘. 유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걸 그룹 좀 불러서 축제 한번 하자.”
장지원이 세상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날 그윽하게 쳐다봤다.
오크들에게 포위됐을 때도 이리 절실한 표정을 짓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진짜 많이 외로운가 보다.
“알았어요. 약속까지는 아니고 노력은 해 볼게요.”
“정말이냐? 정말이지? 걸 그룹 데리고 오는 거지!”
“노력해 본다고요.”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지금까지 넌 노력해서 못 해낸 것이 없잖아. 모두가 포기했을 때 넌 포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우린 이렇게 살아남았고 결국 지구로 돌아갈 수 있게 됐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그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아 줘. 그럼 넌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을 거야.”
“……네.”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왠지 그러지 않으면 절대 날 놔주지 않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성주님.”
“감사합니다. 성주님.”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태백산맥과 발키리 길드원들이 내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해 왔다.
지금까지 받았던 그 어떤 인사보다 감사함과 존경심 그리고 열망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난 사람들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축제.
갑작스레 떠올린 것이지만 사람들이 이리 좋아하는데, 어려움이 있더라도 추진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공연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같이 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지난 9개월 동안 죽어라 싸우고 일만 했던 이들에게 꽤 큰 활력소가 될 듯했다.
“성주님, 준비 끝마쳤어요. 이제 출발하시면 될 것 같아요.”
“네, 알겠어요.”
“이건 행군 일정이에요.”
박민정이 내게 종이 하나를 보여주었다.
1구역 20km 4시간.
2구역 15km 3시간.
3구역 10km 2시간.
4구역 15km 3시간.
5구역 20km 4시간.
6구역 10km 2시간.
18시간.
지상으로 왔을 땐 잠자는 시간 여덟 시간을 제외하고 내리 이틀(36시간)을 걸어야 했는데 오히려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일단 오늘은 3구역까지 걸어간 후에 위로 올라가서 야영하는 걸로 짜 놨어요.”
“안전한 곳이겠죠?”
“네. 오크 지대를 피해 각 구역의 경계선마다 언제든 야영을 할 수 있게 시설을 준비해 놨어요.”
“고생 많으셨네요. 출발하죠.”
“출발!”
부우우우우웅.
부우우우우웅.
“성주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성주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선발대 이백 명.
커다란 뿔 나팔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 땅굴 안으로 들어갔다.
* * *
‘카프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이틀간의 땅굴 행군은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순조로웠다.
거친 산악 지형을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편했고, 카프리가 라이트 마법진과 같은 여러 가지 마법진들을 새겨 넣어줘서 숨쉬기도 편했고 땅굴 안은 항상 빛으로 가득했었다.
“성주님, 저기 게이트예요.”
“네. 저도 보이네요.”
해 질 녘 노을처럼 붉은빛을 뿜어대는 문.
6구역에서 나와 30분 정도 걷자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게이트 앞에 당도했다.
‘드디어 귀환인가?’
두근두근.
게이트 앞에 당도하자 절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난 짐꾼으로서 일행들에게조차 존재가 희미했지만, 지금은 인솔자로서 또 지휘관이 되어 맨 앞 선두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때,
“성주님.”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가 선두에 서도 될까요?”
박민정이 다가와 내게 조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네 왔다.
“이곳에 들어올 때 재난 관리 본부랑 트러블도 있었고 혹시나 몬스터 웨이브가 해결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서요.”
“네, 알겠어요.”
난 박민정과 발키리 길드원들에게 선두 자리를 내주었다.
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느꼈고 밖에 나가게 되면 나보다는 발키리 길드의 부 마스터인 박민정이 일행의 대표가 되는 게 나을 듯싶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민정이 내게 살짝 목례를 하고 게이트로 걸어갔고 나도 그 뒤를 조심히 뒤따라갔다.
* * *
“모두 제자리에서 멈추세요.”
“발키리 부 마스터 박민정이에요. 그쪽부터 무기를 치울 생각은 없나요?”
서울 용산.
게이트를 지나 다시 지구로 돌아왔는데 백여 명이 넘는 헌터들이 우릴 반겨줬다.
들고 있는 지팡이에 마나를 활성화해 우리에게 들이밀면서.
‘서울에 몬스터 웨이브라도 생긴 건가? 웬 헌터들이 이렇게 많지?’
난 제자리에 멈춰서 가만히 그들을 지켜봤다.
뒤편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아하니 상부에 보고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들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는 사람들인가요?”
“플로라라고 부산에 있는 게이트를 관리하는 길드예요.”
로브.
아래위가 붙어 하나로 된 길고 헐렁한 겉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걸어왔다.
그들의 왼쪽 가슴에는 길드를 상징하는 꽃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정말 발키리 부 마스터님이 맞네요. 저 기억하세요?”
“이슬비 헌터? 오랜만이네요. 왜 플로라가 여기 있는 거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 이야기는 차차 하는 걸로 잠시 신분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협조 좀 부탁드릴게요.”
이슬비.
이쪽 세계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나마저도 알고 있는 존재였다.
A급 헌터.
그녀는 대한민국에 몇 명 되지 않은 고위급 헌터이자, 최은빈, 지윤미 마스터와 더불어 국민의 사랑을 받는 가장 강한 여성 중의 한 명이었다.
“신분 확인을 하다니요? 제 얼굴보다 확실한 확인 방법이 있나요?”
박민정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이수빈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와! 플로라 길드 많이 컸네.”
“그러게. 플로라가 내 앞길을 막을지는 진짜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데.”
조성태와 최은빈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은빈 언니…….”
최은빈을 본 이슬비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