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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영주님-56화 (56/255)

56화. 적벽 대전

‘이종족이라…….’

난 의문 어린 표정을 지으며 네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 다른 차원의 세계.

점점 내 짐작이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오크들만이 서식하는 던전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그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저 멀리 지윤미 마스터가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뛰어오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뭔가 또 사고가 터진 모양이다.

요 며칠 별일 없다 싶더니 역시나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성주님, 급히 땅굴 공사 현장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윤미 마스터를 따라갔다.

“걸린 건가?”

그녀를 따라가니 수백 명의 헌터와 헬퍼들이 낭패 어린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바닥에 꽂혀 있는 수백 발의 화살과 핏자국들.

보아하니 이미 한바탕 전투를 치른 모양이었다.

“다친 사람은 없나요?”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요.”

“휴우. 다행이네요. 근데 전투를 치른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오크 사체들을 처리한 건가요? 전투 흔적을 보니 한, 두 마리가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오크들은 오지 않았어요.”

“네?”

난 의문 어린 표정을 지으며 지윤미 마스터를 쳐다봤다.

‘오크 말고 다른 놈들이 쳐들어온 건가?’

눈앞에 뻔히 전투 흔적이 가득한데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앞을 봐 보세요.”

“앞이요?”

난 고개를 들고 지윤미 마스터의 시선을 따라갔다.

“저거 성벽 아니에요?”

“네. 맞아요. 저기서 오크들이 활을 날렸어요.”

“저 멀리서 여기까지 화살을 날렸다고요?”

“……네.”

“미친…….”

난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저 멀리 성벽을 바라봤다.

얼핏 봐도 대략 1,000m는 되어 보였다.

이 정도 거리면 발키리 헌터들이 쏘는 화살도 닿지 않을 거리였다.

게다가 저 성벽은 뭐란 말인가?

오크들은 마치 스카이 캐슬을 감싸고 있는 성벽처럼 부락 주위로 돌담을 쌓고 있었다.

“저놈들 지금 우리 따라 하는 건가요?”

“따라 하는 수준이 아니라 저희가 만든 성벽보다 더 견고하고 화살 역시 더 뛰어나게 만들고 있어요. 이것 좀 보세요.”

지윤미 마스터가 내게 화살 하나를 보여줬다.

검은색의 금속 화살촉과 끝부분에는 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털이 달려 있었다.

게다가 화살대 역시 우리가 만든 것보다 더 유려하고 미끈해 보였다.

-어라? 이거 아만티움인데?

‘아만티움? 그게 뭔데?’

-중간계에서 가장 단단하다고 알려진 금속이야. 오크들 따위가 가공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내가 잘못 본 건가?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카사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화살촉 부분을 매만졌다.

-아무리 봐도 아만티움 맞는데? 이 귀한 것을 고작 화살촉 따위로 쓰다니 오크들이 정신이 나갔나?

‘귀한 거라고?’

-귀하지. 미스릴보다 더 접하기 어려운 금속이야. 너희 세계로 치면 다이아몬드라고 이해하면 편할 거야. 그만큼 단단하고 양도 얼마 되지 않으니까.

‘다이아몬드?’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만티움을 쳐다봤다.

다이아몬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를 잘라내고 가공하기 위해선 같은 다이아몬드로 도구를 만들어야 할 만큼.

“놀라시는 것을 보니 성주님도 아만티움을 보신 적이 있나 보네요. 근데 놀라시기에는 이릅니다. 이것 좀 보세요.”

“헐…… 설마 화살에 뚫린 자국인가요?”

“네. 저 먼 거리에 쏜 화살이 여기까지 날아오는 것도 기가 막히는데 방패까지 뚫어내더라고요.”

흑기사 조성태.

그가 두려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구멍이 뚫린 방패를 쳐다봤다.

A급 헌터조차도 놀랄 만큼 위력이 대단한 듯했다.

‘노움, 여기 말고 다른 데 없어? 여기서부터 파내긴 힘들 것 같은데?’

-스카이 캐슬 방향으론 없어. 거기서부터 파냈다간 침수와 붕괴의 위험이 있어서 안 돼. 이쪽은 어차피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오크 부락과 맞닥뜨리게 될 테고.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형상화 한 노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땅굴을 파는 내내 조심해야 하지만 땅굴의 입구는 그중에서도 가장 안전이 보장되어야 하는 장소였다.

적에게 땅굴의 입구를 빼앗겼다가는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산채로 생매장을 당할 수도 있기에.

“저 성주님, 유거성 팀장과 상의 해 보니 여기서 투석기를 만들어 바퀴를 달고 저기까지 밀고 가면 사정거리가 닿을 것 같다고 하던데…….”

“평야 지대라 바퀴만 만들면 이동을 시킬 수는 있겠네요. 근데 투석기와 바위를 저기까지 나르는 동안 오크들의 화살을 막아 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지윤미 마스터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그동안 오크들과 전투를 치르면서도 피해 없이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건 높은 위치를 선점하고 투석기를 후방에 위치시켜 오크들의 공격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운영했던 덕분이었다.

어쩌면 오크들은 우리가 무엇을 이용해 바위와 돌을 날리는지도 모를 수 있었다.

허나 여기선 투석기를 이동시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면에 내세워야 해서 적의 화망이 집중될 것이 분명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저한테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단 한 명의 사상자가 생길 위험이 있으면 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난 지윤미 마스터가 더 말을 꺼내기 전에 어깃장을 놓았다.

최하 수십에 많으면 수백 명까지.

지구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땅굴을 파려는 것인데 사상자가 나올 것이 뻔한 전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땅굴은 파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포기를 해야 하는 건가요?”

“포기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말한 작전은 피해가 너무 커서 허락하지 않겠다는 거지.”

“그 말이 그 말 아닌가요? 이미 여러 차례 투석기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본 오크들이 학습 능력이 생겨 저리 성벽까지 짓고 있는데,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를 해야…….”

“살릴 수 있는데 굳이 죽을 자리로 보낼 필요는 없죠.”

“네?”

“저 화살만 해결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근데 지금 보셨다시피 합금으로 만든 방패마저 뚫어내서 그게 어려우니…….”

“화살을 해결한다고 했지. 막아 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잠시만. 생각 좀 할 시간을 주세요.”

난 손을 들어 지윤미 마스터의 말을 막고 눈을 감았다.

오크 부락1 2만 추정.

지윤미 마스터의 말처럼 이미 여러 차례 투석기 공격으로 피해를 받은 오크들은 투석기에 대한 공포심이 생긴 듯했다.

그래서 저 많은 병력을 갖고도 돌격하지 않고 우리처럼 원거리 공격을 하면서 성벽을 쌓고 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아마 우리가 투석기를 만들어 밀고 들어가면 미친 듯이 화살을 쏘아댈 것이다.

“지윤미 마스터님 혹시 적벽 대전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삼국지에 나오는 거 아닌가요?”

“네. 맞아요. 제갈량이 안개를 이용해 적의 화살 수십만 발을 빼앗은 전투로 유명하죠.”

난 지윤미 마스터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갈해용.

오크들의 공포심을 이용하면 나도 어쩌면 제갈량의 흉내를 낼 수 있을 듯했다.

“오! 역시 우리 성주네. 그런 방법이 있었네.”

“형님도 삼국지를 읽으셨나 보네요. 설명도 안 했는데 그렇게 칭찬해 주시는 걸 보니.”

“그럼. 남자 중에 삼국지 안 읽은 사람도 있나. 하하. 내게 맡겨 줘. 우리가 선봉에 설게.”

태백산맥 길드 마스터. 장지원.

그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왠지 그 웃음이 못 미더웠다.

말하는 본새를 보니 삼국지를 제대로 읽지 않은 듯했다.

난 그에게 간단한 시험을 했다.

“그럼 삼국지 천하 통일도 누가 했는지 아시겠네요?”

“물론이지. 삼국지를 안 본 사람들은 유비가 한 줄 알지만, 조조가 천하 통일을 했잖아.”

“끙…….”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장지원 마스터는 삼국지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

삼국지의 천하 통일은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가 했으니까.

게임과 드라마, 영화까지.

일상생활에서 삼국지를 접할 기회는 많지만, 책으로 정독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라면 한 번쯤 읽어 봐야 한다며 이래저래 추천하지만 사실 재미가 그리 있지는 않기에.

그래서 장지원 마스터처럼 삼국지의 유명한 전투나 일화 같은 것을 대충은 알지만,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형님, 안 그러시다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난 장지원에게 다가가 조용히 귓속말했다.

그동안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더니 오늘따라 앞에 나서는 게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용병들 완치되면 의사들 물어봐서 마음에 드는 길드에 편입시키기로 했어.”

“그래요?”

“친한 척 좀 해줘. 이참에 길드 규모 좀 키우게. 흐흐.”

장지원 마스터가 날 보며 익살스런 미소를 지었다.

“알았으니까 이러지 마세요. 삼국지 천하 통일은 사마염이 했어요. 제가 알아서 도울 테니까 하던 대로 하세요.”

“……그래.”

장지원 마스터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한 길드의 수장이 되기엔 뭔가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의 저런 허허실실함이 난 마음에 들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난 각 길드의 수장을 불러 적벽 대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 * *

“걱정하지 마시고 작업하세요. 여기까지는 사정거리가 닿지 않으니.”

“네, 알겠습니다. 성주님.”

오크들의 화살 사정거리 끝부분에서 기술직 헬퍼와 헌터들이 투석기 제작을 시작했다.

조금 더 안쪽에서 해도 되지만 일부러 오크들이 볼 수 있게 잘 보이는데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오크들의 공포심을 더 키우기 위함이었다.

“거성 씨, 허수아비 만드는 건 잘 되고 있나요?”

“네. 이 속도라면 일주일 내로 이천 개 다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 거성 씨네요. 그럼 투석기와 허수아비 제작은 거성 씨한테 맡길 테니 잘 좀 지휘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성주님.”

난 유거성에 지휘를 맡기고 김성준을 찾았다.

이 작전의 승패는 네로와 고양이들에게 달려 있기에.

제갈량은 천문과 날씨를 읽고 안개가 서리는 날을 예상해 디데이로 잡았지만 난 인위적으로 안개를 만들 생각이었다.

“네로야, 안개!”

“냐아앙.”

아니 부비부비하지 말고 안개 펼치라고.

“네로야! 안개!”

“냐아앙.”

할짝할짝.

할짝할짝.

아니 핥지 말고 안개 만들라니까?

“너 형 말 안 들을 거야! 안개 만들라고 안개! 그땐 잘했잖아!”

“냐아앙.”

부비적부비적.

안개를 펼치라는데 네로가 계속 애교만 부렸다.

이놈 아무래도 나한테 단단히 빠진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오빠, 여기서 뭐 하세요?”

“냐아앙!”

수정이가 다가왔고 바닥부터 깊은 운무가 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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