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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영주님-66화 (66/255)

66화. 세계수의 축복

“……아름답다.”

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암염 동굴을 지나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눈이 정화될 만큼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즐비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은지 수정이와 박민정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있는 나무 몇 개만 가져가서 팔아도 수십억 원은 받을 것 같지 않아?”

“넌 저리 아름다운 나무를 보고도 그런 생각부터 들어?”

“그럼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데?”

“됐다. 말을 말자. 네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니.”

주위 풍경을 감상하고 있던 박민정이 수정이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다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옮겼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서로 생각하는 게 많이 다른 듯했다.

‘관상목이 비싸다고 하긴 하던데…….’

나도 들은 기억이 있긴 했다.

가까운 산에만 올라가도 쉽게 볼 수 있는 나무들이 작게는 오천만 원, 많게는 억 단위로 거래가 되고 있다고.

심지어 관상용 침엽수가 큰돈이 된다는 말에 몰래 뽑아서 파는 사람마저 있다고 한다.

수정이도 어디서 그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오빠, 제가 뭘 잘못한 거예요?”

“아니야. 나도 수정이랑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어. 여기 있는 나무들과 꽃을 가져가서 정원을 꾸미면 참 예쁠 것 같아.”

난 애써 에둘러 말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도 돈보다는 이 아름다운 자체를 먼저 만끽하고 있긴 했지만 수정이의 눈빛을 보아하니 솔직히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빠, 전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전 이 나무들을 팔아서 돈을…….”

“알아, 나도. 근데 난 네가 돈보다 이 풍경을 더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우리한테 돈을 벌어다 줄 것들은 지금도 많잖아.”

“치! 알았어요. 저만 또 쓰레기였네요.”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요.”

나와 나란히 걷고 있던 수정이가 입이 댓 발 나와 발걸음을 재촉했다.

박민정과 나로 인해 왠지 자신만 속물이 된 기분이 들어서 삐진 모양이었다.

“뭘 잘했다고 자기가 삐진담. 성주님이 말한 것 중에 잘못된 게 하나도 없는데. 제가 가서 혼찌검을…….”

“그냥 두세요. 수정이도 잘못 한 건 없잖아요.”

난 부랴부랴 박민정의 팔목을 잡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대로 두면 수정이랑 괜히 푸닥거리라도 할 것 같았다.

“……우리 수정이도 지나온 삶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던 모양이네요.”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난 그녀를 단 한 번도 속물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

그저 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도 즐기지 못하는 그녀가 가여울 뿐이었다.

만약 예전의 나였다면 나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을 테니까.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아름다움 따위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이곳에 와서 이래저래 돈 될 만한 것들을 확보해 여유가 생겨서 그나마 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챙겨야 할 동생들이 많기는 하죠. 그래서 저도 일부러 더 이러는 거예요. 자기 삶도 없이 매번 저렇게 동생들 때문에 돈 생각부터 하는 친구가 가여워서.”

“동생들이요?”

“모르셨어요. 수정이…….”

박민정이 말을 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저 멀리 앞서 나가서 걷고 있는 수정이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수정이한테 아무 말도 못 들으신 거예요?”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기엔 시간도 짧고 그동안 너무 바빴잖아요.”

“하긴. 그렇긴 하죠. 근데 수정이도 말하지 않았는데 제가 계속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네, 알겠어요. 나중에 시간 나면 수정이한테 직접 물어볼게요.”

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굳이 더 듣지 않아도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아이를 많이 낳았거나, 아니면 보육원에서 자란 듯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후자에 가까울 듯했다.

그녀의 레이드 경력을 봤을 때 이십 대 초, 중반부터 게이트를 넘나들었다는 것인데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그리 위험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친해지고 나면 전부 다 한, 두 가지씩 사연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근데 부 마스터님, 전 지금 왠지 마나 회복이 평소보다 빠른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요?”

“성주님도 그러세요? 저도 사실 그런 느낌을 받긴 했는데 긴가민가했거든요.”

박민정과 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피톤치드.

폐부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꽃과 나무의 향기를 맡을 때마다 마치 누워서 쉬고 있는 것처럼 체력과 마나가 평소보다 빨리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세계수 근처에 다다라서 그런 거야. 일전에 얘기해 줬잖아. 세계수의 또 다른 이름이 생명의 나무라고.

‘아…….’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형상화해서 나타난 노움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때,

“성주님. 잠시 멈추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저 멀리 앞서가고 있던 지윤미 마스터가 주먹을 말아 쥐며 얼굴 옆으로 들었고 모두 발걸음을 멈췄다.

짐작건대 앞에서 무언가 발견이 된 모양이다.

난 박민정 부 마스터와 함께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갔다.

“……오크 좀비들이에요.”

“마스터, 이쪽에 구울이랑 가스트 사체도 있어요.”

좀비, 해골, 구울, 스파토이, 가스트…….

우리가 가려 하는 길에 수십 구의 언데드 몬스터의 사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썬더 브레이크 흔적이야.”

“……!”

“A급 이상의 마법사만 부릴 수 있는 7단계 마법이에요. 일전에 중국에 지원을 갔을 때 이와 같은 흔적을 본 적이 있어요.”

부들부들.

몬스터의 사체를 살피던 지윤미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해 보였다.

그런데 그때,

콰콰콰쾅! 콰콰콰쾅!

콰콰콰쾅! 콰콰콰쾅!

안쪽 숲에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처럼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빛을 뿜어내며 숲이 진동했다.

“민정아,”

“네, 확인해 볼게요.”

지윤미와 눈을 마주친 박민정과 그의 팀원들이 번개가 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조금은 여유로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손에서 절로 식은땀이 흐를 만큼.

그런데 그때,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페어리들이야.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노움이 날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페어리?’

-숲의 정령들이야.

‘정령? 그럼 같은 편인가?’

-흠…… 인간들은 다 같은 편인가?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아니라는 거야?’

-같은 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도 아니야. 평소에는 서로 아예 신경을 안 쓰거든. 근데 지금은 왠지 너희를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 같아.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응. 세계수가 너흴 만나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가자.

‘……그래.’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불안하긴 했지만 노움이 뭔가 교감을 나누는 듯했다.

‘저놈들인가?’

숲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하얀색 빛을 뿜어대는 존재들이 하늘을 노닐고 있었다.

하나, 둘…… 열.

얼핏 봐도 십 단위 이상으로 그 개체 수가 많아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콰콰콰쾅! 콰콰콰쾅!

콰콰콰쾅! 콰콰콰쾅!

하늘에서 다시 날벼락을 쳤다.

“순리를...거스르는....자. 이곳에...들어...올....수 없다.”

번개가 당도한 자리를 확인하니 이번에도 오크 좀비의 사체가 보였다.

“성주님, 위험해요. 저희가 앞장설게요.”

“성주님 피가…….”

“그냥 긁힌 거예요.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일행의 선두에 서자 사람들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난 걱정스레 날 쳐다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계속 안쪽으로 걸어갔다.

전격계 정령. 페어리.

노움이 장담한 대로 그들은 내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다.

휘리릭!

휘리릭!

빠지직!

빠지직!

‘저게 엔트인가?’

-어, 맞아.

숲의 정령들은 오직 언데드 몬스터만 공격을 했다.

노움의 말처럼 정말 우리를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장애물을 사전에 제거해 주고 있는 듯했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마치 63빌딩처럼 아니 그보다 더 크고 높은 나무가 보였다.

‘따듯해.’

아침 햇살처럼 따뜻하고 밝은 빛이 내 몸을 감쌌고 생채기가 났던 몸이 치유되며 소진됐던 체력과 마나가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렸을 적, 배가 아팠을 때 내 배를 문질러 주시던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착각을 일으켰다.

앞에 있는 나무가 노움이 말한 세계수인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야…… 이 숲을…… 지켜다오.

머릿속으로 누군가 말을 건네 왔고 눈앞에 어떠한 영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십만 마리의 좀비들이 닥치는 대로 숲을 파괴하며 이곳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들이 지나친 길에는 동물들은커녕 풀 한 포기조차 살아남지 못했다.

좀비들에 의해 피로 물드는 대지.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끔찍했다.

정령들이 하는 것처럼 세계수도 내게 교감하며 정보를 공유해 주고 있는 듯했다.

‘……엔트의 줄기가 필요해요.’

난 세계수가 그런 것처럼 현재 우리의 상황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부탁…… 도와줄 수…… 이것 밖에…….

두우웅.

두우웅.

하늘에서 하얀색 빛기둥이 내려와 나와 동료들을 감쌌다.

-세계수가 축복을 내려줬어. 엔트의 줄기를 채취해도 공격하지 않을 거야. 하긴 언데드 몬스터가 저리 몰려오면 아무리 페어리들이 많아도 이곳을 지키기는 힘들 테니까.

노움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이전과 달리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충만한 생명력 아니 정령력이 느껴졌다.

‘도와 드리죠. 어차피 우리도 이곳을 지켜야 하니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

난 세계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스릴, 아만티움, 마나석 광산 암염 동굴…….

어차피 그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우린 이곳을 지켜야 했기에.

“지윤미 마스터님, 세계수가…….”

“저희도 세계수의 음성을 들었어요.”

지윤미 마스터가 반쯤 넋이 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다.

일행들 모두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모양이었다.

다들 나처럼 세계수에 뭔가 특별한 기운을 받았는지 몸 내부를 관조하고 있는 듯싶었다.

“고민은 나중에 하시고 일단 엔트의 줄기부터 채취해서 돌아가죠. 현지랑 사람들부터 되돌리는 게 먼저니까.”

“네, 알겠어요. 모두 성주님 말씀 들었지. 줄기부터 채취하자.”

“네. 마스터.”

“네. 마스터.”

넋을 놓고 있던 것도 잠시 지윤미 마스터의 명령을 들은 헌터들이 엔트를 찾아 줄기를 채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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