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카프리
노가다. 아니 막일꾼.
만약 밖에서였다면 성벽을 만들고 해자를 파는 일은 일당을 받고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이나 했을 법한 일이었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말도 무색하게 사람들에게 무시 받는 직업.
특히 한국은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해 회의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런 경향이 더 심했다.
미국이나 호주 같은 선진국들은 정육이나 목수 그리고 나처럼 주조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의사만큼이나 존중해 주고 대우를 해 준다던데 우리나라에선 그저 한데 싸 묶여 막일꾼 취급을 받기 일쑤였기에.
허나 이곳에선 달라질 것이다.
난 기술직 헬퍼에게 가장 많은 월급을 주고 그 지위마저 상승시켜줄 것이다.
더 이상 헌터들의 수발을 들기 위해 서포터로 따라온 것이 아니라 헌터나 의사 이상으로 그들을 존중할 수 있게.
오랜 시간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일했던 내 지난 삶이 그걸 원하고 있었다.
난 내가 품은 마음과 계획을 사람들에게 여과 없이 다 전달했다.
“……길드 규모가 작아서 여러분에게 계속 공사 지시를 하는 게 아니에요. 다른 무엇보다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해서 태백산맥에 맡기는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내가 곡괭이질을 하는 걸 부담스럽게 쳐다보던 헌터들이 모두 자기의 자리로 가서 작업을 재개했다.
은연중에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던 것마저 지금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친위대.
내 등을 지켜 줄 무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난 이들이 그와 같이 기술도 성장시켰으면 했다.
그래야 나랑 더 오랜 시간 함께하며 정도 들고 내 이상을 실현하는 데 힘이 되어 줄 테니까.
‘계속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헬퍼들과 달리 헌터들은 곡괭이질과 삽질을 하는 게 아직 익숙지 않은지 어설픈 자세였지만 그래도 이능을 각성한 헌터인지라 힘으로 곧잘 땅을 파내었다.
진지를 만들고, 투석기를 만들고, 또 성벽을 짓고…….
사람이 부족하기도 했거니와 가진바 이능의 특성 때문에 공사를 하는 내내 적극적으로 헬퍼들을 도왔던 태백산맥 길드원들은 몬스터를 사냥하는 무력 집단이 아닌 어느새 헬퍼에 더 근접하고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 투덜댄 것 같다.
발키리 길드 100+100
흑기사 부대 100
마녀 부대 100
용병 400
태백산맥 50
헬퍼 150
가뜩이나 내놓으라 하는 헌터 집단과 생활하느라 주눅이 들어 있는데 헬퍼들과 함께 궂은일마저 도맡아 하고 있다 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자격지심이 샘솟았던 모양이다.
“신기하네요. 성주님, 말 한마디에 그새 다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네요.”
박민정이 빙그레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의 얼굴에 고단함 대신 웃음이 자리하니 그새 전염이 된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
드워프가 입을 오물거렸고 무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다 멈췄다.
짐작건대 뭔가 할 말 있는 듯했는데 어차피 알아듣지 못하니 그냥 삼킨 듯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노와 절망이 섞인 눈빛을 했었는데 왠지 지금은 날 보는 시선이 따듯해 보였다.
-이놈 기분이 좀 풀린 모양인데?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근데 갑자기 왜 기분이 풀린 거지?’
-드워프는 천성적으로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은 종족이야. 근데 그것 때문에 이리저리 참 많이 고난을 받는 종족이거든.
‘고난을 많이 받았다고?’
-내가 얘기했잖아. 불을 잘 다루고 손재주가 좋은 놈들이라고. 지난번에 소환됐던 차원에서도 드워프는 장인으로 유명한 종족이었어. 대륙에 신급 아이템이 등장했다 하면 죄다 드워프가 만들었을 만큼.
‘흠…….’
-그래서 인간이고 마족이고 하다못해 몬스터들까지 드워프만 봤다 하면 잡아다가 노예로 만들어 무기를 만들게 했거든. 드워프 전사들이 제법 강하긴 하지만 워낙에 개체 수가 적어 대규모로 쳐들어오면 당해낼 재간이 없거든.
‘흠…….’
-내가 보기엔 그래서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은데? 드워프만 보면 죄다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인데 넌 노동의 중요함을 알고 또 존중할 줄 아니까. 대화는 통하지 않아도 대충 분위기 보고 호감이나 호기심 같은 걸 느낀 거 아닐까?
‘그런 거면 좋긴 한데…….’
난 기대하는 표정을 지으며 드워프를 쳐다봤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잘 좀 타일러 봐. 이놈들 땅굴 파는데도 선수야. 하도 이놈, 저놈 못살게 구니 보통 산속 깊은 곳이나 아예 땅을 파서 살거든.
‘땅굴까지 잘 판다고?’
-그냥 땅굴이 아니라 그나마 개체 수가 많은 큰 부족들은 땅 아래 도시까지 만들어서 살았어.
“헐…….”
난 감탄사를 내며 운디네를 쳐다봤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드워프는 정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아무래도 치료를 끝마치기 전에 드워프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최대한 노력이라도 해 봐야 할 듯했다.
그리고 때마침,
“성주님, 식사 시간이 다가오는데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먹을게요. 이리로 갖다주세요. 막걸리도 넉넉하게 갖다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드워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막걸리를 자연스레 줄 수 있는 시간이 다시 다가왔다.
* * *
“족발을 만들어 봤는데 돼지 냄새가 좀 납니다.”
“돼지고기에서 돼지 냄새나는 건 당연하죠.”
“성주님도 같이 드실 줄 알았으면 다른 음식을 준비했을 텐데. 김성준 팀장이 계속 같은 메뉴만 나오면 사람들이 지겨워할 것 같다고 해서…….”
“네. 저도 김성준 팀장의 뜻에 동의해요. 그러니 그만 뜸 들이고 빨리 주세요. 배고파서 현기증이 날 것 같거든요.”
“……그러면 여기.”
요리 팀 헬퍼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내 앞에 족발과 막걸리를 내려놨다.
나름 야심 차게 준비한 것 같은데 재료가 부족하다 보니 돼지 냄새 잡는 거에 실패한 모양이다.
허나 난 괘념치 않았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오전 내내 해자를 팠던 난 지금 뭘 줘도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오물오물
냠냠.
‘괜찮은데?’
요리 팀 헬퍼가 왜 걱정을 했는지 의문이 들 만큼 맛이 제법 괜찮았다.
콜라겐 덩어리.
족발을 삶아서 바로 먹으면 수육처럼 부드럽지만, 지금은 차갑게 식혀서 쫄깃쫄깃한 게 식감이 좋았다.
막걸리 한잔을 쭉 들이켜고 쫀득거리는 살 한입을 먹으니 너무너무 맛있었다.
“굿이네요. 김성준 팀장한테 정말 맛있게 잘 먹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제가 맛을 봤을 때는 분명…….”
짝!
“자식아, 그건 네가 아직 고생을 덜 해서 그래. 우리처럼 종일 땅 파고 먹어 봐라. 뭘 먹어도 맛있지.”
먹을 만하다는 데도 계속 요리팀 헬퍼가 안절부절못하자 장지원 마스터가 그의 등에 스매싱을 날렸다.
장지원 마스터의 말이 정답이었다.
솔직히 돼지 냄새가 좀 나기는 했다.
하지만 배가 고프고 실컷 땀을 흘리고 나서 먹어서 그런지 맛있었다.
1년, 2년이 지나서 지금 이 순간이 생각날 것 같을 정도로.
백화점에 정기 휴무에 직원들이랑 같이 스키장에서 먹은 어묵 국물.
백화점 오픈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부터 나가서 고기를 자르고 나서 먹은 커피 한 잔.
밤새 철야를 하고 집에 가다가 동료들이랑 같이 가서 먹은 싸구려 순댓국.
‘음식은 꼭 맛으로 먹는 게 아니니까.’
지금 이 맛은 땀을 흘려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맛이었다.
돼지 냄새가 좀 나도 같이 땀을 흘리고 고생한 동료들과 먹으면 뭘 먹어도 맛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경치까지 좋은 야외에서 먹으니 그 맛이 두 배로 좋은 듯했다.
‘동요하는 것 같지?’
-응. 그런 것 같아. 저 봐 눈빛 흔들리고 있잖아.
이번에는 드워프에게도 족발과 막걸리를 넉넉하게 주었고. 그는 식사하면서 계속 사람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맛있기만 한데, 뭘 저리 걱정하는지 모르겠네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원래는 음식을 되게 맛깔나게 한지 알겠어요.”
“하하. 그러게. 성주님 음식이야 인정하지만 성준이 형이 해 준 음식이 원래 그리 맛있지는 않았지. 맛없다고 하면 바로 국자가 날아오니 무서워 말을 하지 않았던 거지.”
“맞아요. 맞아. 없는 살림에 이 정도로 맛을 낸 걸 보면 성준이 형도 참 많이 발전한 것 같네요. 하하.”
해자 공사에 참여했던 헌터와 헬퍼들이 농까지 주고받으며 다들 맛있게 족발과 막걸리를 먹었다.
그들 누구도 냄새가 난다고 인상을 쓰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부 마스터님, 드워프의 수갑을 풀어 주세요.”
“성주님, 그건…….”
“풀어 주세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저리 묶여서 식사하는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편치 않네요.”
“……네.”
박민정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드워프의 발목에 채워진 수갑을 풀어 줬다.
이제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떠나려 한다면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다만,
“함께 합시다. 어쩌다 오크들에게 잡혀 노예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도움을 주면 그 은혜는 반드시 갚을 거니까.”
아까 운디네가 했던 말을 듣고 조금이나마 기대를 하고 있었다.
드워프가 정말 땀을 흘리고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으면 분명 지금 이 풍경이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
“#$#$#$#$”
드워프가 막걸리를 손짓하며 말을 걸었다.
짐작건대 이름을 물어보는 듯했다.
눈빛을 보아하니 막걸리 맛에 단단히 빠진 모양이다.
분명 같은 것을 먹고 있는데도 그는 나보다 열 배는 더 맛있게 먹는 듯했고 막걸리 한 통이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막걸리.”
“마으리”
“막. 걸. 리.”
“막. 거. 리.”
“네. 맞아요. 막걸리.”
“막거리.”
드워프가 막걸리를 보며 내 발음을 흉내 냈다.
‘구강 구조도 비슷해!’
두근두근.
쿵덕쿵덕.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김새가 달라 걱정했는데 그는 한국말을 발음할 수 있었다.
그 말은 가르치기만 하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수갑을 풀어줬는데도 그는 반항하거나 떠나려 하는 것이 아닌 막걸리 맛에 심취해 있었다.
“당신 이!름!은 뭔가요?”
“이르?”
“이름이요. 이름.”
난 드워프의 가슴에 손짓하며 이름을 물었다.
“카프리#$#$#$”
“카프리?”
끄덕끄덕.
드워프가 날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풀 네임까지는 아니더라도 앞에 이름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다만,
“안해용. 제 이름은 안해용이에요.”
“아해요.”
“아해요가 아니라. 안. 해. 용이에요.”
“아뇽.”
“안. 해. 용.”
“아뇨용.”
받침 발음을 조금 힘들어할 뿐이었다.
해자.
성벽.
삽.
곡괭이.
식사하는 내내 난 카프리에게 간단한 단어를 설명해 주었고,
“멈추세요. 공격하려고 그러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식사를 마친 카프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바닥에 내려놓은 곡괭이를 손에 들었다.
수갑마저 풀어 주고 무기로 둔갑할 수 있는 곡괭이를 드니 경호를 위해 옆에 서 있던 헌터들은 당장이라도 제압을 하려고 했지만 난 그들을 제지했다.
카프리의 눈빛을 보아하니 공격할 것처럼 같지는 않았다.
“$#%#%$#%#%”
그의 눈빛엔 분노가 아닌 답답함이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