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중급 정령사
지원군을 부르기 위해 퇴각을 했던 박민정.
그녀는 퇴각하면서도 동료를 잃었고 지원군과 함께 올 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지윤미 마스터는 길드의 책임자로서 지금까지의 모든 아픔과 상처들을 자신의 판단과 선택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고.
“넌 괜찮아?”
“전 괜찮아요. 제가 총사령관이 됐을 때는 항상 오빠가 옆에 계셔줬잖아요.”
부비적부비적.
수정이가 얼굴을 삐죽 내밀어 내 어깨에 부비적거렸다.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녀가 나에게는 이렇게 애교를 부리니 절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언니랑 민정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전 이렇게 오빠랑 바닷가에 와서 낚시도 하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게 너무 행복해요.”
“정말?”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이렇게 오빠랑 낚시하고 있으면 던전 안에 갇힌 게 아니라 마치 휴가라도 온 것처럼 너무 편안하고 즐거워서 꿈이라 여겨질 정도예요.”
내 어깨에 얼굴을 올린 수정이가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성공한 건가?’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이 가득한 빛이 수정이를 감쌌고 그녀의 시선이 허공에 멈췄다.
짐작건대 물의 정령과 대화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마스터랑 부 마스터도 성공했나 보네.”
지윤미 바람의 정령.
박민정 바람의 정령.
저 멀리 갯바위에 앉아서 낚시하고 있던 지윤미와 박민정의 몸도 빛으로 감싸이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허나 확실한 것은 그녀들은 내 바람대로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살랑살랑.
철썩철썩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
은은한 소금기가 서려 코끝을 간질이는 시원한 바닷바람.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할 때 느껴지는 바람도 좋지만, 바닷바람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바닷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저 하늘 위를 노니는 새들처럼 몸도 마음도 자유로워지는 듯했다.
그런데 그 순간,
-결국 실프도 불렀네.
시원하고 청량한 기운이 담긴 빛이 눈앞에 나타났다.
20대 후반의 여인으로 형상화한 실프. 왠지 그 모습이 수정이와 많이 닮은 듯했다.
-으응? 3대 정령과 계약을 해 놓고도 나까지 불러냈다고?
-그러니까. 드래곤을 제외하고 4대 정령을 모두 소환한 종족은 처음이지?
운디네, 카사, 노움. 실프까지.
네 명의 정령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부터였다.
손바닥만 한 빛에 감싸있던 정령들의 크기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쿵덕쿵덕.
정령들의 크기가 커질수록 야구공만 했던 정령력도 같이 커지는 게 느껴졌다.
몸이 뜨겁다.
이대로 있으면 왠지 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 난 점점 커지는 정령력을 외부로 쏟아 냈다.
‘으음?’
백사장을 들이치고 있는 10m가 넘는 해일.
지진이라도 난 듯 진동하는 대지.
회오리바람으로 인해 숲에 있던 나무들이 우수수 쓰러졌고 불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뭐 하는 거야!
운디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여길 다 파괴라도 할 심산이야! 빨리 멈춰. 이러다 네 동료까지 다치겠어.
‘왜 나한테 그래?’
-그럼 누구한테 그래! 지금 네가 다 만든 거잖아.
운디네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가득했다.
해일과 지진, 산불. 회오리바람까지.
그녀는 지금 이 모든 것들을 만든 범인으로 나를 지목하고 있었다.
허나 난,
‘꿈인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모든 것이 몽환적으로 보였다.
내 몸인데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정령력이 늘어나서 취한 것 같아.
-얘, 완전 넋이 나갔는데? 이러다 폭주하겠는데?
-쯧쯧. 일단 재울 테니까 거부하지 마. 알았지?
끄덕끄덕.
슬립.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을 느끼며 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 *
“오빠, 괜찮으세요?”
눈앞에 수정이가 보인다.
그녀는 비라도 맞은 듯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몸 곳곳에 흙탕물이 가득했다.
“어떻게 된 거야?”
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바닷가 풍경이 말도 아니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비, 바람을 동반한 폭풍이 몰아쳐서 사람들을 불러 보수하는 중이에요.”
“폭풍? 사람들은 다들 무사한 거야?”
“네.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혼절한 거 말고는 다들 멀쩡해요. 아무리 둘러봐도 상처는 없는데 괜찮은 거죠?”
수정이가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내 몸을 훑어봤다.
“응.”
“휴우. 정말 다행이네요. 그럼 조금만 더 쉬고 계세요. 전 가서 일 좀 돕고 올게요. 폭풍 때문에 건조작업을 하던 현장이 엉망이 되어 버렸나 봐요.”
“……알았어.”
난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누구한테 그래! 지금 네가 다 만든 거잖아.’
기억을 잃기 전 운디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꿈인 줄 알았는데 정말 내가 이렇게 만든 모양이다.
-너무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니.
‘잘했다고?’
-응. 잘했어. 네가 힘을 외부로 쏟아내지 않았으면 우리도 컨트롤하기 힘들었을 거야.
운디네가 날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손바닥만 했던 그녀는 어느새 나와 비슷한 크기로 성장해 빛을 뿜어 대고 있었다.
-우리도 얘기만 들었지. 성장을 한 건 처음이거든.
‘……나 강해진 건가?’
-응. 아주 많이. 지금 힘을 갈무리하고 있으니 딴생각 말고 일단 좀 쉬고 있어.
‘……그래.’
운디네도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은지 형상화를 풀며 사라졌다.
* * *
“깨어났다는 얘기 듣고 왔어요. 성주님, 혹시 알고 계셨던 건가요?”
지윤미, 박민정, 그리고 십여 명의 헌터들이 날 찾아왔다.
시원하고 청량한.
그녀들에게서 익숙한 향기와 기운이 진하게 느껴졌다.
보아하니 다들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한 듯했다.
“정령사가 된 걸 축하드려요.”
난 사람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역시 성주님은 다 느끼고 있었나 보네요. 애들아, 소환해.”
“네, 마스터.”
어린 남자아이.
젊은 청년.
중년의 부인.
.
.
.
헌터들의 곁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주위에 제각기 모습을 달리한 바람의 정령이 보였다.
“시간 좀 걸릴 줄 알았는데 다들 빨리 계약하셨네요.”
“감사합니다. 모두 성주님 덕분이에요.”
정령과 계약을 한 헌터들이 빙그레 웃으며 내게 감사 인사를 해 왔다.
“정령들과는 많이 친해졌나요?”
“네.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덕분에 몸도 가벼워지고 헌터님처럼 정령 마법도 사용할 수 있게 됐어요. 헌터 협회에 가서 측정을 해봐야 알겠지만, 등급도 한 단계 올라간 것 같고요.”
“보여줄 수 있나요?”
“네, 안 그래도 그러려고 급히 이렇게 자리를 만든 거예요. 아무래도 성주님께서 먼저 계약하셨으니 저희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계실 것 같아서.”
지윤미 마스터가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내,
윈드 워커
트리플 샷.
윈드 블레이드.
.
.
.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한 헌터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능력을 뽐냈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같이 높이 떠오른 것도 모자라 그 상태에서 세 발의 화살을 장전해 원하는 표적에 명중시키고 이내 바람의 칼날로 나무를 잘라냈다.
짝짝짝.
“와아! 정말 멋있네요.”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박수가 쳐졌다.
듀얼 클래스.
이미 각성한 상태에서 정령과 계약을 해서 그런지 내가 처음 운디네를 만났을 때와 달리 빨리 능력에 적응한 듯했다.
“다른 길드원들도 전부 다 곁에 정령이 맴돌고 있으니 속성에 맞는 현장에 배치해 주세요.”
“안 그래도 정령과 계약을 하니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더라고요. 근데 막상 정령과 계약을 했는데도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조언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마스터님은 배치만 해 주세요. 남은 길드원들이 정령과 교감하는 방법은 제가 더 찾아볼 테니까.”
“네, 알겠어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건조 작업 현장으로 걸어갔다.
발키리 길드원들의 정령 계약도 중요하긴 하지만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을 듯했다.
서두른다고 더 빨리 되는 것도 아니었고.
‘다들 상심이 크겠네.’
지금 난 그녀들보다 배를 만들고 있던 헬퍼들이 더 마음이 쓰였다.
“빌어먹을 한 달 내내 죽어라 만들어 놨더니 한방에 개 박살이 났네.”
“……말은 안 하셨어도 성주님이 기대하고 계셨을 텐데 죄송해서 얼굴을 어떻게 보죠?”
“그러게, 말이다. 나도 솔직히 그게 제일 무섭다. 건조 작업이야 다시 시작하면 되지만 성주님이 실망한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메어 오네. 제길.”
건조 현장에 도착하니 수십여 명의 헬퍼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들은 범인이 나인지도 모른 채 이 와중에 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기껏 고생고생해서 배를 만들다 박살이 났으면 짜증부터 내야지. 왜 제 걱정부터 하고 있나요?”
“성주님…….”
“성주님…….”
내가 다가가자 헬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유거성 팀장과 함께 던전을 빠져나가겠다고 할 만큼 강단도 있고 성격도 있는 양반들이었는데 지금은 완전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저희 잘못입니다. 폭풍이 올 것까지 생각해야 했는데…….”
“여러분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이 척박한 환경에서 배를 만드는 것도 힘든데 어찌 그런 것까지 신경 쓰면서 일을 하겠어요.”
“성주님…….”
“성주님…….”
글썽글썽.
헬퍼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맴돌았다.
다들 한 달 사이에 십 년은 늙어 보였다.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힘든 노동을 하다 보니 다들 검게 그을려 있었고 나무껍질처럼 피부가 푸석해져 있었다.
몸 여기저기에 서너 개의 상처는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고.
근데 나로 인해 그동안 고생했던 산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오늘은 작업 중단하고 술이나 한잔하시죠.”
“술이요?”
“네. 술이 땡기는 날이네요. 요리 팀에 가서 막걸리랑 술 좀 가져다주세요.”
난 헬퍼들에게 다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맨정신으로 자수를 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제가 그랬어요.’
도저히 미안해서 이 여섯 마디가 목구멍까지 왔었는데도 내뱉어지지 않았다.
* * *
“성주님, 제가 듣기론 땅굴 작업이 제법 순조롭게 되어가는 걸로 아는데 이참에 그냥 배 건조 작업은 중단하는 게 어떨까요?”
술이 들어가서일까?
건조 작업을 지휘하는 헬퍼가 건조 작업에 대해 회의적인 말을 내뱉었다.
“정광 씨 맞죠?”
“제 이름을 알고 계시네요.”
“네. 아직 지원군까지 다 외우지 못했지만, 기존에 있던 분들의 이름은 당연히 알아야죠.”
“감사합니다. 제 이름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일전에 발키리 길드 헌터들도 그러더니 최정광도 내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많이 힘드신가요?”
“힘들다기보다는 땅굴만 있어도 충분히 귀환을 할 수 있는데 굳이 배까지 만들 필요가 있나 해서요.”
“네. 그렇긴 하죠. 근데 세상 사는 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지금이야 순조롭게 진행 되는 것 같아도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요. 게다가 전 단순히 귀환을 목적으로 배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럼?”
“이곳을 발전시켜야죠. 지구처럼 여기도 항구를 만들어서 제대로 문명의 혜택을 받게 해야죠.”
“문명의 혜택이요?”
“네. 다른 건 몰라도 수도랑 화장실은 제대로 만들어야죠. 진짜 아침에 씻고 볼일 볼 때마다 불편해서 환장하겠더라고요.”
“하하. 그건 저도 그렇긴 하네요.”
“그리고 전기도 들여와서 컴퓨터로 게임도 좀 하고 핸드폰도 터지게 만들고 싶어요.”
“아…….”
“제가 원하는 곳으로 발전시키려면 땅굴로는 힘들어요. 오크랑 언데드 몬스터도 문제지만 그러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 것 같거든요.”
홀짝홀짝.
나 역시 술이 들어가서일까.
난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것들을 최정광한테 다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