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마법진
“마나석이라…….”
난 고민스런 표정을 지으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석궁과 체인 메일.
카프리가 만든 무기와 갑옷.
단 두 가지만 봐도 그의 실력은 인정할 만했다.
헌데 그가 사용하는 재료들이 문제였다.
미스릴.
아만티움.
마나석까지.
다들 하나 같이 금보다 귀하게 여겨질 만큼 너무 값비싼 것들이었다.
짐작건대 세 가지 재료로 무구를 만들면 원가만 최하 1억은 넘을 듯했다.
“카프리, 지금처럼 무구를 만들면 가격이 너무 비싸요.”
“비싸?”
“화살촉도 그렇고 체인 메일도 그렇고 당장 우리 목숨이 걸린 일이라 미스릴과 아만티움을 아낌없이 썼지만, 사람들에게 팔 물건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어요.”
난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대중성.
비싸게 만들어서 더 비싸게 파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난 조금 저렴한 물건을 생산했으면 했다.
‘……돈을 이곳에서 어느 정도는 소비하게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우리에게 고용되어 올 헬퍼들에게도 팔 수 있게.
그래야 손정모가 염려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예방할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미스릴, 아만티움 안 쓴다. 성주는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믿는다. 하지만 아직 다른 인간은 못 믿는다. 좋은 무구 안 만들어 준다.”
카프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작건대 달리 계획해 놓은 것이 있나 보다.
“저건 뭐죠?”
“오크들이 착용하고 있던 무구들을 녹여 만든 철괴예요.”
카프리를 따라 대장간에 가니 한쪽에 직사각형의 철괴들이 잔뜩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철괴라면 뭐…….’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스릴과 아만티움과 달리 철이라면 비교적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기에 원가를 대폭 낮출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카프리, 이거 여기다가 놓으면 되나요?”
“벌써 구해 왔어?”
“네, 정찰대가 고생 좀 했어요.”
헬퍼들이 등짐에 하얀색 뼈를 잔뜩 메고 왔다.
“그건 무슨 뼈죠?”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배상우를 쳐다봤다.
딱 봐도 동물의 뼈는 아니었다.
사람이나 오크의 뼈처럼 보였다.
“아, 이거 해골 뼈입니다. 카프리가 필요하다고 해서 윤다영 팀장이 후방 숲속 깊은 곳까지 가서 잡아 왔습니다.”
“해골이요? 설마 언데드 몬스터의 사체인가요?”
“네. 맞습니다.”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보아하니 무구를 만드는데 저걸 사용할 모양인데 과연 팔릴까 걱정이 되었다.
“독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확실한가요?”
“오크 뼈다. 오크가 좀비 됐다가 육체가 붕괴했다. 그래서 해골이 된 거다. 구울, 스파토이 독 있다. 하지만 해골은 없다. 해골 뼈로 만들면 쓸 만한 무구 만들 수 있다.”
“흠! 그래도 찝찝해할 텐데…….”
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독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언데드 몬스터의 뼈를 사용한다는 말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생겼다.
“일단 지켜보시죠. 어차피 선택은 사람들의 몫이잖아요. 언데드 뼈를 사용했다고 밝히고 팔면 되잖아요.”
“……네.”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박민정이 하는 말처럼 찝찝하면 안 사면 될 테니까.
“성주, 심심하면 이것 좀 똑같이 그려 봐.”
카프리가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종이에는 커다란 원 안에 두 개의 별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석궁에 새겨진 것과 약간 다르지만, 형태는 비슷했다.
-……근력을 올려주는 마법진이야.
‘마법진? 이것만 그려 넣으면 버프 능력이 생기는 거야? 그래서 석궁의 위력이 그리 대단했던 건가?’
-그때와는 조금 달라. 석궁은 착용자의 마나를 필요로 했지만, 이건 헬퍼들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마나를 마나석으로 공급받는 형태인 것 같아.
운디네가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것처럼 카프리를 쳐다봤다.
껄렁껄렁한 말투로 술만 찾아 대던 카프리는 어느새 장인의 포스를 드러내며 철괴와 언데드 뼈, 오크 가죽 그리고 재료를 알 수 없는 것들을 조합해 무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스릴과 아만티움은 사용하지 않되, 마나석을 이용해 무구의 능력을 업그레이드시키려는 모양인 듯했다.
동그라미.
“삐뚤어졌다. 삐뚤어지면 작동 안 된다.”
동그라미.
“삐뚤어졌다.”
동그라미.
“성주도 멍청이랑 똑같다. 도움 안 되니 나가라.”
“끙…….”
나름 돕기 위해 애를 쓴다고 썼는데 카프리가 타박했다.
괜히 오기가 생긴다.
장지원 마스터를 좋아하고 또 존경하지만, 그와 비교를 하니 나도 모르게 왠지 빈정이 상했다.
그와 난 다르다는 걸 카프리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난 나뭇가지를 하나 주어와 컴퍼스를 만들었다.
이래 봬도 공고 출신이었다.
맨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릴 수는 없지만, 도구만 있으면 충분히 똑같이 그릴 수 있었다.
안에 있는 두 개의 별 모양 역시 자를 대신해 적당한 나무를 받침대로 이용해 그려 넣었다.
“쯧쯧. 이렇게 하는 건 멍청이도 했다. 이 모양 이대로 무구에 새겨야 한다.”
어느새 장갑 하나를 뚝딱 만들어낸 카프리가 아무런 도구 없이 문양을 새겨 넣었다.
“깊이, 넓이 다르면 안 된다.”
“한번 해 볼…….”
“실패하면 무구 버려야 한다. 아무런 도구 없이 종이에 똑같이 그려라. 그럼 그때 하게 해 준다.”
“끙…….”
카프리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장갑을 채갔다.
‘배워두면 좋을 것 같은데…….’
마법진.
배워만 두면 왠지 큰돈이 될 것 같았다.
아버지도 항상 그러지 않았는가.
돈 없고 배운 거 없는 사람들은 기술이라도 배워야 한다고.
난 의자를 당겨 앉고 자세를 바로 했다.
마음먹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나도 한다면 하는 남자였다.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난 앉은 자리에서 계속 동그라미만 그렸다.
“성주님, 식사…….”
“나중에 먹을게요. 이것 좀 하고.”
난 끼니도 거리고 동그라미 그리는 데만 열중했다.
하루, 이틀. 삼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허기를 채우고 잠을 자며 난 마법진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삼일 동안 죽어라 연습해서 제법 그럴싸하게 마법진을 그려냈다.
난 조심스럽게 다가가 카프리에게 보였다.
쿵덕쿵덕.
쿵덕쿵덕.
마치 고등학교 의무 검정고시을 봤을 때 작업을 하고 시험 결과를 기다렸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잘했다. 이번엔 이거 그려봐라.”
“이걸 그리라고요? 똑같이 그리면 무구에 직접 새겨보게 해 준다고 했잖아요?”
“이대로 새기면 작동 안 된다. 근데 노력 가상하다. 똑같은 것만 그리면 지루하다. 지루하면 집중력 흐트러진다. 그래서 다시 기회 주는 거다.”
“끙…….”
나름 똑같이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카프리가 보기엔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다.
‘이건 더 복잡한 것 같은데?’
그런데 두 번째로 준 마법진은 첫 번째보다 더 복잡했다.
-민첩을 올려주는 마법진이야. 내가 얘기했잖아. 드워프가 원래 손재주 하나는 타고났다고. 힘들면 포기해. 그럼 편안해질 거야.
‘아니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했다.
그동안 난 이미 열악한 인내심으로 한 가지 일을 진득하니 한 적이 없었다.
이제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그러면 안 되었다.
수정이와 영지민.
그동안이야 결혼을 포기했으니 네 멋대로 살아도 괜찮았지만 난 이제 책임질 사람이 있었으니까.
고작 이 정도에 포기하고 어찌 그 많은 사람을 이끌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게다가 돈도 돈이지만 재미도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리지 못해서 답답한 거지 마법진을 그리는 게 제법 적성에 맞는 듯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
두 번째 마법진을 그려내는 것은 첫 번째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잘했다. 이번엔 이거.”
“이번에도 탈락인가요?”
“지난번보다는 좋아졌다. 계속하다 보면 나아질 거다.”
힘, 민첩, 체력.
에너지 볼트.
라이트닝.
실드.
.
.
.
카프리는 내가 하나의 마법진을 그려낼 때마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그리게 했다.
보아하니 나한테 직접 무구에 마법진을 새기게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셋 중에 하나, 아니 다섯 개 중의 하나는 성공하려나?’
짐작건대 카프리가 기회를 줘도 난 제대로 할 자신이 없었다.
그의 말처럼 내가 마법진을 제대로 새기지 못하면 기껏 만든 무구가 고철 덩어리가 될 게 분명해 난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네. 알겠어요. 열심히 해 볼게요.”
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록 내게 실전의 기회는 주지 않았지만 몇 날 며칠 동안 똑같은 걸 계속 그리다 보니 지금까지 그린 마법진들은 완벽히 외우게 되었다.
게다가 마법진들을 그리며 카프리의 작업 모습을 지켜볼 수도 있었고.
짐작건대 단순히 마법진 하나만으로 아티팩트가 완성되는 건 아닌 듯했다.
카프리는 무구의 형태를 다 만들어 놓고도 마치 전자 기계 전선에 전류가 흐르는 모양 비슷하게 뒷면에 무언가 오밀조밀하게 선과 홈 같은 것들을 그리고 만들었다.
소고기 정형을 가르쳐 줬던 실장이 그랬다.
보여주는 게 가르쳐 주는 거라고.
그렇게 난 마법진을 그리며 아티팩트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이해력을 넓혀 갔다.
* * *
‘무슨 할 말이 있는 건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십여 명의 헬퍼들이 대장간 주위를 계속 어슬렁거렸다.
보아하니 쉬는 시간 갖지는 않고 내게 무슨 용무가 있는 듯한데 다가오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기색이 여력 했다.
“할 말이 있으면 그냥 와서 하면 되지. 왜들 저럴까.”
난 자리에서 일어나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헬퍼들에게 걸어갔다.
처음엔 안 그러더니 성주가 되고 나서는 헬퍼들이 스스로 그들과 나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든 듯싶다.
“식사는 하셨나요?”
“성주님…….”
내가 다가가자 헬퍼들이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같이 몸을 쭈뼛거리며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누가 보면 제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할 말 있어서 온 것 같은데 어려운 말인가요?”
“그걸 어떻게…….”
“이리 티 나게 주위를 배회하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돈 빌려달라는 말 아니면 기분 좋게 들어 줄 테니 기탄없이 얘기해 보세요.”
“돈 빌려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사실 빌려달라고 해도 전 돈이 없거든요. 그럼 보험이라도 들어 달라고 하려는 건가요?”
“보험이요?”
“네. 보통 저한테 그런 표정으로 다가오면 둘 중의 하나더라고요.”
“…….”
“…….”
헬퍼들이 살짝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너무 쭈뼛거려 긴장 좀 풀게 해 주려고 농담을 한 것인데 나름 효과있는 듯했다.
이성민.
성벽 작업에 투입된 헬퍼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은 성주님께서 드워프에게 마법진 그리는 것을 배우고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혹시 같이 배우고 싶은 건가요?”
“네. 기회를 주시면 배우고 싶습니다.”
“뒤에 있는 분들도?”
“네. 배우고 싶습니다.”
헬퍼들이 날 보며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사람들한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지금처럼 계속 성벽 쌓고, 땅굴 파는 작업만 하면 나중에 외부인이 들어와도 저흰 이것만 계속해야 하잖아요.”
“아…….”
난 이성민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왜 이들이 내게 다가오는데 망설였는지 알 것 같았다.
보아하니 다들 미치도록 마법진을 배우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다만 지금 하는 일이 워낙에 힘드니 조금이나마 편하고 있어 보이는 일을 하고 싶은 듯했다.
“그런 이유라면 당연히 허락해 드려야죠. 카프리한테 물어보고 올게요.”
“정말이십니까?”
“당연하죠. 여러분은 충분히 그럴 권한이 있어요. 그러니 다음부턴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얘기하세요. 제게 직접 말하는 게 불편하면 팀장들을 통해서 얘기해도 되고요.”
난 이성민과 헬퍼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법진을 그리고 무구를 만드는 게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편한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아니 이들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나서서 조금이나마 편하고 쉬운 일을 찾아 주고 싶었다.
같이 생사고락을 넘겨 가며 버텨 지금까지 왔는데 그 정도 혜택은 당연히 줘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에게 괜히 가게 차리는 것을 허락한 게 아니었다.
“카프리, 헬퍼들 몇 명이 같이 마법진 그리는 걸 배우고 싶다는데 함께 해도 될까요?”
“상관없다. 난 신경 안 쓴다. 어차피 며칠 못하고 다 도망간다. 멍청이 원, 투, 쓰리랑 애들도 그랬다.”
카프리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미 장지원과 태백산맥 길드원들한테 마법진 그리는 걸 시켜 본 듯했는데,
다들 줄행랑을 친 것 같았다.
“카프리가 허락한다네요. 다들 원래 소속된 현장에 얘기하시고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후다닥.
후다닥.
이성민과 헬퍼들이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 모습을 보니 조금 기대를 해봐도 될 듯했다.
태백산맥 헌터들이야 카프리가 억지로 시켜서 했겠지만, 저들은 본인이 하고 싶어 찾아온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