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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영주님-68화 (68/255)

68화. 실프 (1)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건가?’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부성과 나현지를 쳐다봤다.

“오빠, 나 저거 먹고 싶어.”

“이거?”

“응.”

이곳에 처음 와서 나현지에 대한 연정으로 속앓이를 하던 이부성이 그녀와 함께 다정하게 식사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얼굴에 미소가 돋게 했다.

“두 번째 커플의 탄생인가?”

“아니에요. 한 열 커플쯤 될 거예요.”

“열 커플이나 된다고?”

“네. 다들 알게 모르게 꽁냥꽁냥 하는 것 같더라고요.”

수정이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전쟁 통에서도 사랑은 꽃핀다고, 아니 힘든 환경으로 인해 연인들이 꽤 많이 생긴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싸가지 없는 새끼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닌데. 쯧쯧.”

옆에서 식사하던 장지원이 별안간 역정을 내었다.

“저희가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너희가 뭘 어쨌다는 게 아니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문제 아니냐! 늙은 형님은 이 긴긴 겨울밤을 매일 독수공방하는데 불쌍하지도 않냐?”

“그걸 왜 저희한테 그러세요. 형님도 괜찮은 여자 찾으시면 되잖아요.”

“찾기야 진작 찾았지. 근데 그 사람이 날 쳐다보지도 않아서 문제지.”

“헐…….”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장지원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놀랍게도 지윤미 마스터가 자리해 있었다.

“형님, 설마 아니죠?”

“왜 인마? 난 지윤미 마스터 좋아하면 안 되냐?”

“……양심 없습니까?”

“너는 양심이 있어서 수정이랑 그러고 있냐?”

“……형님이랑 지윤미 마스터는 두 세대를 건너뛰잖아요.”

“됐다. 말을 말자. 내가 너희들이랑 무슨 말을 하겠냐. 형이야 혼자 늙어가든지 말든지 자기들만 행복하면 그만인 놈들인데.”

장지원 마스터가 마음이 상했는지 세상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허나,

장지원 44살.

지윤미 29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어지간해야 비벼보기라도 하지.’

둘은 나이 차가 나도 너무 많이 났다.

‘우리 형님 이번 생에는 결혼하기 힘들 것 같네.’

난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여기에 있어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들을 듯싶었다.

사람이 사람한테 끌리는 거야 인력으로 어쩔 수 없다 치지만 너무 어렵고 힘든 길을 택한 듯했다.

그리고 때마침,

“성주님, 식사 끝나고 지휘부 회의 있어요.”

“네, 알겠어요.”

지윤미 마스터의 부관이 곤란한 자리에서 해방해 줬다.

* * *

“오크성 후방과 암염 광산 밑을 계속 정찰하고 있지만, 소규모 언데드 몬스터만 간혹 발견될 뿐 대규모로 오고 있는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다행이네요. 아직은 우리와 꽤 거리가 있는 모양이네요.”

“네.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요. 더 깊숙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엔트 주사로 인해 정찰대만으로 언데드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어요. 그리고 오크들도 소규모로 정찰을 보낼 뿐 저희 영역으론 잘 들어오지 않고 있어요.”

“이놈들이 잔뜩 겁을 먹었나 보네요.”

지휘부 회의를 할 때마다 항상 한숨과 걱정이 가득했는데 오늘은 좋은 소식만 연이어 들려왔다.

“……이대로 방해 없이 땅굴을 파면 3개월 후엔 게이트에 당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나 빨리요?”

“처음에 많이 헤매긴 했는데 다행히 헬퍼들 중에 비슷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많아 지금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게다가 카프리가 아만티움으로 삽과 곡괭이까지 만들어 줘서 사고만 없으면 그 전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대단하네요. 지시를 내려놓고도 꽤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해낼지는 몰랐네요.”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지윤미가 땅굴을 파자고 했을 때만 해도 과연 가능할지 반신반의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해내 주고 있었다.

“그럼 이제 땅굴이 완성됐을 때를 고민해야겠네요. 이곳을 지키고 개발하려면 지금 보다 더 많은 사람과 자원이 필요할 테니까.”

“네, 맞아요. 오크들과 언데드 몬스터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지금보다 인원이 열 배는 늘어나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성벽도 지금 보다 너 높고 넓게 짓고 편의 시설과 방어 시설을 구축할 수 있을 테니.”

“열 배면 만 명이니 두당 월 오백만 원씩만 줘도 오백억 원이네요.”

“네, 돈도 돈이지만 그 많은 인원을 섭외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거예요. 게다가 지금 책정한 숫자는 전투 인원을 제외하고 말씀드린 거예요. 헌터까지 섭외하려면 월 일천억 원은 필요할 것 같아요.”

“끙…….”

일천억 원이라는 말에 절로 신음 소리가 나왔다.

서른여덟 살을 먹는 동안 백억은커녕 일억조차 가져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일천억 원이라는 말에 괜히 등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물고기.

나무.

미스릴.

아만티움.

마나석.

동충하초.

엔트 줄기.

.

.

.

지금도 땅굴만 완성되면 큰돈을 벌어다 줄 만한 것들이 넘쳐 나지만 함부로 판매했다간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일전에 지윤미 마스터가 했던 말처럼 이곳에 미스릴 광산이 있다는 거 하나만 알려져도 분명 욕심을 내는 무리가 생길 것이 분명하기에.

“방법은 두 가지에요. 재난 관리 본부나 헌터 협회에 알려서 도움을 요청하고 권리를 나눠 가지거나, 아니면 최악의 상황을 가장하고 외부와도 싸울 준비를 해 놓아야 해요.”

“흠…… 어렵네요. 여러분의 의견이 어떤지 먼저 듣고 싶네요.”

난 고민 어린 표정을 지으며 지윤미 마스터를 쳐다봤다.

“전 솔직히 목숨 바쳐 지키고 개발한 이곳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지 않아요.”

자신의 신념대로 대답한 지윤미 마스터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장지원 마스터를 쳐다봤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 쒀서 개 주는 것도 아니고 기껏 고생이랑 고생은 다 해 놓고 엄한 놈들이랑 나누고 싶지는 않네요.”

장지원은 애초에 첫 번째 선택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이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조성태에게로 향했다.

“저희에게도 선택권이 있다면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이곳을 도발해 온다면 선봉에 서서 반드시 섬멸하겠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고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인 것 같네요.”

전원 통일.

마스터들은 긴 고민 없이 의견을 하나로 모았다.

“부 마스터님, 팀장들을 불러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유거성, 김성준, 배상우, 최유라.

“……도움을 받고 권리를 나눠 준다 해도 우린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보다 더 훨씬 아늑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솔직하게 생각을 얘기해 주세요.”

난 헬퍼들을 이끄는 팀장들을 불렀고 그들에게도 현재 상황을 얘기하고 의견을 물었다.

10억.

지금까지 확보한 자원만으로도 두당 십억 원은 돌아갈 것이다.

그 돈이면 인천 외진 동네에 가서 3층짜리 건물을 사서 임대로 주고 아껴 쓰면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솔직히 난 내심 그러고 싶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계속 이러고 사는 것보다 수정이랑 같이 아버지를 모시고 오순도순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막상 살길이 열린다고 하니 그동안 계획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희미해졌다.

그런데,

“저흰 성주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습니다. 성주님이 나눠 주자고 하면 나눌 것이고 싸우자고 하면 싸울 겁니다.”

팀장들이 선택을 모두 내게 넘겨 버렸다.

게다가,

“정답이 따로 있었네요. 저, 아니 저희 발키리 길드 역시 마찬가지예요. 의견을 물어보셔서 대답하긴 했지만, 회의에 들어오기 전에 길드원들과 상의를 했는데 다들 성주님이 하자는 대로 했으면 하더라고요.”

“발키리도 그랬습니까? 하하. 저희 애들도 그러더군요. 다들 성주님이랑 함께 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답니다. 심지어 어떤 놈은 혹시 성주님이 귀향한다고 하면 옆집으로 이사 가서 죽을 때까지 이웃사촌으로 산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마스터들 역시 모두 내게 선택을 일임했다.

‘과연 내가 평범하게 살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도 같다고 했던가.

막상 사람들이 이렇게 나오니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다가 평온한 일상으로 바뀌면 삶이 너무 지루할 것 같기도 했다.

“조성태 대장님. 하나만 물을게요. 제가 듣기론 아레스 길드가 상당히 호전적인 곳으로 알고 있어요. 만약 거기서 이곳을 넘보면 어떻게 할 건가요?”

“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면 제가 먼저 쳐들어가서 아레스 길드 마스터의 수급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하늘 공원을 만들면서 전 남은 인생을 희생당한 동료들과 가족들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그 어떤 상황이 생겨도 성주님의 검이 되겠다고 한 말은 끝까지 지킬 겁니다.”

조성태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날 빤히 쳐다봤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진짜 내가 지시하면 마스터로 모셨던 사람의 수급까지 베어 올 기세였다.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네요.”

“네?”

“저 역시 이곳을 다른 사람과 나눠 갖고 싶지는 않거든요.”

“역시 성주님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아씨. 괜히 가슴 졸였네.”

잔뜩 긴장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마스터들과 팀장들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괜한 고민한 듯했다.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이곳에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질 생각은 없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늑하고 편안한 삶을 원하지만 그렇다고 권리를 나눠 주면 왠지 많이 배가 아프고 약이 오를 듯했다.

그런데 그때,

‘뭐지? 이 기운은?’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

지윤미 마스터 주위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있었는데, 이제야 느낀 거야?

‘저게 뭔데? 설마 정령이야?’

-실프. 바람의 정령이야.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덕분에 자연 친화력이 꽤 올라간 모양이네.

‘그럼 지윤미 마스터도 정령사가…….’

-아직 계약한 것 같지는 않아. 친화력이 올라간 덕분에 실프가 호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운디네가 지윤미 마스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저대로 있다가 떠나갈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렇지. 대부분 저 단계에서 많이 떠나가. 친화력이 올라갔다고 해도 너처럼 바다를 좋아하고 땅과 불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드물거든.

‘……도와줘도 돼?’

-도와줘도 되긴 하는데 억지로 세뇌를 시키는 건 의미가 없어. 그건 진심이 아니니까. 스스로 감사해하고 좋아해야 해.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난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낌 아니까.’

운디네, 카사, 노움까지.

이미 세 명의 정령과 친구가 된 난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줘야 할지 대략적으로나마 감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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